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교생에게도 수강신청을 허하라!

[해외리포트] 창의력 강조와 획일적 교과과정 강제는 모순

등록 2008.09.11 18:06수정 2008.09.1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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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한문·영어·수학·국사·세계사·지리·정치경제·윤리·물리·생물·지구과학·화학·불어·기술·가정·음악·미술·체육.

1970년대 중반, 내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공부했던 과목들이다. 이른 아침에 등교하여 같은 교실에서 같은 친구들과 같은 과목을 공부했던 나는 그때도 도시락 두 개를 싸가지고 다니면서 요즘 아이들처럼 '야자'(야간'자율'학습)를 했다.

그런데 강산이 벌써 세 번 이상 바뀐 2008년 오늘,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변한 강산만큼 달라진 공부를 하고 있을까.

내게도 과목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면

a  인문계 고등학교 2008년 교과과정.

인문계 고등학교 2008년 교과과정. ⓒ 한나영


위 교과과정은 어느 인문계 고등학교의 2008년 교과과정이다. 현직 교사로 있는 친구가 보내준 것이다. 그런데 눈에 익숙한 국어·도덕·국사·사회·영어·과학 등의 이름 외에 '인간사회와 환경' '생활과 과학' '생태와 환경' '정보사회와 컴퓨터' 등의 세련된(?) 과목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세월이 흐른 만큼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과목도 바뀐 것일까.

"겉만 그럴 듯하게 포장했을 뿐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게 친구의 설명이다. 더구나 교과과정에 있는 과목일지라도 수능을 안 보는 '비수능과목'은 학생이나 교사로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 일쑤란다. 그 시간은 아예 자율학습을 하거나 적당히 형식을 갖추어 수능 과목을 보충하는 시간으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수능이 고등학교 교과과정을 완전히 장악하는 황폐한 현실이 바로 우리 교육의 현주소다. 이런 답답한 현실에서 즐거운 학교, 재미있는 수업을 기대할 수 있을까.


21세기 교육의 화두는 창의력 개발이다. 문화관광부 정책백서(2005)에 따르면 미래 사회는 암기와 반복으로 얻은 지식보다 창의적 사고와 혁신적 행동을 통해 체득한 지식이 가치를 발휘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창의성과 다양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창의력이 경쟁력이라는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은 우리 아이들을 21세기의 주역으로, 글로벌 인재로 키울 복안을 가지고 있을까. 다양성의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교과과정과 이를 가르칠 만한 준비된 교사가 준비돼 있을까. 


학교 다닐 때 그런대로 범생이(?)였던 내게도 괴로운 시간이 있었다. 바로 미술과 체육 시간이었다. 미술 선생님은 미술에 별 관심이 없는 나에게 구성·수채화·포스터를 잘 그릴 것을 요구했다. 또한 체육 선생님은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100m 달리기를 20초 기준으로 뛰었던 내게 빨리 달리라고, 윗몸일으키기를 더 많이 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손재주가 별로 없어 밋밋한 구성, 어설픈 색칠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친구들 앞에서 과감하게 C(심한 경우는 D)를 날리는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말이다. 또한 기를 써도 B 이상 받을 수 없었던 나는 무딘 운동 신경을 물려준 부모님을 원망하며 지겨운 체육시간을 보내야 했다.

(참고로 이 곳에서는 실기 시간에 준비물 잘 챙겨가고 열심히 참여하기만 하면 좋은 점수를 받는다. 참여는 개인의 타고난 능력과는 무관한 문제이기에 미술이나 체육에 별 소질이 없어도 충분히 A를 받을 수 있다.)

고등학교 시간표, 마음대로 짠다

a  마칭 밴드가 방학 중에 연습을 하고 있다. 학점이 인정되는 수업이다.

마칭 밴드가 방학 중에 연습을 하고 있다. 학점이 인정되는 수업이다. ⓒ 한나영

재미있는 것은 이런 부실한(?) 내 인자가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유전되었는지 두 아이 모두 미술과 체육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싫어했다. 특히 큰딸이 더했다. 그래서 한국에 있을 때 아이는 미술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두 아이들은 미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없다. 왜냐고? 미술 과목을 선택하지 않으니까.

대신 자기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학기마다 신청해서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심포닉 밴드에서 연주(오보에·퍼커션)를 하기도 하고 마칭 밴드에서 멋진 유니폼을 입고 풋볼경기 프리게임과 하프타임 공연을 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아니, 대학도 아닌데 고등학교에서 마음대로 과목을 선택할 수 있다고? 그렇다. 

