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영감코 영락없는 돼지코네"

'행복한 실버 도자기 전시회'와 자화상 만들기

등록 2008.08.22 15:03수정 2008.08.22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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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내 코 잘 생겼죠?" 구선회 할아버지와 도자기 강사 김지원씨.

"내 코 잘 생겼죠?" 구선회 할아버지와 도자기 강사 김지원씨. ⓒ 최진섭


"코부터 만들어 붙이세요."

도예가 김지원씨(47)가 강화군 불은면 능내촌의 경로당에 모인 할아버지·할머니 이십여 명에게 옹기토로 자화상 만드는 법을 알려줬다.

"꼭 코부터 붙여야 하나?"
"그래야 중심 잡기가 좋거든요."

올 초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경로당에 모여서 도자기 공예를 배운 늦깎이 학생들은 9월 26일 강화도 오마이스쿨에서 '행복한실버 도자기 전시회'를 연다. 그동안 강화 지역 경로당 스무 곳에서 4백여 명이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들을 만들어 왔고, 오늘은 마지막으로 능내촌 경로당에서 도자기 등과 함께 전시될 자화상을 만드는 날이다.

a "새까만 검은 눈의 아가씨!" 도자기 수업 중에 노래 "새까만 검은 눈의 아가씨"를 흥얼거리는 구동례씨. 혹시 젊은시절 애인이 즐겨 부르던 노래?

"새까만 검은 눈의 아가씨!" 도자기 수업 중에 노래 "새까만 검은 눈의 아가씨"를 흥얼거리는 구동례씨. 혹시 젊은시절 애인이 즐겨 부르던 노래? ⓒ 최진섭


"저 영감코는 영락없는 돼지코네."
"깔깔깔깔"
"내 코가 어때서, 이만하면 잘 생겼지."
"헌데 내 코가 어찌 생겼는지 잘 모르겠는 걸."
"거울 한 번씩 보고 만드세요."

코를 떼었다 붙였다, 귀를 주물딱주물딱 하며 자화상 만들기를 하던 구근서(82) 할아버지가 여유가 생겼는지 <태평가>로 분위기를 띄운다.

"인생 일장춘몽인데..."


"짜증은 내어서 무엇하나 성화는 부려서 무엇하나 인생 일장춘몽인데…."

여기저기서 흥겹게 후렴구를 따라 부른다.


"닐니리야 닐니리야 니나노 얼싸 좋다…"
"그런데 선생님 머리카락은 어떻게 만드나?"
"지렁이처럼 가늘게 만들어서 붙이면 돼요."
"꼽슬꼽슬한 파마머리는 만들기 힘들겠는걸."

이리 쓰다듬고 저리 쓰다듬으며 자화상을 만드는 손을 바라보니 평생을 농사지은 손이라 모두들 투박하기 그지없다. 경로당 나오는 어른들이 대부분 논일, 밭일을 하며 지낸다고 한다. 오늘도 고추 따다 말고 온 분들이 많았다.

농사지을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가버려 칠순, 팔순이 지나도 농약통을 짊어져야 한다. 환갑 정도 지난 나이는 그야말로 청춘이다. 이장을 맡고 있는 한계희 씨(62세)가 경로당의 막내이다.

"아직 경로당 나올 연세가  안 되신 것 같은데요."
"월반했어."
"그래도 이장이 손주가 셋이나 되는걸."

여기저기 다니며 눈·코·입 만드는 걸 도와주던 강사가 구선회 할아버지의 작품을 들어 보이며 말한다.

"코가 똑같이 생겼네요. 그렇죠?"
"난 입술을 똑같이 만들었는데."
"할머니는 눈이 똑 닮았네."

곳곳에서 품평회가 이뤄졌다. 그러고 보니 투박한 손으로 잠깐 사이에 만들었는데도 작가의 얼굴과 비슷한 자화상이 여럿 눈에 들어왔다.

a "잘 봐, 입술이 꼭 닮았지." "솔직히 말해 입술이 개성있게 생겼다"며 자화상을 보여주는 이재순 할머니.

