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을 하면 헌책방이 함께 사라진다

[헌책방 나들이 171] 서울 북가좌1동 '연남서점'

등록 2008.08.08 16:04수정 2008.08.1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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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앞 책방 앞에서 사진을 찍는데, 동네 꼬마가 부지런히 달려갑니다. ⓒ 최종규

▲ 책방 앞 책방 앞에서 사진을 찍는데, 동네 꼬마가 부지런히 달려갑니다. ⓒ 최종규

 

(1) 땡볕, 한숨, 눈물

 

옆지기와 함께 나들이를 하기가 나날이 어려워집니다. 배속 아기가 하루하루 크면서 옆지기는 몸이 무거워지고, 몸이 무거워지면서 온몸이 쑤시고 힘듭니다. 함께 다니며 함께 느끼고 함께 즐기고 함께 살아가는 흐름이 조금 어긋납니다. 생각해 보면, 이제는 헌책방 나들이를 줄이고 집에서 조용히 머무르며 몸을 간수해야 할 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 밥벌이를 하고, 헌책방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며, 헌책방 이야기를 글로 써서 잡지를 묶어내자면, 지아비 된 사람은 혼자서라도 헌책방 나들이를 할밖에 없습니다.

 

오늘까지 열이틀 꼼짝없이 집에만 머물며 지내다가, 아무리 바빠도 한 번 휙 돌고 돌아와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일찌감치 가방과 사진기를 챙기고 자전거를 전철에 태우고 서울로 떠납니다.

 

용산까지 가는 전철을 탑니다. 가는 동안 책 한 권 읽습니다. 시원했던 전철에서 내리니 금세 땀이 흐릅니다. 만만치 않은 날씨로군, 하고 속으로 헤아리면서 자전거를 달립니다. 오늘은 여러 해 동안 못 찾아가고 있던 헌책방으로 갈 참. 머리속으로는 너덧 군데쯤 후다닥 돌아보려 하는데, 뜻대로 될지 안 될지는 모를 일. 아무튼, 가는 데까지 가 보고, 둘러보는 데까지 둘러보아야지.

 

먼저, 삼각지역에서 왼쪽으로 꺾어 고가도로를 넘고 만리재에 닿아, 공덕동 <굴다리 헌책방>으로. 이곳 공덕동에 올라선 ㄹ아파트에 사는 후배한테 이야기를 들으니, <굴다리 헌책방>이 깃든 건물을 헐어내려 한다면서, 이 헌책방이 문을 닫은 듯하다고 했습니다. 설마, 그럴까, 하는 마음으로 헌책방 자리 앞에 섭니다. 후배 이야기마따나 <굴다리 헌책방>은 자취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책방을 어디로 옮긴다는 알림판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닫아 버리고 마셨나?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칩니다. 잠깐 바닥에 쪼그리고 앉습니다. 조그마한 헌책방 안쪽에서 홀로 북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책도 읽으면서 늘그막을 보내시던 헌책방 할배를 떠올립니다. 참말 헌책방 일은 접으셨을까. 이제는 연락이 닿을 길이 없을까. 할배가 온삶을 바쳐서 꾸려 오던 헌책방 일은, 이렇게 재개발 하나로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해도 좋은가.

 

쓴 침을 삼키고 자전거에 오릅니다. 힘이 빠진 다리로 어렵게 페달질을 합니다. 서강대학교 앞을 지납니다. 이태쯤 반짝하듯 서강대학교 앞에 <서강서점>이라는 헌책방이 둥지를 튼 적 있습니다. 이곳 <서강서점>은 서강대학교 앞문에서 잘 보이는 자리에 문을 열고 있었는데, 다른 '대학교 앞 헌책방'과 마찬가지로, 대학생 손님은 드물었습니다. 그리고, 교재 찾는 발길이 더 많았고요. 지난날, <서강서점>이 어디쯤 있었는가만 눈으로 점을 찍고 지나갑니다.

