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1977년에 나온 청소년문학 <별로 돌아간 소녀>를 읽습니다. 언제 나온 작품인지를 따지지 않으면, 또 어느 나라에서 나온 작품인지를 따지지 않으면, 그리고 나오는이 이름을 한국사람으로 바꾸면, 오늘날 한국땅 아이와 어버이 모습하고 그다지 다를 대목이 없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꼭 오늘날 우리 모습이 눈으로 그려지듯 나오는 이 청소년문학은, 지난날 일본에서 어떤 뜻이 있었을까 하고. 처음 일본에서 나온 뒤로 서른 해가 지난 다음 한국에서 옮겨내어도 그다지 ‘시간 흐름’을 느낄 수 없는 가운데, 오늘날 ‘한 부모 집안’에서 부대끼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잘 드러나는 이 이야기는, 일본과 한국 두 나라가 어떤 나라임을 보여주는가 하고.
.. “생일 축하해.” 엄마는 노래처럼 가락을 붙여 말했다. 마미코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자, 초에 불 켜고 얼른 초밥 먹자. 배고프지?” 엄마는 얼른 의자에 앉았다. 보아하니 배가 고픈 건 엄마 같았다 … 마미코는 오리처럼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리고 떨떠름하게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가서 코트를 입어 보았다. 그 코트는 벨벳 소재여서 촉감은 좋았지만 완전히 구닥다리였다 … ‘난 엄마의 추억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아. 멋진 새 코트가 갖고 싶을 뿐이야.’ 마미코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대신 두 눈에 뜨거운 게 왈칵 하고 복받쳐 올랐다 .. (13, 19쪽)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어 동무들보다 ‘더 나온 시험점수’를 받도록 하는 데에 마음을 쏟는 우리네 어머니요 아버지입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동무들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지는 살피지 않는 오늘날 우리네 어머니요 아버지입니다. 동무들하고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제 아이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제 아이와 또래 아이들은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겪고 보고 마음으로 껴안는지를 거의 모르는 요즈음 우리네 어머니요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어버이만 그러하겠습니까. 해가 갈수록 담임 교사가 맡는 아이들 숫자는 줄어들고 있는데, 정작 담임 교사는 자기가 맡은 아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학교에 오고, 아이들 집안 형편은 어떠하며, 이웃과 동무하고 어찌 지내는가를 읽어내지 못합니다. 또는 눈길을 안 둡니다. 교사도 부모도 한결같이 아이들 시험성적에 마음을 두지, 아이들 마음이 어떻게 자라고 아이들 얼이 어떻게 뿌리내리는가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해야 할 숙제에는 마음을 바쳐도, 아이들이 느끼거나 누려야 할 삶터가 어떤 모습으로 달라지고 있는지에는 마음을 바치지 않습니다.
.. 그러나 이번에는 아빠가 될 사람에게도 선물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선물을 해야 하지? 아이, 귀찮아. 차라리 엄마에게도 주지 말까? 엄마와 둘이서만 지낸 날들 ……. 크리스마스, 새해, 생일 파티, 쓸쓸했지만 행복했던 날들은 이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마미코는 불쑥 한숨이 나왔다 .. (78쪽)
누가 보아도 한 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식구이지만, 아이는 어머니 삶을 모릅니다. 틀림없이 한 학교에서 한 교실을 쓰며 함께 배우는 사이이지만, 아이는 교사 삶을 모릅니다. 어머니도 아이 삶을 모르고 교사도 아이 삶을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발딛고 있는 세상 흐름은, 교사와 학생 사이를 갈라 놓는구나 싶고, 부모와 아이 사이도 갈라 놓는구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갈라 놓기 앞서, 우리 스스로 갈라 놓음에 길들고 있지 않나 싶어요. 자기 삶이 아닌 유행을 따르고, 자기 꿈이 아닌 돈벌이에 끄달리며, 한 식구로 살아가는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 줄 잊습니다. 아이한테 어머니가 남이 되도록 어머니 스스로 아이 앞에서 남이 되어 갑니다.