"잘 봐, 입술이 꼭 닮았지." "솔직히 말해 입술이 개성있게 생겼다"며 자화상을 보여주는 이재순 할머니. ⓒ 최진섭


"전시회 할 때 자화상 옆에다 사진을 한 장씩 놓을게요. 그래야 솜씨 좋은 게 한눈에 드러나죠."
"할망구들 사진 뭐 예쁘다고 늘어 놔."
"어머니들 전부 미스 강화인걸요."

이름 석 자 못쓰는 예술가
  
완성된 작품의 한쪽 구석에는 작가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자필로 이름 석 자를 못쓰는 분들도 간혹 있어서 강사가 이름을 대신 적었다. 이름 석 자도 못 쓰는 촌노가 도자기 전시회를 연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빅이벤트일 것이다. 강사는 이름 석자 써 넣는 게 어려워서 도자기 수업이 싫다는 분도 있었다고 귀띔해 주었다.

귀를 매만지면서, 코를 높였다 낮췄다 하면서, 살아온 칠팔십 인생의 아무도 모를 상처를 보듬었을지 모를 어르신들의 자화상은 말리고 굽는 과정을 거쳐, 한 달 뒤인 9월 26일 전시회장에서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a  강화 선원면 작업실에 선 도예가 김지원씨

강화 선원면 작업실에 선 도예가 김지원씨 ⓒ 최진섭

- 언제부터 도자기 수업을 맡으셨죠?
"강화에서는 재작년부터 도자기 수업을 했는데, 작년에는 선원면의 더리미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었죠. 전국적으로 경로당에서 제대로 된 도자기 전시회를 연 곳은 강화가 처음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노인들이 도자기를 만들면 어떤 점이 좋나요?
"흙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우울증과 치매의 치료효과가 있어요. 흙을 붙였다 떼었다 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심리치료를 하는 효능이 있죠."

- 인상적인 작품이 있었다면?
"유골함이요. 칠순이 갓 지난 분이 유골함을 공들여 만든 다음에 '내가 죽은 다음에 내 뼈를 여기다 갈아서 넣어두면 아들 딸이 어떻게 생각할래나' 하고 물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을 들으면서 '이 분이 도자기를 만들면서 죽음에 대한 준비를 진지하게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죠. 단지 즐기면서 노는 것뿐만 아니라 나이 들어서는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고 봐요."

- 자화상 속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어느 분은 자화상을 다듬다가, 우리 엄마는 내 오장육부를 다 만들었는데 나는 내 얼굴도 하나 제대로 못 만드나 하는 얘기를 하셨는데, 아마도 돌아가신 친정엄마 생각이 난 것이겠죠. 자화상 수업 시간은 자신과 가족의 삶에 대해 되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해요."

- 언제 보람을 많이 느끼나요?
"내 평생에 이런 예술작품을 만들어 보는 것은 처음이다, 이런 전시회를 열게 될 줄이야 하면서 감격해 하는 분들을 볼 때 도예가로서의 큰 보람을 느껴요."

- 이번 행사의 의미에 대해 한 말씀 해주세요.
"나이 들어 몸이나 마음이 약해진 노인분들이 작품을 만들어서 전시한다는 것은 단순한 취미생활을 넘어서는 것이라 여겨져요. 수업의 결과물로 작품을 남기고 전시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 여기고 자신감, 행복감을 느낄 수 있거든요. 실버 전시회를 통해서 작품을 낸 어르신들의 가족들 뿐만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노년기의 삶과 행복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오마이스쿨에서 전시회를 열면 더 많은 관람객이 올 것 같아서 기대가 큽니다."

#도자기 #강화 #실버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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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는 채식과 마라톤, 지금은 달마와 곤충이 핵심 단어. 2006년에 <뼈로 누운 신화>라는 시집을 자비로 펴냈는데, 10년 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낼만한 꿈이 남아있기 바란다. 자비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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