 

신촌나들목 앞에 멈춥니다. 오토바이 한 대가 자전거 앞으로 나옵니다. '기분 나쁜 녀석. 오토바이가 자전거 앞에 서면, 그 배기가스를 옴팡 뒤집어씌우려고?' 자전거를 굴려 오토바이 오른쪽 앞으로 빠져나옵니다.

 

신호를 받고 연세대학교 쪽으로 접어듭니다. 차가 빼곡히 막힌 길 사이사이를 누빕니다. 연세대학교 앞에서 꺾습니다. 연세대 정문 건너편 <정은서점> 열린 모습을 보며 사진 한 장. 다시 자전거를 달려 '한 해를 미처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만' 헌책방 <연세헌책방> 있던 터 건너편에 멈춥니다. 은행일을 접고 뜻을 품으며 해 보려던 헌책방 일이었다고 했는데. 돈 많이 버는 은행 일보다, 사람들한테 좋은 책 하나 건져올려서 선사할 수 있는 헌책방 일이 당신한테는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이라고 느낀다면서 꿋꿋하게 책방 살림을 꾸리려고 하셨는데. 그예 한 해조차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마시다니.

 

몇 초쯤 고개를 숙여 비손을 올린 다음,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습니다. 연남동으로 접어들지 않고, 고가도로를 타고 모래내로 넘어갑니다. 자동차만 다니기 좋으라고 뚫어 놓은 찻길을 자전거로 달리자니 꽤 아슬아슬합니다. 그렇지만, 이 잘 닦은 길은 자전거도 다녀야 할 뿐더러, 자전거가 더 많이 다니면서 우리 삶터와 공기를 좀더 좋게 추스를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남가좌동으로 접어듭니다. 현대아파트가 보일 즈음, 왼쪽으로 꺾어, 두찻길로 된 호젓한 안쪽 동네로 접어듭니다. 문방구 간판이 큼직한 샛골목 모퉁이에 섭니다. 어, 그런데. 남가좌동에 자리하고 있어야 할 <문화서점>이 간판만 덩그러니 남고, 책방 안쪽은 책꽂이며 책이며 싹 털렸(?)습니다. 쓰레기만 나뒹굽니다. 뭐지? 왜지?

 

유리문에 적힌 전화번호를 누릅니다. 아주머니가 받습니다.

 

"네, 저희 이제 장사 안 해요. 한 달쯤 됐습니다."

 

한 달. 한 달이라. 한 달 앞서 닫았네. <굴다리 헌책방> 앞에서 고개 숙이며 쭈그려앉으면서도 다시 일어서며 예까지 달려왔는데, 그만 팔이며 다리며 힘이 다 빠져나갑니다. 쓰레기 나뒹구는 '헌책방 터' 앞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땡볕이 뜨거운 한낮, 사람들은 아무 일 없이 오가고, 아이들은 자전거와 인라인을 타며 웃고 떠들며 지나갑니다. 이 가운데, 흰 자전거 길에 세워 놓고 큰 가방은 '무너진 가게' 앞에 기대어 놓은, 수염 텁수룩한 사내 하나 온몸이 땀으로 젖어 짙은 냄새 풀풀 풍기면서 눈물 두 줄기 흘립니다. 앞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내어, 빈 자국만 남은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데, 손이 떨려서 다시 털썩 주저앉아서 쉬었다가, 다시 일어났다가를 되풀이합니다.

 

남가좌동 <문화서점> 아저씨는 헌책방 일을 몇 해쯤 하셨을까. 서른 해 안팎? 서른 해 남짓? 자기 삶에서 가장 긴 세월을 땀흘리고 바쳤던 헌책방 일이었을 텐데, 이 일을 어떻게 그리 빨리 접을 수 있었을까. 모르지, 아저씨는 일찌감치 이제 안 되겠다고 그만둘 마음이었는지도. 그 마음을 못 읽은 내가 바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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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들어서는 문 나무로 되어 있고, 왼쪽으로 미는 문. ⓒ 최종규