미국에 처음 와서 생소했던 것은 아이들이 자신의 학교 시간표를 스스로 짠다는 것이었다. 내가 경험한 우리나라 고등학교 시간표는 개인이 짜는 게 아니고 교과과정에 따라 학교에서 짜놓은 시간표를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따라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런 제도에 익숙했던 나는 스스로 선택하여 시간표를 짜야 하는 미국의 제도가 낯설게 느껴졌다. 아니, 불편한 것 같기도 했다. 시간표 때문에 일부러 카운셀러를 만나야 하고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스스로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개학을 며칠 앞둔 지난 8월 중순 경에도 나는 아이들의 카운셀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새 학년 시간표를 확정하기 위해 학교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학교 카운셀러는 학생들의 시간표 짜는 일을 도와주고 대학 진학에 필요한 정보와 상담을 전담하는 선생님이다.

이렇게 카운셀러를 만나 자신의 시간표를 짜야 하는 일이 귀찮게 여겨지기도 했지만, 시간을 두고 보니 아이들이 스스로 고민하여 선택한 과목인 만큼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장점이 있는 것 같았다.

미국 고등학교는 이렇게 스스로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데 그러면 어떤 과목들이 다양하게 제공되고 있을까.

a  개인 시간표와 진학 상담을 돕는 카운셀러 후버 선생님.

개인 시간표와 진학 상담을 돕는 카운셀러 후버 선생님. ⓒ 한나영


다양한 선택 과목이 제공되는 미국 고등학교

두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해리슨버그 고등학교는 과목별 부서를 11개로 나누고 있다. 미술·공연예술, 비즈니스, 대안교육, 청소년 교양, 영어, 외국어, 건강∙체육, 수학, 과학, 특수교육, 사회 등이다.

이들 부서에서는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과목이 운영되고 있다. 비즈니스부서를 예로 들면 아래와 같은 학과목이 운영된다.

회계학, 고급회계학, 컴퓨터정보시스템(CIS), 고급 컴퓨터 정보시스템, 상법, 탁상출판(DTP), 고급 웹 디자인, 재무, 비즈니스와 마케팅 원론, 비즈니스와 산업 멘토십, 산학협동 업무 교육(COE)·직업탐구, 마케팅입문, 마케팅, 스포츠∙연예∙레크리에이션 마케팅, 패션마케팅, 고급 패션마케팅.

대학 수준의 다양한 비즈니스 관련 과목이 개설되어 있다. 학생들은 이렇게 다양한 과목 가운데 자신이 듣고 싶은 과목을 선택하여 수강신청을 하게 된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선택과목도 많다. 바로 학교 앨범을 만들어내는 '이어북(Yearbook)' 클래스다.

이어북은 해마다 발간되는데 우리나라의 졸업앨범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의 앨범엔 사진만 달랑 들어가지만 이어북은 A4 크기에 270페이지나 되는 올 컬러의 멋진 잡지다. 도대체 학생들의 사진 말고 뭐가 실리기에 그렇게 두툼한 책이 되어 나오는 것일까.

우선 전교생 사진이 다 들어가있다. 확실히 앨범이다. 하지만 이런 사진 외에 지난 1년 동안 학교 안팎에서 있었던 학생들의 활동이 자세한 사진 설명과 함께 실려 있다. 또한 학생들의 재미있는 여론조사 결과도, 학생들이 궁금해하는 호기심 천국도 다 실린다.

a  인터내셔널 축제를 취재한 이어북 기자가 한국에서 온 자매의 패션쇼 기사를 실었다.

인터내셔널 축제를 취재한 이어북 기자가 한국에서 온 자매의 패션쇼 기사를 실었다. ⓒ 한나영


올해 발행된 이어북의 한 페이지다.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다른가?"


여자들이 잘 모르는 남자들에 대한 궁금증은 백과사전 수십권으로도 해결이 안 된다. 점심시간이면 이성에 대해 수다를 떠는 남녀 학생들의 호기심을 실험해 보기 위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50명 학생에게 물은 다섯 가지 질문이다.

1. 남자들은 왜 전화해 달라고 하면 안 해주는가?
2. 남자들은 왜 자기네끼리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가?
3. 남자들은 왜 자동차에 그토록 흥미를 보이는가?
4. 남자들은 왜 진실한 감정을 서로 나누려고 하지 않는가?
5. 남자들은 왜 비디오 게임을 하면서 밤을 새우는가?

마치 10대들이 즐겨 읽는 잡지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바로 이런 내용이 이어북에 실려 있다. 그렇다면 270페이지나 되는 이어북의 기사 작성과 사진·편집 등은 누가 맡아서 하는가? 바로 '이어북 저널리즘'을 수강하는 학생들이 한다.

