[제국과 인간 92] 사이토와 이광수

김갑수 항일역사팩션 제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

등록 2008.07.28 13:17수정 2008.07.28 13:17
0
원고료로 응원
사이토의 식민지 공략법

환갑을 넘겨 고희를 바라보는 조선 총독 사이토는 법치(法治)보다 인치(人治)를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법치는 효율적이긴 해도 반대 세력을 만들지만, 인치는 더딘 것 같아도 결국 일을 이루어 내는 힘이 있는 것으로 그는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저항 세력을 아우르는 방법으로 철저한 인치를 택한 것이었다.

사이토는 많은 조선인을 만났다. 그는 독립 선언을 주도한 조선인에 대해서 기탄없이 감형을 하거나 형 집행을 정지하여 석방해 주기도 했다. 최남선과 최린은 이미 그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상해에서 들어와 형을 면제받은 이광수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오가며 기대 이상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사이토는 인생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해군 대신으로 근무할 때 독직 사건에 연루되어 사임했지만, 다시 조선 총독으로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무리하지 않으며 도를 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여기고 있었다. 그는 총독 임무를 무리 없이 수행하여 본국에 돌아가 총리대신으로 관직 생활을 마감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더 온유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는 조선 지도자에게 너무 무리한 충성을 요구하면 오히려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조선 대중에게 영향력을 지니려면 그들에게도 어느 정도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재량을 주어야 했다.

사이토는 부임 초기 세웠던 친일파 양성책을 다시 점검해 볼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지식인과 재산가들은 그의 기대 이상으로 쉽게 끌어들일 수가 있었다. 가장 힘 드는 부류는 노동자와 지방 양반이었다. 그러나 노동자와 양반은 이미 조선에서 힘을 거의 못 쓰게 된 계급이기도 했다. 그는 그것을 조선인의 개화· 계몽 열풍 때문이라고 보았다.

사이토의 책상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조선 지도급 인사 69명의 현황파악보고서가 올라와 있었다. 69명 중 김가진 (남작), 김사준 (남작), 김윤식 (자작), 이용직 (자작), 이용태 (자작) 등 5명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작위를 박탈당했고 3명이 품위 실추와 파산으로 작위를 잃었을 뿐, 대다수인 59명이 일본에 협조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3·1운동을 수습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 중 이완용과 송병준과 이지용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졌다. 그러나 사이토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노골적인 친일파로 인식되어서 더 이상 조선 대중에게 영향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소홀히 대우할 수는 없었다. 그들을 우대해야 그들처럼 되려는 조선인이 계속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완용이나 송병준, 이지용처럼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았다. 예컨대 남작 박제빈은 총독에게 3·1운동 직후 ‘민심수습건의서’를 올렸고 김종한은 ‘원래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었으므로 독립이나 공화라는 말을 모르는 민족’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장석주는 조선인들의 소요가 있을 때마다, 무력으로 진압해 달라고 총독에게 건의문을 올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개별적인 성과에 비해서 엄청난 효과를 본 것은 ‘민족개조론’이라는 정치 모략이었다. 이것은 총독 통치의 합리화에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논리였다. ‘약육강식’과 ‘우승열패’는 이제 조선인들이 신봉하게 된 자연계의 법칙이었다. 따라서 우수한 민족은 열등한 민족을 얼마든지 지배하든지 보호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 민족의 열등성이 증명되어야 했다. 그렇기에 사이토는 조선인에게 자기 비하, 속되게 말해서 엽전 의식을 주입하는 데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었다. 주로 언론과 교육과 역사 연구를 통한 방법이었다. 어떻게 헤서든지 조선인을 나약하고 체념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여기에 이용한 것이 이른바 신식 연애 풍조의 조장이었다.

나무랄 데 없는 이광수

그런데 양반 출신 중에는 조선이 문화국가임을 확신하는 이가 많았다. 그들이 가진 거라고는 완고한 똥고집밖에는 없어 보였다. 조용히 순응하는 척하다가도 도가 지나쳤다 싶으면 앞뒤 안 보고 격노하는 것이 조선 양반들의 행태였다. 지금 사이토 총독이 가장 귀중한 보물로 여기는 조선인 세 사람이 있었다. 최린, 최남선, 이광수였는데 이들은 모두 양반 출신이 아니었다.

이 중에서도 이광수는 사이토가 보기에 나무랄 데가 없는 활약을 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탁월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거기에다 끝없는 매명심(賣名心)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광수는 사이토의 제의로 <수양동맹회>를 만들었다. 그는 사전에 이 단체의 규약을 만들어 총독부에 제출해서 충분한 검토를 받았다.  

김문수가 보기에 이광수의 소설은 온통 연애 일색이었다. 그가 말하는 아름다운 사랑에는 물질과 서구 취향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했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은 대부분 서양 음악을 전공했는데, 그것도 엄밀히 말해 음악을 동경해서라기보다는 서구를 추종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소설은 사랑의 갈등을 민족 계몽으로 승화하는 주제를 천편일률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도 오류가 도사리고 있었다. 남녀의 사랑이란 인간이 이루어낼 수 있는 가장 복잡하고도 수준 높은 정념이라고 하겠는데 그것을 어떻게 단순하고 낮은 수준의 이념인 민족 계몽으로 승화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철저히 대중의 저열한 취향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이광수의 아류가 무성하게 일어났다. 신문에서는 젊은 여성의 범죄는 무조건 미화했고, 청춘 남녀의 연애 사건은 기회를 만났다는 듯이 대서특필했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조국의 독립이란 대의명분을 잊게 하기위해서는 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저속한 작가들은 사랑과 관련된 죽음을 미화하고 예찬하기에 이르렀다.