▲ 책방 들어서는 문 나무로 되어 있고, 왼쪽으로 미는 문. ⓒ 최종규

 

(2) 어렵사리 책 구경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뺨을 두 손으로 찰싹찰싹 때리고, 목덜미를 풀고 다리 운동을 합니다. 자전거에 올라탑니다. 언덕골목을 낑낑 올라갑니다. 이번에 갈 헌책방은 부디…… 하는 마음으로 북가좌동으로 넘어갑니다. 옛 북가좌1동사무소 둘레에 있는 <연남서점>으로. 마지막으로 찾아간 때가 2004년 8월 29일. 어느덧 네 해나 훌쩍 넘기도록 찾아가 보지 못한 그곳. 아저씨는 다부지게 책방을 이어나가고 있으실까.

 

남가좌동에서 북가좌동으로 넘어가는 길, 오가는 차는 많지 않고, 길가에 늘어선 가게들 가운데에는 빈 곳이 많습니다. 유리문에 '가게 내놓음'을 밝힌 곳도 퍽 많고, 무언가 대단히 뒤숭숭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달립니다.

 

끼긱. <연남서점> 건너편에 멈춥니다. 책방 간판은 그대로입니다. 책방 앞에 내놓고 있는 책 매무새도 그대로입니다. 책방 자전거도 얌전히 있습니다. 이야, <연남서점> 아저씨는 잘 계시는구나. 아니, 꿋꿋하게 이곳에서 터줏가게로 뿌리내리고 있으시는구나.

 

50미터쯤 앞에 있는 건널목을 건넌 다음, <연남서점> 앞에 섭니다. 자전거 앞바퀴를 뗍니다. 문을 왼쪽으로 밉니다. 스르르, 부드러운 느낌. 수십 해 닳고 닳은 나무문은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한테 '뭐 하느라 바빠서 이제야 다시 오남?'하는 나무람이 아니라 '그려, 자네도 그동안 쉽지 않은 삶이었지? 이제라도 다시 올 수 있으니 반갑구만!'하는 노래 한 자락 들려줍니다.

 

사장님한테 꾸벅 인사를 하고 가방을 내려놓습니다. 사진은 찍지 않습니다. 여러 해 만에 왔으니, 책 구경을 모두 끝마친 다음 다시 허락을 받고 나서 찍을 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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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수스 그림책 미국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는 그림책 <닥터 수스>. 헌책방에서 곧잘 만나는데, 제가 보아도 참 재미있게 잘 그렸습니다. ⓒ 최종규

▲ 닥터 수스 그림책 미국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는 그림책 <닥터 수스>. 헌책방에서 곧잘 만나는데, 제가 보아도 참 재미있게 잘 그렸습니다. ⓒ 최종규

차근차근 둘러봅니다. 얇은 어린이책 하나 집어서 부채를 삼습니다. 그림책 <Dr.Seuss-How the Grinich stole Christmas!>(Random House,1957 첫/1985 다시)가 보입니다.

 

오호, '닥터 수스' 그림책! '그리니치는 예수님나신날을 어떻게 훔쳤나!'하는 책. 네 녀석이 어쩜 여기 이 책시렁에 놓여 있게 되었을까. 너를 처음 집어든 사람은 누구였을까. 1985년에 찍은 너를, 누가 알아보고 처음 집어들었으며, 이제 너는 어떤 길을 거쳐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

 

<캐테 콜비츠와 노신>(정하은 엮음, 열화당,1986)을 봅니다. 둘레에 선물해 줄 사람이 있어서 고릅니다. <나의 산에서>(진 C.조지/김원구 옮김, 비룡소,1995)라는 어린이책을 봅니다. 2004년에 31쇄를 찍었다고 하는군요. 어마어마하게 팔렸네, 싶으면서도 책을 넘기니 곳곳에 오탈자가 보입니다. 뭐여, 31쇄를 찍는 동안 오탈자 바로잡기도 제대로 안 했나?

