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에 떨고 있는 군대, 승리할 수 있을까

[역사소설 소현세자 92] 무너지는 제국

등록 2008.08.30 15:34수정 2008.08.3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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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기군. 팔기군의 전신 4기군 깃발. 정남기, 정백기, 정황기, 정홍기. 심양고궁에 있다. ⓒ 이정근


명(明). 270여 년간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대륙을 비추던 해와 달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정화함대를 파견하여 세계를 경영하려던 야망도 헛된 꿈이었다. 중원을 이민족에 내준 치욕을 씻은 주원장의 자부심도 세월과 함께 녹슬었다. 명(明)나라 17대 황제에 등극한 숭정제 주유겸은 환관정치와 당쟁에 휘둘려 내우외한에 시달리고 있었다. 

도처에 반란군이 준동했다. 반란군을 토벌하겠다는 명분으로 과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이자 농민들이 봉기했다. 농민들의 저항은 폭동으로 발전했고 왕가윤이 농민군을 이끌었다. 왕가윤 부대에서 틈장으로 활약하던 이자성은 왕가윤이 전사하자 고영상, 나여재. 노회회, 장헌충과 연합하여 반란군 지도자로 부상했다.


주원장의 고향 봉양을 점거한 고영상의 농민군이 황실 무덤을 파헤치자 숭정제는 발끈했다. 명 조정은 홍승주, 노상승, 웅문찬 등 장수들을 파견하여 토벌에 나섰다. 수적으로 열세에 몰린 농민군은 궤멸 직전까지 몰렸으나 뿌리는 뽑히지 않았다. 재기불능이라고 판단한 숭정제는 반란군 진압에 공을 세운 홍승주를 북경으로 불러들여 병부상서에 임명했다.

"오랑캐가 감히 중원을 넘보다니... 괘씸하다"

미미한 존재로 알았던 여진족이 요동을 석권하고 조선을 정벌했다. 왜구를 수장시켜 믿음을 주었던 조선 수군도 전설이 되었다.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 나라를 세우고 감히 중원을 넘본다니 괘심하기 짝이 없다. 남방을 다스려 놨으니 이제는 오랑캐다. 숭정제가 홍승주를 불렀다.

"그대의 공은 후대에 길이 남을 것이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내 그대를 어여삐 여겨 또 다시 공을 세울 기회를 주겠다."
"분부만 내려주시옵소서."


"그대를 개요총독에 임명하노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홍타이지의 목을 가져오라."
"폐하! 목숨 바쳐 황명을 거행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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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기군. 기존 4기군의 4각 깃발을 변형한 황기, 백기, 홍기, 남기를 추가하여 8기군이 완성되었다. 심양고궁에 있다. ⓒ 이정근

홍승주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을 출발했다. 반란군을 진압한 홍승주는 한껏 고무되어 있었으나 따르는 병사들은 추웠다. 고비사막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팔기군 '괴담'에 떨고 있었다.


'번개처럼 빠르다'는 팔기군 '괴담'은 '귀신같이 나타나 목을 베고 바람처럼 사라진다'에서  '앞서가는 기병이 목을 치면 뒤따르는 기병이 땅에 닿기도 전에 주워간다'로 확대재생산 되었다. '괴담'은 들불처럼 번졌다. 그들은 팔기군 소리만 들어도 오싹하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홍승주는 '괴담' 바이러스에 감염된 부대를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었다.

적진이 가까워올수록 '괴담'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공포다. 멀리서 말 발굽소리만 들려도 피아를 가리지 않고 혼비백산했다. 그들은 싸워서 이기려는 군대가 아니라 공포 체험단이나 다름없었다. 분위기를 파악한 홍승주가 "괴담은 괴담일 뿐, 우리는 대륙에서 가장 강한 군대다"라고 휘하 장졸들을 독려했지만 공허했다.

노쇠한 곰이 탈진하기만을 기다리던 청나라는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고사 직전에 몰린 명나라를 그나마 받혀주고 있는 인물은 홍승주와 오삼계다. 이번 기회에 홍승주를 꺾어 놓으면 한쪽 날개가 부러진 황새. 명나라를 손아귀에 넣는 일은 시간문제다. 하지만 청나라는 성급하게 덤비지 않았다. 범문정의 지략이다.

병법 같은 것 모른다. 싸워서 이기면 되는 것 아닌가?

만주벌판을 휘젓고 다니던 여진족은 치고, 부수고, 아작 내는 것이 특기다. 천하무적 팔기군을 거느리고 있는 홍타이지는 무얼 기다릴 것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럴 때마다 범문정이 제동을 걸었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있는 곰을 잡으려면 희생이 뒤따른다. 쇠잔하여 스스로 쓰러질 때 주어오면 힘 안들이고 거두어들인다'는 것이었다. 범문정이 이러한 논리를 펴면 격한 논쟁이 붙었다.

"오합지졸 명나라 군대가 무에 두려운가? 치고 들어가자."
"손자가 병법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다'고 했습니다."