검은 옷을 해골 위에 걸고
말없이 주톳빛 흙을 밟는 무리를 보라
이곳에 생명이 있나니
이곳에 참이 있나니
(중략)
번쩍이는 진리는 이곳에 있지 아니하랴?
아, 그렇다. 영겁 위에
-박종화, <사의 예찬>

대관절 무슨 이유로 해골과 지옥과 저승에 번쩍이는 진리가 있다는 것인지 김문수는 알 수 없었다.

더 심한 것은 노자영의 <사랑의 불꽃>이었다. 그의 서한집 두 번째 편지의 제목은 ‘독약을 마신 후에’였다. 그것은 애인의 앞길을 막고 있다는 죄책감으로 음독자살하는 처녀의 사연을 담고 있었다. 다른 소설 <최후의 하소연>도 비슷한 내용이었다.

<자살자의 수기>는 연애의 상처 끝에 자살한 청년의 일기였고, <무한애의 금상>에서는 무려 여섯 사람이 자살로 죽어가고 있었다. 집안의 결혼 강요 때문에 음독자살하는 처녀, 주인공을 짝사랑하다 한강에 몸을 던지는 처녀, 이를 따라 독약을 먹는 주인공, 처녀와 총각 양가 어머니의 합의 동반자살 그리고 아버지까지도 아내를 따라 자살하고 있었다.

동아일보의 퇴폐 조장

이렇게 신문과 소설은 식민지 조선에 지독한 나약과 허무와 퇴폐를 조장하고 있었다. 특히 신문은 단순한 자살 사건 하나를 보도하는 데에도 으레 치정과 퇴폐적인 요소를 삽입하여 식민지 백성들의 이목을 끌고는 했다. 당시 동아일보의 사건 기사 하나를 읽어 보자.      

'졸업 앞두고 우등생이 자살, 유서 쓰고 사진까지 박혀'

평북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 5학년 생 길삼식(23)은 17일 오전 3시에 평양 을밀대 부근에서 목을 매고 자살한 것을 동 3시 반에 부근을 통행하던 자동차 운전사가 발견하였는바, 학생복을 입고 학생모를 썼으며 현장에 남아있는 소지품은 책보, 재학증명서, 철도할인권 3매, 학생의 사진 3매와 기타 수종으로 그 원인을 탐문한 바에 의하면 동 학생은 안주에 현 주소를 두고 오산학교에서 우등생으로 해마다 1호를 점령하였고 학비는 극히 곤란하여 동교 교주 김기홍 집에서 유하며 도움을 받아 공부하여 오던 바 졸업을 앞둔 지 몇 날이 안 된 이때에 돌연히 자살한 것은 어떤 중대한 이유가 잠재하였으리라 추측하나 아직까지 그 원인을 알 수 없다더라.

'독약 먹고 다시 자액'

그와 같이 자살을 결행한 길 군이 죽기로 결심한 것은 15일인 듯한데 그가 가지고 있던 수첩에 의지하면 그는 수일 전에 평양에 도착하여 지인을 방문하고 14일에는 극장에 구경까지 갔으며 15일에는 단연히 죽기를 결심하고 유서 10통을 써 가지고 16일 정오에 당지 황금정 아래 사진관에서 그 유서를 앞에 놓고 고별의 사진을 박은 후 그 유서를 발송하고 독약 ‘모루히네’를 사 가지고 을밀대에 가서 그것을 마시고 30분을 기다리나 약의 효과가 없으므로 다시 시가로 내려가서 삼노끈을 사 가지고 중국인의 호떡집에서 호떡을 사 먹으면서 이상과 같은 사실을 일일이 적은 후 다시 을밀대로 올라가서 그 같이 목적을 달한 모양이더라.

'일기 일절. 의문의 건'

옷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자기가 죽은 후에 시체는 화장을 하지 말고 조선식으로 묻되 평양에 묻어 주기를 바란다 하였고 부형은 절대 평양에 나오지 말기를 바란다 하였고 비석에 쓸 비문까지 적었으며 또 신문 기자 제군에게 준다는 유서에는 자기 죽은 원인을 추구하지 말고 “정신병자로 몰아주시오. 아마 그것이 제일 좋을 듯하오”하였으며 수첩의 일기 15일 자 아래에 “나는 당신을 위하여 죽는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따르지 말라”하는 의미가 있는 듯한 구절이 의문의 열쇠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데 그 시체는 경찰의의 검사를 마치고 그의 친척에게 통지하여 시체 찾아가기를 기다린다더라. (평양)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한 성공한 인간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제국주의에 도전한 성공한 인간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사이토 #이광수 #최린 #동아일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게 뭔 일이래유"... 온 동네 주민들 깜짝 놀란 이유
  2. 2 3일마다 20장씩... 욕실에서 수건을 없애니 벌어진 일
  3. 3 팔봉산 안전데크에 텐트 친 관광객... "제발 이러지 말자"
  4. 4 참사 취재하던 기자가 '아리셀 유가족'이 됐습니다
  5. 5 공영주차장 캠핑 금지... 캠핑족, "단순 차박금지는 지나쳐" 반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