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구미에는 효자가 많았나봐!

[두 바퀴에 싣고 온 이야기보따리 52] 구미시 문화재 '거류암'과 '효열비각'

등록 2008.07.24 18:45수정 2008.07.2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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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류암(시묘암) 구미시 고아읍 예강리 자기를 길러준 양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여섯 해 동안 좁은 바위틈에서 '시묘살이'를 했어요. 우리 나라 사람들의 효심 깊고 따듯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손현희


"시묘살이? 아빠, 시묘살이가 뭔데?"
"옛날에는 말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무덤 가까이에 움막을 지어놓고 거기에서 3년 동안 살면서, 살아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부모님을 모셨지. 그걸 시묘살이라고 하지."


"3년 동안이나?"
"그래. 3년 동안 날마다 산소에 가서 풀도 뽑고,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면서 제사상을 차려드리고 움막에서 살았지. 옛날엔 높은 벼슬을 하던 사람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서 그렇게 시묘살이를 했지."

"하아! 그렇게 오랫동안 날마다 부모님 무덤가에서 살았단 말야?"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였어요. 나무꾼이 산속에서 나무를 하다가 큰 호랑이를 만나 발에 박힌 가시를 빼준 일이 있었지요. 나중에 나무꾼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무덤가에서 '시묘살이'를 하느라고 홀어머님이 사시는 집에는 갈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홀로 계신 어머님을 위해 누군가 새벽마다 와서 토끼나 사슴을 한 마리씩 던져놓고 갔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지난날 발에 박힌 큰 가시를 빼주었던 호랑이가 한 일이었다는 걸 알고 '짐승도 은혜를 갚을 줄 안다'는 옛날이야기를 해주셨지요. 이때 처음으로 '시묘살이'를 알게 되었답니다.

이야기보따리 '떽떼구르르르릉~'

어릴 적엔 아버지한테 옛날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밤늦도록 떼를 쓰며 옛날이야기 해달라고 조르던 생각이 나네요. 그럴 때면, 아버지도 이야기를 들려주다 지쳐서 끝에는 늘 이런 얘기로 마무리를 하셨지요.

"어떤 사람이 이야기보따리를 지고 산꼭대기에 올라갔다가 그만 이 보따리가 떨어져버리고 말았지. 그런데 이놈이 글쎄, 저 밑으로 떼굴떼굴 굴러가는 거야."

하며 시작하여, 끝없이 '떼굴떼굴' 구르는 이야기만 해주었지요.


"떼굴떼굴~ 떼굴떼굴~ 또 떼굴떼굴~ 떽떼구르르릉~ 또또또 떼굴떼굴~~~"

아버지가 '떽떼구르릉~' 하면서 발음을 세게 하면, 그게 어찌나 재밌든지 '까르르' 웃곤 했지요. 그러다가 이야기보따리가 구르는 소리에 스르르 잠이 들다가도 아버지 얘기소리가 안 들리면 다시 눈을 번쩍 뜨곤 했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또 기다렸다는 듯이, "어! 지금도 구르고 있네? 또 떼굴떼굴 떼굴떼굴~~"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나 '은혜 갚은 호랑이'…. 또,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하고 스무 고개를 다 넘을 동안 떡장수 아줌마의 떡을 모두 빼앗아먹고는 끝내 잡아먹고 말았다는 얄미운 호랑이 이야기까지…. 꼭 호랑이가 나오는 얘기에는 잔뜩 겁먹은 낯빛으로 귀를 쫑긋이 세우고 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 가운데 '은혜 갚은 호랑이' 이야기는 퍽 감동스러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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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읍 예강리 마을 어귀 저기 큰 나무를 따라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마을 끝까지 올라가면, 그 옛날 심회가 시묘살이를 하던 '거류암'이 나온답니다. ⓒ 손현희


바위틈에서 '시묘살이'를 하다

예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남달리 효성스러웠지요. 부모님을 공경하고 임금께 충성하는 걸 아름다운 덕으로 여겨왔으니까요. 요즘이야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니,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 이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래도 가끔 이런 소식이 들려오는 걸 보면 참 아름답고 착한 사람이 틀림없어요.

얼마 전 어릴 때 아버지한테 옛날이야기로 들었던 '시묘살이'를 한 흔적을 우리 마을 가까이에서 찾을 수 있었어요. 한낮 온도가 무려 35℃를 오르내리며 참으로 무더웠던 지난 두 주 동안 자전거를 타고 옛사람들의 착하고 아름다운 효심이 깃든 발자취를 따라 가보았답니다. 먼저 구미시 고아읍 예강리에 있는 '거류암'을 찾아갑니다.

'거류암'은 또 다른 말로 '시묘암'이라고도 해요. 바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공양하며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한 곳이에요. 그런데 친 부모님이 아니라, 양부모님이라서 더욱 따뜻하고 아름다운 얘기가 깃들어 있답니다. 이곳은 그 옛날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옛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움막이 아니라 커다란 바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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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류암(시묘암) 자기를 길러준 양아버지를 생각하며 이 바위틈에서 시묘살이를 했던 심회가 외롭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무섭지는 않았을까? ⓒ 손현희


양부모님 시묘살이를 여섯 해 동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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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좁은 틈에서 안을 들여다봤는데, 매우 좁았어요. 어른이 앉아서 다리를 펼 만큼... ⓒ 손현희

조선 초기에 영의정을 지낸 심온(1418년 태종 18)이 태종을 비난했다는 사건과 관련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길에 그만 억울하게 잡혀서 사약을 받고 죽었어요. 그 뒤 이집 식구들도 모두 역적으로 몰려 몸을 피하게 되었는데, 갓난아기인 아들 심회(1418~1493)를 '강거민'이란 이가 거두어 길렀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아버지 심온의 억울함이 밝혀지고, 나중에 그 아들 심회는 아버지처럼 영의정 벼슬까지 오르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자기를 길러준 양아버지 강거민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무려 여섯 해 동안이나 시묘살이를 했답니다. 그때, 양아버지의 무덤 바로 아래에 있는 커다란 바위틈에서 살면서 온 마음을 다해 산소를 돌보고 모셨다고 해요. 그 시묘살이 터가 바로 고아읍 예강리에 있는 '거류암'이랍니다.