.. “……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고 여태껏 엄마가 입원해 있다고 생각하다니, 그때의 분한 마음은 지금도 참을 수가 없어. 알 수 있겠니?” “응.” “그런데도 믿고 싶지 않았어. 그걸 믿을 수 있겠어? 엄마가 나를 속이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는걸…….” .. (96쪽)
(2) 아이는 남
제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1982년부터 1987년까지, 날이면 날마다 동무들하고 수없이 많은 놀이를 하면서 보냈습니다. 그때 쪽지시험이니 월말시험이니 뭐니를 꽤 자주 치렀지만, 시험문제가 어떠했는지는 거의 하나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동무들하고 무슨 놀이를 얼마나 오래 많이 즐겼는가는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동무들하고 놀았던 일은 거의 떠오르지 않습니다. 기껏 농구나 축구, 또는 배구를 하고, 우유곽으로 골마루에서 제기놀이를 할 뿐입니다. 누군가 탁구공을 학교에 가져왔으면 책상을 붙여서 손바닥으로 공치기 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다른 동무들은 거의 안 했지만, 저는 옆짝하고 오목놀이를 천 판 넘게 했고, 쉬는 시간이나 보충수업 때면 으레 빙고놀이를 했습니다. 다섯×다섯 칸짜리는 시시하다며 열×열 칸짜리를 곧잘 했습니다.
.. 공원 앞 주차장에는 차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넘쳐나는 차들은 공원 앞 골목길에까지 주차해 있었다. 그런데도 차들은 끊임없이 이어져 들어왔다. 마미코는 차에서 내리는 가족들과 젊은 사람들을 곁눈질하면서 화를 냈다. “이러다간 공원 환경도 다 망치겠어!” “저 사람들도 마당 없는 집이나 아파트에서 도망왔을지 모르잖아.” 엄마가 말했다. “그 말도 맞아. 혹시 엄마가 운전할 수 있다면 차를 샀겠지? 그럼 오늘 같은 날도 차로 왔을 테고.” .. (68쪽)
오늘날 초등학교에서는 놀이가 없는 듯합니다. 아니, 없지요. 축구를 하거나 줄넘기를 해도, 어린이놀이는 없습니다. 고무줄을 넘을 줄 아는 아이가 없고, 술래잡기나 숨바꼭질이나 금긋기놀이는 거의 모릅니다. ‘전문 놀이강사’가 있고 ‘레포츠 강사’가 있어서, 아이들을 ‘놀게 한다’면서 부지런히 다니기는 하지만, 아이 스스로 어울려서 놀 줄을 모릅니다. 고작 자전거나 인라인을 타고 자동차 사이로 아슬아슬 다니면서 ‘논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들한테는 놀이를 물려줄 언니 형 오빠 누나가 없고, 놀이를 배워도 이어줄 동생 누이가 없습니다. 또래끼리도 어울리기 어렵고, 손위나 손아래가 함께 섞여서 나다니지 않습니다.
놀이를 배우지 못했으니 스스로 즐기지 못합니다. 놀이를 배우지 못했으니 누구한테도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놀이를 하면서 아이들 스스로 규칙을 세우고 지키는 버릇을 몸에 익혔으나, 놀이를 하지 않으니 스스로 자기 삶을 다스릴 규칙(도덕)을 세울 줄 모릅니다. 남들이 시키는 대로 따를 뿐입니다. 남들이 가자는 대로 갈 뿐입니다.
자기 생각을 키우지 못합니다. 자기 꿈을 피우지 못합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 사람 따라 할래’는 되지만, 자기 온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땀흘리는 맛을 모릅니다. 땀흘리는 맛을 모르면서 크니, 일하는 땀이나 노는 땀 또한 모릅니다. 일하는 땀을 모르니, 일과 일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손쉽게 돈만 굴리는 데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일하는 땀을 모를 때에는, 자기 스스로도 땀값을 모르지만, 다른 이가 흘리는 땀값 또한 모릅니다.
.. 학원은 이 순환도로 건너편에 있다. 도로 한가운데에는 철망이 쳐져 있어서 사람들이 가로질러 가지 못한다. 철망 밑에는 간격을 두고 샐비어꽃이 심어져 있었다. 이 추위와 배기가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샐비어는 색이 바랠 기미도 없이 진홍빛이다. 마미코는 이 샐비어꽃이 플라스틱 같다고 생각했다 … 마미코는 문득 자신이 벌써 몇 십 년이나 산 사람처럼 느껴져서, 버스 창가에 턱을 괸 채 멍하니 먼 하늘로 눈길을 주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알았나? 왠지 피곤하네…….’ 아무리 달려도, 너저분하게 쌓아올린 나무토막 같은 빌딩 거리였다 .. (56, 179쪽)
말은 장마이지만 장마라고 할 수 없는 날씨가 이어지고, 후덥지근한 무더위도 찜통 같은 무더위도 아닌, 사막나라 무더위가 나날이 이어집니다. 세상이 제자리를 잃으니 날씨도 제자리를 잃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 지구 자연을 무너뜨리거나 흔드니까 날씨가 무너지며 흔들립니다. 텔레비전 날씨 예보는 맞을 수 없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자동차는 줄어들지 않을 뿐더러, 자동차 배기가스를 걸러내려고 마음 쏟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들 돈씀씀이가 ‘이웃나눔’으로 엮이지 않고, 더 많은 소비재 쓰고 버리기로 치닫기 때문에, 공장은 끝없이 새 물건을 만드느라 자연 삶터는 자꾸만 망가뜨리고, 새 물건은 곧바로 쓰레기가 되어서, 쓰레기 묻거나 태우느라 또다시 자연 삶터를 망가뜨립니다.
