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집 150만원? 쿠하야, 직접 자연관찰하자

전집과 단행본 사이에서 갈등하는 엄마의 책 이야기

등록 2008.09.01 10:53수정 2008.09.0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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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캐몬의 성장곡선'이라는 게 뭔지, 쿠하를 낳기 전까지 몰랐습니다.

사람의 뇌 발달이 6세까지 90% 이상 성장하고, 12세까지 뇌 발달이 거의 완료된다는 주장입니다.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엄마도 없지 않지만, 대다수 엄마들에게 이 성장 곡선을 보여주면 어떤 반응이 나타날까요?


'초등학교 취학 이전에 되도록 최선을 다해 아이를 가르치겠다'는, 열혈 엄마가 한 명 더 탄생할 겁니다. '책이나 읽어주면 되지' 하고 한가하게 생각하던 저같은 엄마는 불안해지고, 자녀교육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유아 교육정보가 넘치는 인터넷 서핑을 해야 하루 일과를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엄마 블로거들은 대단히 부지런합니다. 살림하고 아이 키우면서 어떻게 그런 정보사냥이 가능한지 의아할 정도로, 연일 새로운 책과 교구·장난감과 체험학습 정보가 업데이트 됩니다. 웹서핑은 자주 웹쇼핑으로 이어집니다. 다른 집 아이들은 다 보는데 우리 아이만 못 보면 괜히 뒤처지는 것 같아서, 저 역시 선배 엄마들이 좋다는 책을 우선순위에 올려두게 됩니다.

살림하고 아이 키우고 웹서핑까지, 바쁘다 바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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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의 전집 대신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쿠하야, 자연은 직접 관찰하는 거야." 사진은 서울대공원에서 보리를 직접 만져보고 있는 아이. ⓒ 최은경

쿠하가 두 돌 무렵, 아이가 잠들기 바쁘게 고수 엄마들의 블로그를 찾아다니며 전집 후기를 살폈습니다. 첫 돌 선물로 한 출판사의 히트상품을 중고로 사줬는데, 아이가 너무 잘 봐서 본전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두 살 생일선물로 자연관찰 전집을 하나 사주려고 알아보던 저는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에 쏙 드는 자연관찰 전집 가격은 무려 150만원이었습니다.


물론 그 책을 연구해서 만든 사람들의 공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얇은 제 지갑을 원망할 수밖에 없겠지만, 비싸도 너무 비싸서 엄마들이 이런 걸 사준다는 게 그저 놀라웠습니다. 얼마 전 친구가 "드디어 이 전집을 가진 엄마 반열에 올랐다"고 말하기도 해 그 책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 번 사면 초등학교 때까지 두고두고 보는 내용이고, 책이 잘 만들어져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래도 한 번에 150만원을 아이 책 값으로 결제하려니 손이 후들거리더군요.


중고를 알아보다가 지쳐 포기했습니다. 몇년 본 헌책도 70만원 선에서 거래되고 있었으니까요. 호기심 많은 세 살 아이에게 한 마디로 때웠습니다.

"쿠하야, 자연은 직접 관찰하는 거야."

594만 8천원만 있으면 필요한 책 다 사겠네, OTL

넉달 전, 한 출판사에서 무료로 해주는 영아종합발달검사를 받았습니다. 만 6개월 아기부터 36개월 영아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이 회사의 경우 초등학교 6학년까지 꾸준히 검사를 할 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아이의 상태를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엄마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편입니다.

영아종합발달검사는 아직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아이들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엄마가 설문지에 답을 한 뒤 결과를 통보받습니다. 수십 개의 질문들을 통해 인지·언어·사회정서 등을 체크한 뒤 종합 점수를 알려줍니다.

특히 또래 아이들과의 상대평가한 점수를 볼 수 있어서 우리 아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됩니다. 100명 중 몇 명이 우리 아이보다 느린 발달을 보이고 있는지 구체적인 점수를 알려주기 때문에, 결과분석을 받고 나면 아이에게 부족한 영역의 책 구입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됩니다. 책장사도 이쯤되면 과학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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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의 전집으로 유명한 오르다코리아의 자연발견세트 60권. 홈페이지에 가격은 공지되어 있지 않다. ⓒ 오르다코리아

쿠하가 추천받은 전집 목록은 꽤 알차보였습니다.

창작그림책 2세트, 옛이야기 1, 영어 1, 자연관찰 1, 과학그림책 1, 사회영역 1, 백과사전 1, 수학동화 1, 클래식 음악동화 1세트에 한글학습과 유아영재교실 등 영역별로 골고루 담겨있습니다.

이 모든 걸 구비해 주려면 정확히 594만8000원이 필요하다는 친절한 계산서까지 잊지 않고 들어있었지요. 이 출판사에서 추천하는 대로 5세까지 발달에 맞춰 사주려면 1200만원이 훌쩍 넘어갑니다.