예강리 마을에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산 밑에서 왼쪽으로 외딴집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이 집 뒤, 텃밭 곁에 커다란 바위가 낮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어요.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바위 밑에는 좁은 구멍이 있고 그 안에는 사람 하나가 들어가서 앉아 다리를 뻗을 만한 매우 좁은 곳이었어요. 이런 곳에서 여섯 해 동안이나 살았다니, 게다가 친부모님도 아니고 양아버지를 그렇게나 정성스럽게 모셨다니 퍽 놀라웠어요.

'그 옛날 심회는 이 좁은 틈에서 시묘살이를 하면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또 '옛날엔 지금과 달라서 이곳이 매우 깊은 산속이었을 텐데 무섭지는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뭉클했답니다. 자기를 길러준 부모님을 생각하며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틀림없이 효성이 지극하고 착한 분이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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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곡동 효열비각(경북문화재자료 제391호) 이 사진은 지난해 봄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이랍니다. 그때에는 곁에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어요. 며칠 앞서 다시 가보니, 아파트는 다 지었고 이번에는 이 효열비각을 고쳐 세우느라고 앞에 철기둥을 엮어 놓았더군요. ⓒ 손현희


구미시 봉곡동에 가면, 부모님께 효성을 다한 효자들을 기리며 나라에서 임금이 내려준 '효열비각'이 하나 있답니다. 이 마을에 이름난 효자 '박진환'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상주에 계시던 아버지가 매우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병간호를 했지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먹이면서 아버지를 온 마음으로 간호를 했지만 끝내 돌아가셨답니다. 그 뒤로 아버지 무덤가에서 3년 동안 자기 몸은 돌보지 않으면서 시묘살이를 하다가, 그만 병을 얻어 마흔 여섯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어요.

이렇게 효성스러운 박진환의 이야기를 들은 숙종임금이 이 정려각을 세워주었답니다. 이 봉곡동 효열비각(경북문화재자료 제391호) 안에는 빗돌이 두 개가 나란히 있는데, 하나는 본디 있던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6·25 때 빗돌이 부서져서 새로 세운 것이지요. 착하고 어진 사람들은 아마도 집안 대대로 그 마음씨가 이어져 내려오나 봅니다. 효자 박진환의 3대손과 8대손인 '항령'과 '래은'의 아내들은 모두 열녀랍니다.

열녀 양주 조씨와 함종 어씨(자료에는 여인네들의 이름은 없고 그저 본과 성씨만 적혀있답니다)는 남편이 병이 나서 정성을 다해 간호했지만 일찍 죽자, 이튿날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지요. 나라에서 이들한테도 정려를 내려주었다고 합니다. 효열비각 안에는 이 두 열녀들을 기리는 편액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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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박진환 정성을 다하여 아버지 병간호를 한 효자 박진환을 기리는 빗돌이에요. 왼쪽은 본디 있던 것이고, 오른쪽은 새롭게 세운 거랍니다. 6.25때 빗돌이 부서져서 새로 세웠다고 하네요.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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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이명준 구미시 봉곡동 도서관 앞에는 효자 정려각이 두 채나 있답니다. ⓒ 손현희

이밖에도 봉곡동엔 효성스런 이들을 기리는 정려각이 몇 군데 더 있어요. 지금 '구미시 봉곡 도서관' 앞마당에 있어요.

정려각은 새로 만든 듯 보였는데, 효자 이명준의 빗돌은 정려각 바깥에 두었고, 또 다른 하나는 안에 두었어요.

착하고 효성스러운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이라 그런가?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에 있는 '의우총'에 얽힌 것과 비슷한 얘기가 이어온답니다.

소가 주인을 살리려고 호랑이와 싸우다가 죽은 걸 기리는 것인데, 봉곡동 의우총은 송아지가 팔려간 뒤에 다시 돌아와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다 죽은 걸 기리려고 세운 빗돌이랍니다.

또 해평면 낙산리에는 주인이 잠든 사이 불이 나자, 낙동강 물에 몸을 적셔와 불을 끄고 죽었다는 개를 기리는 '의구총'도 있지요.(관련기사 :어라! 여긴 교과서에서 배웠던 거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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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곡동 의우총 집짐승도 자기를 길러준 주인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팔려간 송아지가 다시 되돌아와 슬퍼하다 죽었대요. ⓒ 손현희


우리가 사는 마을 가까이에 이렇게 마음 착하고 효성스런 이들이 많이 살았다는 게 퍽 자랑스러웠어요. 하다못해 집짐승들마저도 자기 임자한테 은혜를 갚는다는 것을 보면서 많은 걸 느낍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이런 훌륭한 일을 본받으면 참 좋겠네요. 자라나는 아이들한테도 매우 뜻 깊은 가르침이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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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다가, 이젠 자동차로 다닙니다. 시골마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정겹고 살가운 고향풍경과 문화재 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때때로 노래와 연주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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