끔찍한 굴레가 되풀이됩니다. 끔찍한 굴레는 갈수록 더 끔찍해집니다. 아이들은 이 굴레를 잘 모릅니다. 어른들부터 이 굴레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이 굴레를 모르기도 하지만, 얼추 알아도 숨깁니다. 또는 어영부영 지나칩니다. 자기들은 오래 못 사니 마음을 안 기울여도 될 일인지 모르나, 앞으로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살아갈 아이들한테 이처럼 무너지는 자연 삶터는 강 건너 불구경이 되면 어찌할는지요.
.. 마미코는 집을 나서자마자 버스와 전차를 갈아타고 도쿄역으로 갔다. 엄청나게 넓은 역 안에 사람들이 우글우글 많았다. 이윽고 마미코도 그 안의 한 점이 되었다. 바람처럼 큰 걸음으로 앞질러 가는 남자, 핸드백을 부딪치며 스쳐 간 여자 ……. 마미코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시선을 맞추려고 하는 사람조차 없다. 마미코는 신칸센 창구를 찾아 여기저기 헤맸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역이라는 곳은 왜 이렇게 쓸쓸할까?’ .. (165쪽)
<별로 돌아간 소녀>에 나오는 ‘마미코’는 넉넉하지 않은 집안살림이라고 하나, 못 누리는 일은 그다지 없는 여느 도시 아이입니다. 이 아이로서는 학교 성적 말고는 마음을 쏟을 만한 일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우리는 아이들한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보여주지 못합니다. 깨우쳐 주지 못합니다. 그저, 기계가 되도록 길들입니다. 시키는 일을 잘하는 심부름꾼이 되도록 채찍질입니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하니 아이는 아이답게 자라지 못하고, 아이가 아이답지 못하니, 이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될 무렵이면 어른다운 어른이 아닌 어설픈 어른이 됩니다. 어설픈 어른이 되고 나면 똑같이 어설픈 어른을 만나서 ‘아이답지 않은 아이’를 낳아, 자꾸만 똑같은 굴레가 되풀이되게 합니다.
.. 마미코와 친구들은 벌써 오래 전부터 술래잡기 같은 놀이는 하지 않았다 .. (83쪽)
아이가 술래잡기 같은 놀이를 할 수 있도록 키우지 못하는 어른은 어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부모도 아니요 교사도 아니요 이웃도 아닙니다. 아이를 바보로 만들고, 기계로 나뒹굴게 하는 독재자일 뿐입니다. 곡예단 조련사일 뿐입니다.
- 10쪽 그림 잘못됨 : 밥상과 걸상을 보면, 둘 모두 다리 길이가 같다. 걸상다리는 밥상다리보다 짧게, 거의 1/2로 그려야 한다. 실제로 보아도 그렇다. 책상과 걸상을 보면 두 다리가 얼마나 다른가.
- 104쪽 그림 잘못됨 : 1949년 일본 시골 기차역을 그렸는데, 안경에 패딩잠바를 입은 사람이 나온다. 이 사람 말고도 잘못된 그림이 여럿 보인다. 그림을 그린 이는 무얼 보고 그렸을까? 아니, 무슨 생각으로 그렸을까?
- 122쪽 : 마미코가 ‘돌 던지기’를 한다고 나오는데, 이 대목은 ‘물수제비’이다. 바다에 돌을 던지는 일하고, 바닷물 겉면을 스치듯 돌이 튕기게 하는 ‘물수제비’는 틀림없이 다르다.
- 170쪽 : 글흐름으로 보면 ‘1950년’이어야 할 텐데, ‘1954년’으로 나왔다. 어쩌면, 원본에서도 년도를 잘못 적었는지 모를 일이다.
- 무엇보다도 1977년 일본 작품인데, 이런 작품배경 이야기가 하나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을 어린 독자들은 읽으면서 어리둥절해 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출판사에 전화해서 이 대목을 여쭈었는데, 2쇄에서는 고치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아무쪼록, 잘못된 대목이나 아쉬운 대목을 고쳐서, 좋은 작품이 두루 읽히도록 마음을 기울여 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2008.08.13 20:59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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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돌아간 소녀
스에요시 아키코 지음, 이경옥 옮김, 문수지 그림,
사계절,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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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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