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이 집주인 되는 프랑스' 약속, 그 1년 뒤

[해외리포트] 주택난 겪는 서민의 출구, 사회 임대 건물

등록 2008.08.02 14:09수정 2008.08.0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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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ITAR-TASS=연합뉴스
"모든 프랑스인이 집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

지난해 대선에서 사르코지 후보가 내건 공약 중 하나다. 사르코지 정부 출범 1년여가 지났다. 이 공약은 잘 이행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현재까지는 그렇지 않다. 집주인이 되기는커녕 적절한 셋집을 구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놓인 프랑스 서민은 여전히 많다.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프랑스에도 불행히도 주택 문제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과 결별해야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집이 없는 이들을 도와주는 아베-피에르 재단의 올해 통계에 따르면 330만 명의 프랑스인이 형편없는 주거지에서 살고 있다.

주택 문제가 특히 심각한 곳은 파리와, '일 드 프랑스'로 불리는 파리 근교 지역. 프랑실리엥(파리와 일 드 프랑스 지역에 사는 이들)의 85%가 적절한 주거지 확보를 제1의 관심사로 여길 만큼 이곳의 주택 문제는 심각하다. 수급 불균형 문제 때문에 특히 저소득층은 이런저런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주거지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소득자료 제출에 보증에 높은 월세까지... 집 구하기 힘드네

사실 부유층이 아니고서는 파리에서 마음에 드는 아파트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건축된 지 100년이 넘는 아파트가 즐비하고, 오래된 건물이라도 웬만하면 허물지 않고 수시로 수리해가면서 쓰는(프랑스에서는 10년에 한 번씩 건물 외관을 보수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다) 파리지엥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리의 아파트 중에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내부는 허술한 경우가 상당히 많다. 오래 된 아파트일수록 창이 작기에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실내가 어둑어둑하고, 좁고 길게 이어진 아파트 중앙의 복도를 통과해야 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된 경우가 많다. 방들 역시 좁고 어둡기는 마찬가지여서 우울증에 걸리기 십상이다. 

셋집을 구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오래된 아파트를 수십 채 방문해 운 좋게 맘에 드는 아파트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바로 계약서를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집주인과 부동산에서 이런저런 서류를 요구하는데,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세입자의 소득자료다. 원칙적으로는 세입자의 소득이 월세(프랑스에는 전세 시스템이 없다)의 2배 이상이 돼야 하는데, 주택 공급이 부족한 파리에서는 3~4배를 요구하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월세 1000유로(약 158만원)의 아파트에 입주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파리에서 이 정도 금액으로 구할 수 있는 아파트는 평수가 넓은 아파트가 아니다. 동네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예컨대 기자가 살고 있는 파리 19구(상대적으로 집값이 싼 곳이다)의 경우 월세 1000유로로 구할 수 있는 아파트의 넓이는 40~50㎡ 정도다.

이러한 월세 1000유로의 아파트에 입주하려면 세입자의 월 소득이 최소 2000유로 이상이어야 하며, 3000~4000유로(약 474만~632만원) 이상일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문제는 프랑스에서 월 소득이 4000유로를 넘는 가정이 전체의 2%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일 드 프랑스(주황색으로 표시된 지역).
일 드 프랑스(주황색으로 표시된 지역).위키피디아 공공자료실
이외에도 세입자는 보증인을 세워야 하고, 보증인의 수입이 변변치 않을 경우엔 다시 은행 보증을 세워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가 남아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소득이 없는 학생, 특히 보증을 서 줄 부모가 프랑스에 없는 외국인 학생들이 방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힘들게 셋집을 얻었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해마다 물가상승률만큼 오르는 월세 부담은 서민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요인이다. 월세가 가장 비싼 파리와 일 드 프랑스에 사는 이들 중에는 소득의 50%가 월세로 나가는 경우도 허다하고 일부는 소득의 75%를 월세로 내기도 한다.

서민의 출구, 사회임대건물(HLM)

이러한 서민의 숨통을 틔워주는 게 있다. 사회 임대 건물(HLM, Habitation a Loyer Moderee)이 그것이다. HLM은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시골 농부들이 도시로 대거 몰려오자 프랑스 정부에서 마련한 저렴한 월세 주거지다.