문제는 비싸다고 아이들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다 줄 수만은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한 번 본 책이라도 반복해서 보고, 몇 달 전에 흥미를 잃은 것 같았던 책도 다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지요.

아이가 원할 때마다 도서관에서 빌려다 줄 정성도 부족하거니와, 자기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 강해서 마음에 드는 책은 반납을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서관에 빌릴 수만도 없는데, 이를 어째?

푸름이 독서영재로 유명한 푸름이 아빠 최희수씨는 아이를 유치원에도 보내지 않고, 취학 전까지 책만 읽힌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스폰지처럼 흡수하기 때문에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많은 것을 읽히는 것이 좋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단행본의 경우 엄마의 취향에 따라 사기 쉽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독서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도 맞습니다. 게다가 유치원에 보낼 돈으로 책값에 투자한 것이니 아이에게 쓴 돈의 절대량은 비슷할 것이라는 얘기에도 수긍이 갑니다. 매달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는 돈을 책값에 쓰면 매달 어지간한 전집 하나씩 사줄 수 있는 돈이니까요.

책값으로 따지면 단행본도 만만치 않게 비쌉니다. 애들 그림책이라고 무시했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어른 책값과 다를 바 없습니다. 비싼 것은 1만2000원, 팝업 북은 3-4 만원짜리도 있습니다. 한권 당 가격을 비교하면 전집이 더 저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집보다 단행본을 고집하는 이유는 처지는 책이 아깝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작품들로 구성했더라도 눈에 띄게 좋은 책과 뒤처지는 책이 있기 마련입니다. 잘 안 보는 책은 책값도 아깝지만, 책을 만든 종이도 아깝습니다. 심지어 어떤 책은 나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한꺼번에 수십 권을 사주면 아이가 좋아하는 책과 싫어하는 책이 분명하게 갈리고, 이 때 싫어하는 책에는 여간해서는 손을 대지 않습니다. 책의 대상도 0-3세, 4-10세로 나뉘는 경우가 많아서 금방 활용할 수 있는 책과 묵혀뒀다가 읽어주게 되는 책이 뒤섞여 있습니다. 어떤 엄마들은 아예 발달에 맞춰 조금씩 상자에서 꺼내주는 기지를 발휘합니다만, 그럴 바에야 그 때 그 때 꼼꼼하게 기획해서 만든 단행본으로 사주는 게 낫지 않나 싶습니다.

아이와 함께 책 나무를 키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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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책을 보고 있는 아이. 단행본 위주의 책을 구입하려면 부모가 부지런해져야 한다. ⓒ 최은경


단행본 위주로 사주려면 엄마가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전집은 출판사의 기획력을 믿고 사면 되지만, 직접 골라주려면 엄마가 책에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아이보다 먼저 그 책을 살펴봐야 하고, 다양한 영역을 골고루 읽어주기 위해 엄마의 관심 영역도 넓혀야 합니다. 어쩌면 아이의 책 나무를 한 그루 키운다는 마음으로 길게 보고 시작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쿠하와 서점 나들이를 가면 무겁지 않은 걸로 3~4권을 사옵니다. 이 때 엄마가 고르는 책 3 대 1 정도의 비율로 아이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어떨 때는 황당한 책을 집어들어 만류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쿠하가 직접 고른 책은 귀여운 동물이 나오는 책이거나 집에 있는 작가의 새 책일 경우가 많아서 그대로 사옵니다.

아이가 고른 책은 처지는 법이 없습니다. 행여 잘 안보는 것 같으면, "니가 산 책 찾아와" 한 마디면 해결됩니다. 어린아이도 자기가 고른 책이나 물건에는 더 애착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경우, 선배 엄마들의 서평은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출판사 서평 이벤트에 당첨돼서 며칠 사이에 한꺼번에 올라온 글들은 별로 도움이 안 되지만, 오랜 기간 꾸준하게 서평이 달린 책들은 꽤 믿을 만합니다.

인터넷 서점에는 몇만원 이상이면 추가 포인트를 주는 제도가 있어서 7-8권 단위로 사기 마련인데, 아이가 집중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책은 두어 권 정도 뿐이어서 이 경우 골고루 관심을 갖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필요하게 먼지 쌓이는 책을 줄일 수 있습니다.

아이 책값 이야기가 나오니 말이 길어졌습니다. 찜해둔 전집을 확 지를 것인가, 꾹 참고 좀 더 크면 사줄 것인가? 월급 빼고는 다 오른 요즘, 독서를 평생 습관으로 키워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은 오늘도 복잡합니다.
#그림책 #전집 #책 #유아 #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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