 

.. 국민학교에 다닐 때, 나는 여행가방을 싸 놓고 어머니께 집을 나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내가 마음속에 그린 생활은, 숲속의 폭포 가까이에 살면서 아버지께 배운 대로 나뭇가지로 낚싯바늘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는 것이었다. 또 야생화와 나무 사이를 걷거나,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고, 구름과 바람을 살펴서 날씨를 예측하고, 아무 걱정 없이 자유롭게 산허리를 활보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지혜롭게도 나를 말리지 않으셨다. 어머니 자신도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칫솔과 엽서를 가지고 가는지 확인하시고 나서, 잘 다녀오라고 하시며 내게 입을 맞추셨다. 40분 뒤에 나는 다시 집에 돌아왔다 ..  (13쪽)

 

<나의 산에서>는 실제 이야기가 아닌, 꿈으로 꾼 이야기입니다. 글쓴이가 '부모님 집에서 나와서 혼자 산에서 여러 해 동안 살면서 겪었을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책을 죽 읽는 동안, 미국 아이들한테는 꽤 재미있을지 모르겠지만, 한국땅 아이들한테는 환경이나 문화가 많이 어긋나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도 이만한 이야기책이라면 번역할 값은 있다고 느낍니다. 다만, 이만한 눈높이면, 우리 나름대로 얼마든지 창작할 수도 있을 텐데.

 

<행복한 걷기여행>(박미경·김영록, 터치아트, 2008)이라는 책이 보입니다.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책. 헌책방 나들이를 하는 선물입니다.

 

.. 남산이 사람 곁으로 더 가까워졌다. 2005년 5월부터 남산순환도로의 차량 통행을 제한하기 시작한 덕분이다. 자동차 매연이 줄어든 자리는 청량한 공기가 대신하고, 차량 소음이 빠져나간 자리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원래 걷기 좋던 길이 더 좋아졌다 … 한나절 걷기여행의 끝에 이들 한옥 가운데 어느 한 집에 들어가 시원한 마루에 잠깐 걸터앉았다 가도 좋으련만, 집집마다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있는 것을 보니, 앉아서 쉴 곳은 아닌가 보다. 아예 접근을 막는 것보다는 "신발을 벗고 올라가세요" 정도로 개방하면 좋겠는데, 문화유산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가 그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  (22, 24쪽)

 

걷기여행이란, 여행으로서만 걷는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즐기는 헌책방 나들이도 '헌책방에서 책 사기'로 고치는 일이 아닙니다. 책 하나에 담긴 땀방울과 발자취와 손때까지 함께 느끼고 받아들이는 일인 한편, 헌책방이 깃든 마을과 사회와 삶터 모두 온몸으로 부대끼는 일이 헌책방 나들이입니다. 걷기여행이라고 할 때에도, 우리 삶을 '걷기'에 맞추어서, 하나하나 추스르고 다잡고 거듭나야 한다고 봅니다. 구경꾼 여행자만이 아니라, 내 삶터에서 '걷기'라는 마음과 몸가짐이 어떻게 스며들 수 있는가를 곱씹고 되새기면서 깨닫게 해 주는 '걷기여행'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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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다리 차곡차곡 올라선 책탑. 한쪽에 놓여 있는 사다리 ⓒ 최종규

▲ 책과 사다리 차곡차곡 올라선 책탑. 한쪽에 놓여 있는 사다리 ⓒ 최종규

(3) 사라지는 마을

 

일본에서 1996년에 처음 나오고, 2002년에 학습지 부록으로 나온 <고래가 헤엄치다>(한솔교육, 2002)를 집어듭니다. 판권을 제대로 안 밝혀서, 사진 찍은 이 이름을 알기 어렵습니다.

