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초보,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다

등록 2008.07.31 11:48수정 2008.07.3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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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천왕봉에 가본 사람과 못 가본 사람,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결의는 너무나 즉흥적이었다. 지리산 천왕봉을 그런 식의 '가벼운' 결의로 올라갈 수 있을까? 게다가 10명의 산행 참가자 중 단 2명만이 천왕봉에 올라본 경험이 있을 뿐 8명은 초행길이다. 그뿐 아니라 그 중 반 수 이상은 청계산도 올라보지 못했다. 다시 말해 10명 중 반이 지리산은 고사하고 산행 자체가 처음인 셈이다. 프로젝트를 마친 직원들과 일정이 맞는 일부 동료 직원들이 합세해서 1박 3일의 지리산행을 가기로 결의한 것은 그렇게 너무 갑작스레 이루어졌다.


바쁘게 하루 근무를 마친 산행 참가자들이 하나둘 동서울터미널에 모여든다. 더러는 가까운 강촌으로 MT를 다녀올 듯한 차림이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밤 12시에 출발하는 백무동행 버스는 지리산행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아주 고마운 대중교통 수단이다. 새벽 4시쯤 지리산의 품 속인 백무동에 내려주는데 잠시 짐을 꾸리고 바로 산행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급작스럽게 결의된 지리산 등반

a 장터목 대피소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피소이다. 이곳에서 천왕봉까지는 50분 거리

장터목 대피소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피소이다. 이곳에서 천왕봉까지는 50분 거리 ⓒ 이현상


서울을 떠난 버스는 막힘없이 함양을 거쳐 백무동에 새벽 3시 40분경 도착한다. 아직 동이 트기까지는 1시간 이상이 남았지만 미리 챙겨온 헤드랜턴을 켜고 바로 산행에 나선다.

늘 그렇지만 이번 산행도 초반이 가장 힘들다. 아직 몸이 충분히 달궈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잠도 모자란 상태이기 때문이다. 평일 새벽 산행인지라 다른 등산객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랜턴 불빛에 의지하여 호젓하게 지리산의 품으로 빠져들어 간다.

어느새 아침이 밝아오고 긴긴 산행이 이어진다. 백무동을 떠난 지 5시간. 마침내 지리산의 마루금에 올라선다. 애초 일찌감치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해 직장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서비스 모델에 대한 토론을 가질 생각이었으나 다들 들뜬 마음과 밤샘 등반으로 지쳐있어 술잔 안으로 쏟아 내릴 것 같은 별빛에 감탄하며 첫날밤을 보낸다.


다음날 하늘이 흐려 천왕봉 일출이 보기 어려워졌다. 삼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 본다는 천왕봉 일출은 다음 기회에 미루고 여유 있게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제석봉 화사목


a 제석봉 화사목 제석봉은 1950년대 벌목 흔적을 없애러 불을 지른 후 황폐한 봉우리가 되었다.화사목이 애처롭다.

제석봉 화사목 제석봉은 1950년대 벌목 흔적을 없애러 불을 지른 후 황폐한 봉우리가 되었다.화사목이 애처롭다. ⓒ 이현상


오전 8시 천왕봉을 향해 장터목 대피소를 출발한다. 장터목 대피소에서 바로 이어지는 제석봉은 원래 하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헐벗은 채 지나는 등산객들에게 아픈 과거를 상기시켜준다.

제석봉의 고사목은 사실은 화사목(火死木)이다. 이승만 정권 때 벌목꾼들이 아름드리나무를 벌목한 후 그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불을 질러 지금의 황량한 봉우리로 남게 된 것이다. 다시 숲이 살아날 수십 년, 아니 수백 년까지는 인간의 탐욕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눈 시린 하늘은 그들에게 더욱 슬프다.

a 제석봉 전망대 제석봉에 정상 부근에는 멀리 노고단까지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제석봉 전망대 제석봉에 정상 부근에는 멀리 노고단까지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 이현상


제석봉을 오르다 보면 지리선 마루금 전체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천왕봉의 턱밑이니 이쯤에서 지리산 전체를 바라보며 거친 숨을 고르기에 안성맞춤이다.