HLM은 세입자의 소득 수준에 따라 세 종류로 나뉜다. 연소득 2만1120유로(3336만9600원) 이하의 세입자 부부를 위한 PLAI(주거 도우미 집세 융자), 주택 보조금 혜택을 전혀 받으면서 연소득이 3만5200유로(5561만6000원) 이하인 세입자들을 위한 PLUS(사회적 용도를 위한 집세 융자), 연소득 4만5760유로(7230만800원) 이하의 세입자를 위한 PLS(사회적 집세 융자)가 그것이다.

HLM은 집세가 싼 편이다. HLM 운영은 사설 기관에서 맡지만, 국가와 지자체에서 경비를 지원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2004년초 내가 세들어 있던 일반 아파트(면적은 56㎡)의 집세는 월 920유로(145만3600원)이었는데, 당시 HLM 운영 기관에서 제시한 아파트(예전에 입주 신청을 한 상태였다)는 거의 같은 면적의 신형 아파트로 주차장까지 딸려 있었음에도 집세는 월 620유로(97만9600원)이었다. 이사한 지 얼마 안된 터라 HLM으로 다시 이사하지는 않았지만, 이사했다면 집세의 3분의 1을 절약할 수 있던 상황이었다.

HLM에서 사는 세입자들은 원할 때까지 거주할 수 있다. 세입자의 월급이 인상돼 입주 당시의 자격 요건에서 벗어나더라도 연대세로 불리는 약간의 초과세만 내면 계속 머물 수 있다.

그동안 프랑스 정부는 이 HLM 확충을 위해 노력했다. 프랑스 정부는 2000년부터 인구가 5만이 넘는 곳에서는 주거의 20%를 HLM으로 확보하라는 SRU법을 적용하고 있다. 일 드 프랑스의 예를 들면, 이 법의 적용 대상은 181개 도시인데 이 중 102군데에서 HLM을 신축하고 있고 전체 도시의 3분의 1은 목표의 50% 이상을 달성한 상태다.

그러나 HLM 확보 실적이 0%인 도시도 전체의 21%나 된다. 주로 부유층이 몰려 사는 도시가 이에 해당하는데, 프랑스 정부는 2002년 1월부터 이러한 도시들에 일종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여러 사회 계층이 공존할 수 있는 정책 개발을 장려한다는 취지다.

프랑스 정부의 이러한 노력으로 2004~2007년 사이에 16만5천 채의 HLM이 신축됐다. 올해에도 지역위원회에서 HLM 신축 및 수리를 위해 1억6500만 유로의 예산을 책정했다.

 프랑스 중동부의 소도시 돌(Dole)의 시내에 있는 HLM 건물. 파스퇴르의 생가 바로 옆에 위치한 이 건물은 17세기 무렵 지어진 역사적인 건축물로 파스퇴르의 생부가 피혁 제조 가게를 운영하던 곳이었다.
프랑스 중동부의 소도시 돌(Dole)의 시내에 있는 HLM 건물. 파스퇴르의 생가 바로 옆에 위치한 이 건물은 17세기 무렵 지어진 역사적인 건축물로 파스퇴르의 생부가 피혁 제조 가게를 운영하던 곳이었다.한경미

HLM 입주의 '좁은 문'... 보통 몇 년 기다려야

그러나 HLM에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 입주하면 원할 때까지 계속 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기자가 많기 때문이다. 일 드 프랑스만 해도 현재 300만 명이 HLM에 입주해 있는데(일 드 프랑스 인구 중 23%는 HLM 입주, 25%는 비HLM 월세, 46%는 자기 집 소유, 나머지는 방세를 내지 않고 얹혀사는 경우다), 새 신청자가 37만4천 명(40%는 독거인, 21%는 자녀와 함께 사는 한부모)에 달한다.

신청자가 많기 때문에 HLM을 배정받으려면 3~5년은 기다려야 하는 게 보통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10년 이상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물론 선거를 앞둔 시기에는 HLM 입주 속도가 빨라져 대기 시간이 줄어들기도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며 그런 경우에도 주로 공무원이 수혜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본래 취지와 달리 일각에서 HLM을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도 문제다. 자식이 성년이 돼 독립한 이후에도 방이 3~4개 있는 대형 아파트에 부모(혹은 부모 중 홀로 남은 사람)만 남아서 거주하는 경우 중, 남은 방에 2중으로 세를 놓고 집세를 챙기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입주 비리도 비판의 도마에 오르곤 한다. 저소득층을 위한 건물임에도 부유한 정치인들이 입주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대표적인 사례가 내무부 장관,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한 장-피에르 슈벤느망이다.