 

<삼송, 사라지는 마을과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강희정·김선주·김한담, 높빛, 2007)이라는 큼직한 책을 집어듭니다. '삼송'이라는 땅이름이 낯설지 않습니다. 어디쯤인가 하고 헤아립니다. 거기, 서울과 고양을 잇는 사이, 그곳에 있는 삼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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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사라지는 마을을 이야기하는 책 하나 ⓒ 높빛

▲ 겉그림 사라지는 마을을 이야기하는 책 하나 ⓒ 높빛

.. 토지 개발공사에서 추진하는 삼송 신도시 건설 지역의 기존 마을 주민들은 현재 기존 가옥의 철거를 앞두고 속속 집을 비우고 떠나고 있다. 신문지상에서 여기저기 신도시 건설 소식을 듣게 되지만, 그때마다 남의 일로 스쳐 지나치기 일쑤이다. 그런데 고향으로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을 비우고 떠나 폐가로 변한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니 한꺼번에 휩쓸려 가는 재난 앞에 선 느낌이 들었다. 와 보지 않으면 세간의 소식을 접하는 것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관심이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퍽 야속한 기분을 갖게 되는 것이다 ..  (11쪽)

 

아파트에 산다고 할 때 아파트가 고향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여러모로 생각해 봅니다. 아파트도 틀림없이 고향입니다. 그러나, 예전 모습은 하나도 없는 고향입니다. 재개발을 해서 다시 지은 아파트에 돌아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예전 이웃은 떠나고, 예전 삶터도 모두 바뀌는 아파트입니다.

 

이런 집이나 동네도 고향이라고 이름 붙이겠다면 붙일 수 있을 테지만, 그리움 묻어난 곳을 찾아볼 수 없는데, 이와 같은 고향 아닌 고향이 얼마나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시거나 어루만져 줄 수 있는지요. 가슴 촉촉함 없이, 가슴 푸근함 없이, 가슴 미어짐 없이, 가슴 넉넉함 없이 읊는 고향이란 얼마나 사무친 이름이 될 수 있는가요.

 

.. "손주 애들두 다 착하구 나한테 잘해. 내가 외출할 때면 차도 태워 주구, 내가 자는 방에 들어와 자기두 하구……. 늙은이 냄새난다구 타박 안 하구 잘 따러. 애들이 늦으니까 내가 저녁상을 보거든. 그럼 이 늙은이가 해 준 걸 된장찌개구 뭐구 다 맛있다구 잘 먹어. 근데 이게 뭔 일인가 몰라. 이 집에서 죽어 영감 곁으로 갈 줄 알았는데……. 요즘은 사촌들도 다 이사가구 낮에는 동네에 사람이 없어. 저녁 때 애들이 집에 와야 사람 사는 거 같어. 우리두 10월에 시제 지내구 이사 가야지……." ..  (36쪽)

 

아파트가 고향인 사람들한테도, '낮에는 동네에 사람이 없'습니다. 아파트마다 틀어박혀 있는지 모르지만, 아파트 밖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아파트라는 곳은, 사람들이 집안에만 틀어박히도록 하는 얼거리이지, 아파트 바깥으로 나와서 어울리거나 부대끼도록 하는 얼거리가 아닙니다.

 

높은 층 집에서 멀리멀리 내다보면서 포도술 한 잔 홀짝거리는 아파트는 될지라도, 국수 한 통 말아서 서로 나누어 먹으면서 웃고 떠들 수 있는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집안에 갖은 꽃그릇을 갖추어 놓을는지 모르나, 그저 혼자 보고 즐기는 꽃일 뿐, 이웃사람하고 꽃내음이라도 함께 나누는 일이란 없습니다. 무엇이든 혼자입니다. 즐거움도 혼자이고, 괴로움도 혼자입니다. 웃음도 혼자이고 눈물도 혼자입니다.