하늘에 이르는 통천문(通天門)을 통과하면...

a 마침내 천왕봉 통천문을 지나 마지막 가파른 구간을 올라서면 마침내 천왕봉이다.

마침내 천왕봉 통천문을 지나 마지막 가파른 구간을 올라서면 마침내 천왕봉이다. ⓒ 이현상


화사목 군락을 이룬 제석봉을 지나 하늘에 이르는 문이라는 통천문을 지나면 마지막 오르막이 앞을 가로막는다. 천왕봉에 오르는 마지막 오르막이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곧 천왕봉에 오른다는 생각으로 더운 김을 뿜어내며 힘은 낸다. 마침내 천왕봉 정상에 선다. 10명 모두 무사히 천왕봉에 올랐다는 기쁨에서인지 다들 여유를 찾는다.

a 천왕봉에서 노트북을 토론을 위해 준비한 노트북이 촬영소품으로 쓰였다.

천왕봉에서 노트북을 토론을 위해 준비한 노트북이 촬영소품으로 쓰였다. ⓒ 이현상


태어나 처음 천왕봉에 올랐다는 기쁨을 서로 나누며 손바닥을 마주친다. 상대방에 대한 축하이기도 하며,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기도 하다. 남들 보기에는 조금 남세스럽기도 하다. 그 무슨 8000미터급 히말라야를 오른 것도 아닌데.

그러나 산이라고는 600미터 청계산도 올라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겁 없이 나선 첫 산행이 남한에서 가장 높은 1915미터의 지리산이라니 그럴 만도 하다. 몇몇 일행은 토론을 위해 준비해온 노트북을 꺼내 촬영 소품으로 삼는다. IT업계 종사자다운 발상이다. 여러 번의 지리산행 중에서 이런 기발한 연출 샷은 처음이다.

중산리 하산길, 다리가 풀리다

a 중산리 하산길 중산리 코스는 가장 짧은 하산길이지만 그만큼 가파르다.

중산리 하산길 중산리 코스는 가장 짧은 하산길이지만 그만큼 가파르다. ⓒ 이현상


중산리 코스는 천왕봉에 이르는 가장 짧은 길이다. 하지만 짧다고 얕잡아보다가는 큰코다친다. 산은 항상 솔직하다. 돈과 권력이 있다고 천왕봉 이르는 길이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짧은 거리인 만큼 가장 힘든 길이기도 하다. 급경사의 내리막이 거의 중산리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며칠간 계속된 비에 마르지 않은 천왕샘에서 목을 축이고 하산길을 재촉한다. 중산리 하산길의 중간쯤에 자리한 로터리 대피소에서 가볍게 요기를 하고 마저 내려선다. 몇몇은 마지막 남은 하산길 2km 지점에서 다리가 풀려 걸음이 더디다. 그러나 함께 오른 길, 함께 내려온다. 무사히 내려선 중산리에서 막걸리 잔을 부딪친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이리라.

안전한 산행을 위해서
지리산은 어느 길로 올라도 4시간 이상의 등산과 3시간 이상의 하산을 거쳐야 한다. 또한 1500미터 이상의 능선길 기후는 변화무쌍하다. 그만큼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일행 중 지리산행 경험이 있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 안전하며, 일행 개개인의 체력 안배와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처 방안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준비물은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계절과 상관없이 준비해야할 필수품이 있다. 낮에만 산행하는데 랜턴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하겠지만 어느 산을 가더라도 헤드랜턴은 필수. 완벽한 방수, 방풍 재킷까지는 몰라도 바람은 막아낼 수 있는 재킷도 꼭 챙긴다.

먹은 만큼 간다는 게 산이다. 초코바와 소시지 따위의 행동식도 개인별로 챙겨야 한다. 산행에 나서기 전 자기가 오를 등산로를 미리 머릿속에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 안전을 위해서도 그렇고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내려와서도 자기가 오르고 내려온 길을 다시 한 번 지도상으로 확인한다. 내가 진정 이 산을 올랐단 말인가, 그런 기쁨은 다시 느끼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IT업체인 (주)유젠의 직장 동료들과 함께 한 지리산행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IT업체인 (주)유젠의 직장 동료들과 함께 한 지리산행기입니다.
#지리산 #천왕봉 #유젠 #UZ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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