일간 <리베라시옹>은 지난해 12월 21일, 슈벤느망이 파리 중심가인 5구에 위치한 HLM에 입주해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시장으로 일했던 벨포(프랑스 동쪽 지역)의 HLM에도 1988년부터 입주, 주말 별장으로 쓰고 있다고 보도했다. 갑부인 슈벤느망이 2개의 HLM 입주권을 갖고 있는 것은 이 건물 용도에 어긋난다며 비판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러나 문제는 슈벤느망만 그러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많은 정치인들도 파리 중심가에 위치한 HLM에 입주해 있으며, 그 결과 정작 이 건물에 입주해야 할 서민들의 입주가 제한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도마에 오른 HLM... 하루에 15유로로 집주인이 될 수 있게 한다?

프랑스 정부는 이러한 HLM 운영 방식을 개정하려 하고 있다. 크리스틴 부텡 주택장관은 7월 28일 장관회의에서 주거 실현 방책에 관한 법 초안을 발표했는데, 주요 내용은 HLM 주택에 관련 규정 변경이다. 이 초안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세입자의 수입이 입주 조건 금액의 2배를 넘어설 경우 계약서를 새로 작성하고, 그 후 3년이 지나면 HLM을 떠나게 한다.
▲ 자식을 독립시킨 부부에게는 더 작은 규모의 아파트를 배정해 준다. 이 제안을 거절할 경우 세입자는 HLM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세입자가 70세 이상의 노인이거나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 그리고 장애인 자녀를 돌보는 부모에게는 현행과 마찬가지로 기존 주택에 계속 거주할 수 있게 한다.)
▲ 하루에 15유로(2만3700원)로 집주인이 될 수 있게 한다. 즉 25년 동안 하루에 15유로, 즉 한 달에 450유로(71만1000원)의 집값을 내고, 이후 15년 동안에는 매달 땅값을 내는 방법으로 집의 소유주가 될 수 있게 한다.

한 번 입주하면 나오지 않는 HLM의 세입자 관련 규정을 강화해 새 입주자를 더 많이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이번 초안의 취지라는 것이 프랑스 정부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번 가을에 의회에서 논의될 예정인 이 초안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USH(주거를 위한 사회 결합)의 들라바르 회장은 "(이 초안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초안에서는 소득 제한 한도의 2배를 넘어서는 이들만 추방한다고 규정돼 있지만, 나중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 그 기준을 훨씬 낮게 다시 조정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세입자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하루에 15유로면 집주인이 될 수 있게 해주겠다'는 항목도 비판받고 있다. 40년이란 긴 시간 동안 집세를 내야 한다는 이 방안이 실현가능성이 있겠느냐는 지적이다.

부유층의 대통령, 사르코지

다시 말하지만, 프랑스 서민들의 주택난은 현재진행형이다. 사르코지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여 밖에 안 된 만큼 모든 것을 사르코지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그간의 정책 기조로 볼 때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서민을 위한 정책을 부르짖던 사르코지가 집권 후 주력한 분야는 고소득층에게 혜택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소득자들이 높은 세금을 내야 하는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에 정착하는 일이 늘어나자, 사르코지 정부는 이들에게 제대로 세금을 걷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대신 '국가의 손실'이라며 이들의 세금 최고 한도를 60%에서 50%로 낮췄다. '세무 보호'라는 명목으로 올해 1월부터 시행된 이 정책으로 인해, 예전에 스위스로 이주했던 유명 가수 조니 홀리데이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사르코지의 실체는 부유층의 대통령인 것 같다. 이런 모습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서 전쟁 담당 장관이 '사랑의 장관'으로 불린 것과 뭐가 다른 것일까?

 프랑스 Kerbernier 지역의 HLM 단지.
프랑스 Kerbernier 지역의 HLM 단지.위키피디아 공공자료실
#사회임대건물 #HLM #사르코지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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