"손자병법이 무언가?"
"춘추전국시대 손무가 쓴 병서입니다."

"우리는 병법 같은 것 모른다. 싸워서 이기면 되는 것 아닌가?"
"중원으로 나아가려면 만리장성을 통과해야 합니다. 산해관은 장성의 관문입니다. 누각에는 천하제일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관문을 강제로 열려고 하면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스스로 열어주는 문을 들어선 자가 진정 승리자이며 천하제일 강자입니다."

범문정은 싱싱한 날고기만 먹는 호랑이가 아니라 죽은 고기도 먹어치우는 만주 벌판의 여우였다. 홍승주가 출정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청나라는 나아가서 싸우지 않고 유인했다. 함정으로 끌어들여 일거에 섬멸하겠다는 전술이다. 팔기군을 후방에 매복해두고 전투력이 약한 몽고군을 전방에 배치했다. 조선군은 보급부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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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포. 심양고궁에 전시되어 있는 홍이포. 당시 홍이포는 오늘날의 미사일처럼 최신 무기였다. ⓒ 이정근


행산보에 진을 마련한 홍승주는 젊고 용맹한 장수 조대수에게 금주성을 사수하라 명했다. 청군에 포위된 조대수는 군사를 잃고 청나라에 투항했다. 군사요충 금주가 청나라의 수중에 떨어지자 홍승주는 위기를 느꼈다. 금주 함락 소식은 북경에 알려졌고 숭정제는 화친을 명했다.

'황제의 징표를 가진 대신이 금은보화를 가지고 와서 북경 동쪽의 땅을 내놓겠다는 의논을 한다면 대화에 응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할 필요가 없다'며 청나라는 퇴짜를 놓았다. 금주전투는 명-청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 명나라 군사는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고 청나라 군사들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사기가 오른 청나라 군사들이 탑산을 공격했다. 명나라 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응전하지 않았다. 남한산성 전투의 복사판이다. 청나라 군이 홍이포를 쏘아 성벽을 무너뜨렸다. 성에서 항전하던 명나라 군사 7000명은 전멸했고 청나라는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금주와 탑산, 행산보는 삼각 전략요충이다. 3개의 성중에서 2개의 성이 떨어져 나가자 다급해진 명나라는 '영원 동쪽의 땅을 내줄 테니 화친하자'고 또 다시 청했다.

요청을 받은 청나라는 의견이 분분했다. '홍승주의 주력군이 행산보에 포진하고 있으니 화친을 받아들이고 전열을 정비하자'는 범문정의 주장과 '여세를 몰아 강공하자'는 도르곤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대세는 도른곤으로 기울었다. 명나라의 명운을 가르는 마지막 일전이 시시각각 다가왔다.

행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군의 홍이포가 불을 뿜었다. 50여 파의 성벽이 무너졌다. 불리한 전세를 간파한 홍승주 휘하 구민앙, 조변교, 왕정신 등 장수들이 성 밖으로 나와 투항했다. 청나라는 항복을 받아주지 않고 목을 벴다. 고립무원에 빠진 홍승주가 드디어 백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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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전. 청나라 군대의 출정식과 항복식이 열렸던 곳이다. 심양고궁에 있다. ⓒ 이정근


피의 삼각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청나라는 조대수와 홍승주를 심양으로 압송했다. 전승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한 희생양이다. 황성 4대문에 걸린 북소리가 3일 동안 울렸다. 승전고다. 대정전에 마련된 항복식장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초청되었다.

단상에 마련된 황금빛 황제의 자리에 홍타이지가 앉았다. 바로 아랫단 서쪽에 도르곤을 비롯한 제왕과 범문정, 용골대 등 청나라 요인들이 앉고 오른쪽에 몽고왕 그리고 소현과 봉림이 자리를 잡았다. 조대수가 바친 진귀한 물건들을 살펴보던 홍타이지가 소현을 지긋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조선에도 저런 보물이 있느냐?"
"조선에는 없습니다."

"허허, 뭐든지 없다고 하니 내가 무엇을 그리 달라고 하였기에 그러느냐?"

홍타이지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어찌 없는 것을 있다 하고, 있는 것을 없다 하겠습니까."
"조선에는 쌀과 소금도 있느냐?"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홍타이지의 웃음이 조금 더 커졌다.

"그런 것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일용품인데 그렇게까지 물으시니 황공합니다."
"이제 홍승주, 조대수, 조대락 등 명나라 장수가 예를 행할 것이니 놀랍지 않느냐?"

너희가 아버지 나라로 받들던 명나라 장수들이 삼배구고례를 행하는데 기분이 어떠냐는 것이다.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토록 믿었던 아버지의 나라 명나라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라고 믿었던 명나라 장수들이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소현의 꿈도 사라지는가 싶었다. 고국에 돌아가면 '부왕을 삼전도에 무릎 꿇리게 했던 청나라에 복수하리라'고 다짐했는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만 같았다.
#소현세자 #홍타이지 #홍승주 #홍이포 #범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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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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