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통 편지로 복원된 몰락 양반의 실상

[책 속으로 떠난 역사 여행 23] 하영휘의 <양반의 사생활>

등록 2008.09.16 17:55수정 2008.09.1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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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이 사람대접 받고 살기 위해서는 양반이 되어야 했다. 길거리에서 양반을 만나면 아랫사람들은 허리를 기역자로 꺾어 인사를 했다. 농민들이 땀 뻘뻘 흘리며 타작을 하는 곁에서 돗자리 펴고 비스듬히 앉아 술병 곁에 놓고 감시하던 게 양반이었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존재가 양반이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조선 사회는 곳곳에서 파열음이 들렸다. 세도정치, 삼정의 문란, 곳곳에서 일어나는 민란, 이양선의 출몰, 신분질서의 동요…. 천년만년 지속될 것처럼 보이던 양반의 권위도 조선 왕조와 함께 기울어갔다.

 

1700통의 편지를 남겨 이 책의 주인공이 된 조병덕의 삶은 19세기 몰락 양반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선조들이 17, 18세기 조선을 쥐고 흔들던 노론의 명문가였음에도 조병덕은 대부분의 삶을 선산이 있는 충청도 남포현 삼계리에서 생활한다.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책 읽으면서.

 

손에 동전 한 푼 없어

 

a 표지 <양반의 사생활>

표지 <양반의 사생활> ⓒ 푸른역사

▲ 표지 <양반의 사생활> ⓒ 푸른역사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책 읽는 선비. 온갖 부정이 난무하는 세상을 등지고 자연 속에 묻혀 사는 고고한 선비의 모습으로 포장하면 뭇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모습이다.

 

하지만 조병덕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 한성에서 충청도 삼계리로 밀려난 몰락 양반의 생활은 기본적 생존조차도 위협받을 정도로 궁핍했다.

 

양식으로 말하면, 보리는 벌써 떨어지고, 오직 동곡 이자우에게 꾼 벼 예닐곱 석으로 근근이 연명하는데 이것도 오늘내일 끊어지려 한다. 남원이 보낸 돈 중 서너 냥으로 장시에서 피보리를 살 계획이지만 이것도 몹시 어렵다고 한다. 그밖에 다시는 입을 떼어볼 곳이 없으니, 햇곡을 먹을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고 굶어죽을까 걱정이다. 소자의 시에 "하늘이 나를 낳고 하늘이 나를 죽이니, 오직 하늘의 말만 들으면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으랴?"고 했는데 날마다 읊고 생각하는 것은 이 몇 구절 뿐이다. (책 속에서)

 

조병덕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그 시대 굶기를 밥 먹듯이 하고 살았던 백성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몰락 양반들의 형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몰락양반들 중에는 세상 바로잡겠다고 일어선 이들도 있었다. 홍경래, 최제우, 전봉준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조병덕은 양반 중심의 질서, 삼강오륜의 법도가 유지되는 조선 왕조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다. 생활고 속에서도 조병덕은 꾸준히 독서와 강학에 힘썼다.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서 인근의 아동이나 배움을 청하는 이들을 가르쳤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조병덕의 생활에 약간의 도움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활고의 어려움을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그가 남겨놓은 1700여 통의 편지 곳곳에서 생활고의 어려움을 찾아볼 수 있다.

 

조병덕의 편지에 가장 많이 사용한 관용구가 있다. "손에 동전 한 푼 없어 꼼짝달싹 못한다(手無尺銅措手足不得)"으로 자신의 경제적 곤궁을 나타낸 것이다.

 

몰락하면서도 끝내 놓지 못한 게 있어

 

17, 18세기 조선을 쥐고 흔들던 노론의 명문가가 19세기 이렇게 몰락한 이유는 뭘까.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조병덕 자신까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 결국 부친은 서울에서의 생활을 포기하고 낙향했다.

 

낙향할 무렵만 해도 어른만 21명이고 노비 80명을 거느리고 살 정도였지만 조병덕 대에 이르게 되면 경제적으로도 몰락한 모습이 보인다. 벼슬자리 없이 살기 힘든 서울을 떠났지만,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어 큰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게다가 양반으로서의 예의를 지키고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쓰임새는 줄이지 못했다. 결국 토지를 팔아 씀으로써 경제적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럼에도 조병덕은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를 고수하려 애쓰고 있다. 그가 살던 주변의 토착 양반들을 멸시하며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사람은 모름지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며 분수를 잘 타고난 도덕적인 양반이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신분차별에 엄격했다.

 

자신과 달리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동생들에게도 조병덕의 차별은 엄격했다. 세상은 변하고 있음에도 조병덕의 신분의식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때문에 세상의 변화를 바라보며 그는 개탄을 금치 못한다.

 

옥천의 형제는 어찌 진사의 서녀(庶女)로 하여금 전혀 적서를 구별하지 않게 하느냐? 이것이 비록 작은 일이지만 의리와 크게 관계가 있다. 가법이 선조를 따라야 한다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장래의 무궁한 우환도 여기서 생길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한심해진다.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쉽게 가법을 바꾸느냐? 가법이 바뀌면 인사가 변하고 변괴가 층층이 나온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책 속에서)

 

편지로 복원한 19세기 역사

 

호리병 같이 생긴 충청도 남포현 삼계리에서 생활하던 몰락 양반 조병덕은 28년간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아들은 그 편지를 차곡차곡 모아 보관했다. 그렇게 남아 지금까지 전해진 편지가 모두 1700통이나 된다.

 

그 편지 속에는 19세기의 생생한 역사가 담겨 있다. 그 시대의 관혼상제, 과거, 종계, 가계생활, 음식, 농사, 생활도구, 교통, 통신, 탈것, 서적, 조명, 문방구, 부채, 역, 질병, 의약, 민간처방, 지방행정, 마을, 화폐, 고리대 등의 일상생활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귀중한 편지가 '가회고문서연구소장' 하영휘의 연구를 통해 <양반의 사생활>이란 책으로 완성되었다. 편지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일상의 모습과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생생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책을 읽다 보면 19세기의 상황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몰락해가는 조선왕조와 더불어 몰락의 길을 걸어가는 조병덕의 삶을 통해 역사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 조병덕의 삶뿐 아니라 그와 연관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덧붙이는 글 하영휘 지음/푸른역사/2008.9/15,900원

양반의 사생활

하영휘 지음,
푸른역사, 2008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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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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