 

.. 모든 게 익숙하고 편안한 분위기다. 마을버스는 단순히 승객을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민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요즘 보상이 적어 속상하다, 올해는 야채농사 재미가 좋다는 등의 주민들의 속내를 이씨는 들어 주고 있다. 마을버스 일을 시작한 지 이제 채 2년이 안 됐지만, 이중환 씨는 마치 마을에 오래 산 사람처럼 마을 사정에 훤했다 ..  (202쪽)

 

그러나 어찌할 길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마을을 내쫓았으니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돈이 더 좋다고, 돈벌 대학교 졸업장이 더 좋다고,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는 이웃보다는 돈과 돈으로 얽히는 집굴리기(부동산)가 좋다고 했어요. 남이 버린 마을이 아니라 내가 버린 마을입니다. 남이 망가뜨린 마을이 아니라 내가 망가뜨린 마을입니다. 남이 재개발을 한다며 뒤엎는 마을이 아니라, 내가 싫다며 내동댕이치고 엉망으로 흐트려 버린 마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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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 책시렁 문간 책시렁에 놓인 책들. ⓒ 최종규

▲ 문간 책시렁 문간 책시렁에 놓인 책들. ⓒ 최종규

 

(4) 재개발과 헌책방

 

책값을 셈하고, 사진찍기 허락을 받은 다음 한참 사진을 찍습니다. 드문드문 아저씨한테 말씀을 여쭙고, 아저씨도 드문드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헌책방이 깃든 건물이며 둘레 모두) 11월에 헐릴 것 같아요. (재개발 때문에) 자리를 옮겨야 하는 가게가 한꺼번에 몇 백 개가 나타나니까, 권리금으로 이삼천만 원씩 달라고 하는데, 권리금이다 이사 비용이다 하면, 헌책방 닫아야지요. …… 고물상 파지값이 네 배 다섯 배씩 올라서, (헌책 모아서 가지고 오시는 중간상인들한테) 소설책 하나 500원 줘도 반가워하지 않더라구요. 그런데 우리는 소설책 한 권에 500원을 쳐 줘도 우리가 수지가 맞지 않는데요."

 

헌책방 <연남서점> 아저씨가 샛장수한테 소설책 한 권을 500원에 산다고 하면, 이 소설책 하나는 2000원에 팝니다. 언뜻 보면 1500원을 남겨먹는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만, 이 가운데 가게세와 전기세와 여러 세금으로 500원이 빠져나가고, 500원은 당신 일삯이며 집살림 하는 데 써야 합니다. 남은 500원 가운데 300원은 새로운 헌책을 사들이는 데에 써야 하고, 200원은 '안 팔려서 버려야 하는 책' 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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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이 문닫으면, 버려지는 책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이제 책은, '한 번 읽히고 사라져도 그만'인 물건, 1회용품이 되어야 하나요. ⓒ 최종규

헌책방이 문닫으면, 버려지는 책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이제 책은, '한 번 읽히고 사라져도 그만'인 물건, 1회용품이 되어야 하나요. ⓒ 최종규

어림셈으로 따지면 이렇지만, 요즈음 책 팔림새를 생각한다면, 소설책 하나 500원에 사서 2000원에 팔아도, 헌책방 일꾼이 당신 일삯으로 500원을 가져가기도 수월하지 않습니다. 가게세와 온갖 세금으로 꼬박꼬박 500원이 나가지만, 안 팔려서 쌓이거나 버려야 하는 책은 자꾸 늘어서, 이 값만 해도 500원을 넘보려고 합니다.

 

"어려우셔도 이 좋은 헌책방을 지켜 주시면 고마울 텐데, 형편을 뻔히 아는데, 지켜 달라고 말씀드리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문을 닫게 되시면 섭섭하고 안타깝고 ……."

 

11월 재개발. 그때까지 다시 찾아오겠다는 다짐을 남기고 책방 문을 나섭니다. 적어도 10월에는, 또는 9월에는 다시 올 수 있어야 할 텐데, 찍은 사진도 찾고 짬 한 번 내어 한 번 더 인사를 드릴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길에서 자꾸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서울 북가좌1동 〈연남서점〉 : 옛 북가좌1동사무소 둘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2008.08.08 16:04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 서울 북가좌1동 〈연남서점〉 : 옛 북가좌1동사무소 둘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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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연남서점 #북가좌동 #재개발 #책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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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이 기사는 연재 최종규의 '책과 헌책방과 삶'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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