지난해 9월, 이 지역에서 열렸던 인터내셔널 축제에는 이 과목을 수강하고 있는 학생이 참석했다. 이 학생은 패션쇼에 참석한 두 딸을 취재했는데 바로 그때 취재한 내용이 이번 이어북에 실렸다. 이어북 저널리즘을 공부한 학생을 도처로 파견하여 현장 취재를 하도록 한 것이다.    

이어북 저널리즘과 비슷한 과목으로는 저널리즘, 신문저널리즘, 고급 신문저널리즘이 있다. 신문저널리즘을 수강하는 학생들은 한 달에 두 번씩 흥미진진한 학교 신문 <뉴스스트릭(NewsStreak)> 기자로 뛴다. 이들은 학생의 눈높이에 맞춘 뉴스 아이템을 정하고 직접 취재해서 읽을거리가 풍성한 신문을 만들어낸다.

이들은 수업 시간에 기사 작성, 인터뷰 요령, 레이아웃, 사진, 마케팅, 광고, 그래픽 디자인, 데스크톱 출판소프트웨어 등을 배우면서 기자 실습을 하기도 하고 자신이 기자로서 적합한지 등도 판단하게 된다.    

이밖에도 매주 월요일이면 군복을 입고 등교하는 'JROTC(주니어 ROTC)' 클래스도 있고 리더십을 기르는 '리더십 교육과 훈련', 연극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드라마, 드라마Ⅱ, 고급드라마, 공연 제작 등의 과목도 개설되어 있다. 

저 많은 과목들을 다 어떻게 가르치지?

이렇게 흥미로운 선택과목을 듣는 학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만 수강하는가. 그렇지 않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려면 반드시 수강해야 할 주요 과목이 있다. 아래 표는 버지니아 주 교육부에서 정한 교과과정이다.

a  졸업에 필요한 학점 내역.

졸업에 필요한 학점 내역. ⓒ 한나영


우리와는 달리 이렇게 다양한 선택과목이 개설된 고등학교를 보면서 이 학교 교감인 섭코 선생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 '2008-2009 학과' 안내 책자를 보면 굉장히 많은 선택과목이 개설되어 있다. 음악만 하더라도 12개, 미술은 7개나 되던데 그 과목은 실제로 개설된 과목들인가. 또한 개설된 과목이 학생들로 모두 차는가.
"실제로 개설된 과목들이다. 하지만 모든 과목에 학생들이 다 차는 건 아니다."

- 선택과목이 아주 다양하던데 교사들이 이런 다양한 과목을 다 가르칠 수 있는가. 해당 과목과 꼭 맞아 떨어지는 전공을 가진 교사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대학에서 전공한 것과 비슷한 과목이면 해당 교사에게 일임하여 가르치도록 하고 있다."

- 교사들이 자신과 학생들의 관심, 요구에 따라 과목을 새롭게 개설할 수도 있는가.
"일부 선택과목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이 관심을 보이는 분야가 있으면 교사가 새롭게 과목을 개설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버지니아 주 교육부가 승인한 과목 리스트에 오른 과목이라야 한다."

- 해리슨버그 고등학교 학생과 교사 수는 얼마나 되는가.
"학생들은 모두 1200여명이고 교사는 보조교사 15명을 포함하여 총 121명이다."

- 선택과목에 대한 최대·최저 인원 제한이 있는가.
"최대 인원은 학급 수준이나 학습에 필요한 장비 등을 고려하여 정해지고 최소 인원은 대개 6명 정도다."

3년 9개월마다 바뀐 입시, 교과과정은 그대로

온 국민의 관심사인 입시제도. 대학 입시 제도는 그동안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우리나라 입시제도는 지난 60년간 16번이 바뀌었다. 평균 3년 9개월에 한 번씩 바뀐 꼴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과과정은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 우선 내 고교 시절하고만 비교해 본다면 별로 바뀐 게 없다. 세상은 변했고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변했는데 말이다.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3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우리나라가 언제까지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가, 20세기 지식을 21세기 아이들에게 가르친다'는 비판의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인가. 

지금은 영어몰입교육에 '올인'할 때가 아니다. 또한 사교육 시장을 흔들어 놓을 귀족학교 설립과 확충에만 눈을 돌릴 때도 아니다.

창의력이 경쟁력인 21세기, 과감한 교과과정 개혁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우리 아이들에게 다양성과 창의성을 심어주도록 노력해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필요할 때다. 왜냐하면 인적 자원 외에 별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교육에 대한 투자야말로 가장 빛나는 투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a  새학년 등록을 받는 '피데이(Fee Day)'. 개인 시간표도 이날 받는다.

새학년 등록을 받는 '피데이(Fee Day)'. 개인 시간표도 이날 받는다. ⓒ 한나영


#창의력 교육 #수강 신청 #교과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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