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PD들 "사과방송은 역사적 치욕... 낯부끄럽다"

시사교양국 PD 20여명, 엄기영 사장 앞에서 피켓시위

등록 2008.08.14 16:18수정 2008.08.14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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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시사교양국 PD들이 13일 경영진의 사과방송 강행을 규탄하는 항의 농성을 하고 있다. ⓒ 박유미

MBC 시사교양국 PD들이 13일 경영진의 사과방송 강행을 규탄하는 항의 농성을 하고 있다. ⓒ 박유미

MBC 시사교양국 PD들이 분노를 터뜨렸다. 14일 오전 11시 30분. MBC 경영센터 1층 로비에서 MBC 시사교양국 프로듀서 20여 명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사과방송 웬말이냐, 국민들이 분노한다"

"정권에 굴복한 경영진은 각오하라"

"공영방송 철학 없는 경영진은 사퇴하라"

 

PD들은 수첩을 접고 피켓을 들었다. 시사교양국 PD들이 치켜든 피켓과 외치는 구호에선 분노가 묻어났다.

 

11시 50분 엄기영 MBC 사장이 나타났다. 엄 사장을 본 PD들의 목소리가 사뭇 커졌다. "경영진은 사퇴하라!" 엄기영 사장은 미소를 띠었지만 입은 꾹 다문 채 뚜벅뚜벅 걸었다. 엄 사장은 서둘러 경영센터 정문 앞에 대기중인 차를 타고 사라졌다. 시사교양국 PD들의 외침만 MBC 경영센터 앞에 메아리쳤다.

 

MBC 관련 사과방송은 다른 프로를 만드는 시사교양국 PD들도 자극했다. <불만제로>의 강지웅 PD는 MBC 사과방송에 대해 "이건 말도 안 된다"며 "아무리 상황이 엄혹하더라도 언론사 수장으로 그래선 안 된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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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노조가 12일 MBC 사과방송에 강력 반발했다. ⓒ MBC노조

MBC 노조가 12일 MBC 사과방송에 강력 반발했다. ⓒ MBC노조

정부도 문제지만, 그걸 받아들인 경영진도 문제라는 것이다. 경영진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컸다.

 

"PD들이 그런 이야길 했다. 김중배(전 MBC) 사장 있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김중배 사장 같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김중배 사장이라면 사과방송은커녕 당연히 코웃음을 쳤을 거다. 사과방송이 아니라 아마 방송에 얼굴을 내밀고 정권을 통렬히 비판했을 것이다."

 

강지웅 PD는 또 "검찰 수사는 있었지만 경영진에 대한 압박은 없었다"며 "조중동 공세 하에 국민들이 잘못 알고 왜곡된 사실을 받아들일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뿐일까? 사과방송 여파는 어디까지 미칠까? 강지웅 PD는 딱 잘라 말했다.

 

"모든 프로가 위축된다. 시사 프로뿐만이 아니다. 예능 프로도 마찬가지다. <명랑 히어로> 같은 예능 프로는 시사 얘기를 많이 하는데, 지금 같은 때 어떤 프로가 민감한 내용을 얘기하겠나? 단지 PD가 양심의 자유와 가치관 따라 만드는 건데, 그게 봉쇄되니 어떤 건 만들면 안 되겠단 내부 검열이 들어간다."

 

[중견 PD] "사과 방송은 MBC 역사상 가장 치욕"

 

MBC 사과방송에 대해 MBC 시사교양국 중견 PD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 PD는 "<PD수첩>이 방송한 건, 방송할 만한 내용이었다"며, "MBC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시간이 12일 오후 5시"라고 딱 잘라 말했다. 12일 오후 5시. MBC 경영진은 MBC 확대간부회에서 사과방송을 추인했다.

 

이 중견 PD는 분노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87년 방송 민주화 이후 20년 역사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다. 20년 동안 이룩한 걸 한순간에 날렸다. MBC 경영진은 그럴 자격도 권리도 없다. 경영진에 대한 분노도 분노지만, 나아가 지금 정권이 너무 비열하고 악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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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 PD수첩>은 12일 밤 <뉴스데스크>가 끝난 뒤 사과 방송을 내보냈다. ⓒ MBC 화면 갈무리

MBC < PD수첩>은 12일 밤 <뉴스데스크>가 끝난 뒤 사과 방송을 내보냈다. ⓒ MBC 화면 갈무리

 

지금 <PD수첩> 사건은 사과 방송으로 끝난 게 아니다. 두 가지가 더 남았다. 법원의 '정정보도' 판결과 검찰 수사다. <PD수첩> 제작진을 강제 구인하고 MBC를 압수수색한단 이야기가 검찰 쪽에서 흘러나오는 중이다. 올림픽 방송을 보며 시간을 고르는 중이란 소리도 들린다.

 

그뿐 아니다. 법원 판결에 따라 MBC는 19일 또다시 정정 보도를 할 수도 있다. 항소냐, 정정보도냐, MBC는 기로에 서있다. MBC 노조원들도 벼르고 있다. 정정보도를 하면 제작 거부도 불사할 태세다.

 

시사교양국 중견 PD는 "그걸 오역했다고 사과 방송한 것도 난센스지만, 앞으로도 오역하면 사과 방송할 건가"라며 "감시 역할 하는 게 언론인데, 이제 시사 프로가 어떻게 나서서 이야기를 하겠느냐"고 비판했다.

 

실제 이런 징후는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일각에선 최근 시사프로엔 "자잘한 시사만 넘쳐난다"는 쓴소리도 들린다. 시사프로에서 정부 정책 비판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PD] "진짜 '언론인'될 수 있는 언론사라 생각했는데... 낯부끄럽다"

 

사과 방송에 대해 MBC 중견 PD들만 분노한 게 아니다. 젊은 PD들도 만만치 않았다.

 

지난 해 12월 MBC 입사해 현재 <PD수첩> 막내인 김정민(28) PD도 사과방송에 항의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김정민 PD는 "언론사란 타이틀은 많아도 제대로 '언론사' 기능을 하는 데는 별로 없는데, 그 드문 언론사 중 하나가 바로 MBC라 생각했다"며, "이번에 그런 기대가 깨진 듯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사과방송 내용도 문제지만 사과방송 절차가 황당했다. 구성원과 합의도 없고, 경영진이 유례 없이 자회사 통해 편법으로 사과방송을 내보냈다. 경영진이 뒤통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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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엄기영 MBC 사장은 확대간부회의에서 방송통신위원회 결정을 받아들여 사과방송을 밝혔다. ⓒ MBC

12일 엄기영 MBC 사장은 확대간부회의에서 방송통신위원회 결정을 받아들여 사과방송을 밝혔다. ⓒ MBC

 

실제 12일 밤 MBC에선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MBC 경영진은 12일 전격 사과 방송을 결정했다. MBC 노조원들은 놀랐다. 사과방송에 반대하며 주조정실과 송출실 앞을 지켰다. 사과방송 테이프의 반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경영진은 편법을 썼다. 자회사인 MBC플러스에서 주조정실로 사과방송을 송출했다.

 

김정민 PD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입사할 때만 해도, MBC 합격했다고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이유가 있었다. 친구들이 진짜 '언론인'이 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언론사라고 축하했다. 그런데 지금 그 친구들 보기에 낯부끄럽다."

 

<PD수첩> 사태가 MBC를 시험대에 세웠다.

2008.08.14 16:18 ⓒ 2008 OhmyNews
#MBC #PD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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