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괴담4>의 한 장면. 고등학생 시절 난 '모범생'으로 보였지만, '간지와방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씨네2000
때는 바야흐로 1995년경, '동부이촌동'이라는 서울 부촌의 고급아파트에 가족들과 잠깐 거주하게 됐다.
그 시절, 외동딸인 나는 부모님에게 항상 모범생이어야 했다. 왠지 그 평판을 유지하는 것도 나름대로 즐길 만했다. 하지만 날라리 근성이 어디 가겠는가? 부모님은 꿈도 못꿀 '간지와방증후군'('간지'=폼, '와방'=무척 많이)이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으니.
이스트팩 매고, 캘빈클레인 입고, 워크맨 허리에 끼고그럼, 사례를 한 가지 들어보자. 그 당시 '게스'라는 브랜드의 청바지가 청소년들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었다. 엉덩이 오른쪽에 역삼각형 빨간딱지는 집단 내에서 '있다'는 우월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공부는 못해도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그걸 입을 순 없었고, '간지'는 은근히 과시하고 싶었던 터였다.
찾고 찾다가 '캘빈클라인'이라는 청바지를 찾아냈다. 그 청바지에는 딱지가 티나지 않게 붙어있었고 그 때 패션을 아는 이들은 대부분 그 상표를 알아봤다. 그래서 몇날 며칠 아버지 가랑이에 매달린 결과 바지를 얻을 수 있었다.
난 그 예쁜 청바지를 그 당시 유행했던 '이스트팩'에 넣어 다니면서, 방과 후면 뭇 남성들이 우글거리는 노량진 단과학원으로 갔다. 그 때 느껴진 사람들의 시선이란…. 참 거기에 자동되감기 기능이 있는 소니의 워크맨도 허리춤에 빛나고 있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했던 게 아니라 모범생으로 보이면서 새침한 이미지를 굳히는 것이 그 당시 나의 전략이었다. 학생들이 많은 단과 수강에 우선순위를 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일단 많은 이에게 폼 나게 보여야했으니까!
머리는 날티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상고머리를 했고, 교복 치마도 두 단 살짝 접었다. 거기에 유행하는 가방을 매고 사복으로는 나름 인정받는 청바지에, '아이참(쌍꺼풀 만드는 테이프)'을 붙인 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부모님 여행을 틈타 머리 염색을 시도하다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염색이 유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자율적이던 우리학교 아이들의 머리가 노랑·파랑·빨강 단풍잎으로 물들여지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이 늘어날 수록 내 마음 속에서도 '간지' 증후군이 슬슬 작동하기 시작했다. 마음 속은 그랬지만,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는 듯 무표정한 채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렇게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었고 갑자기 부모님께서 해외동반 여행을 가겠다고 나서는 게 아닌가. 그 때 내 머릿속을 '휙~' 지나가는 아이디어 하나. '때는 지금이다, 드디어 염색을 하는 거다.'
우선 나는 짝퉁 모범생 넘버투인 단짝 효선이를 꼬시기 시작했다. 효선이는 생각보다 쉽게 넘어왔다. 외동딸인 나에게 부모님이 없을 때 사고를 친다는 것은 완전범죄를 뜻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난 공부계획 때문에 굉장히 지친 듯한 표정으로 부모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부모님이 떠나자마자 효선이와 함께 어른스런 복장을 갖추고 비디오가게로 향했다. 당시 브래드피트를 무척 흠모하고 있었던 지라, <가을의 전설>이란 영화를 빌렸다. 어른 행사를 하면서 말이다. 이 영화는 '18세 이상 관람가'였으니까. 그리고 화장품 가게에 들러 은근히 붉은빛이 날 만한 염색약을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일단 머리에 염색약을 칠했다. 대략 20여분 지나고 나서 헹궈야한다고 써있었다. 그래서 막간을 이용해서 <가을의 전설>을 봤다. 부모님이 즐겨 마시는 맥주 한 캔씩을 들고선. 이 얼마나 어른스러운 일인가?
세 형제들의 사랑을 몽땅 한 몸에 받는 붉은 머리의 아녀자를 보면서 부러움에 가득할 때, 너무 오랜시간이 지났음을 알았다. 걱정스레 헹군 우리들의 동양머리는 은근 빨강머리 앤으로 변신해 있었고. 걱정이 됐다. 하지만 '너무 티나면 뭐 며칠 있다가 다시 하지 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재미나게 영화를 보고 술도 먹고 흥청망청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빨강머리에 익숙해져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래서 우리 둘은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그냥 유지하기로.
"엄마 스트레스 받아서 머리가 노래진 거 같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