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뒤안길에서 떠올린 슬픈 전설

쑥부쟁이에 앉아 있는 노랑나비, 다가오는 추위에 어쩔거나?

등록 2008.09.29 17:39수정 2008.09.2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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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꽃 쑥부쟁이에 앉아 있는 노랑나비가 마음을 안쓰럽게 합니다.
가을꽃 쑥부쟁이에 앉아 있는 노랑나비가 마음을 안쓰럽게 합니다. 임윤수

뚝 떨어진 기온에 반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뚝이 오톨도톨한 피부로 대응합니다. 까칠하게 돋아있는 닭살을 쓱쓱 문지르며 걸음을 시작합니다. 몇 분 정도만 걸으면 잔뜩 긴장해 오톨도톨하게 돋아있는 피부가 편안해질 거라는 것을 알기에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포장된 도로를 내려서니 무성한 잡초들이 아침이슬을 머금고 있는 촉촉한 흙길입니다. 정형이 잘된 아스팔트길에서 느끼는 걸음 맛이 밋밋함이라면, 작은 돌들조차 그대로 드러나 있어 울퉁불퉁하기까지 한 흙길을 걸으며 맛보는 걷는 맛은 산해진미에 진수성찬입니다.

뾰족한 돌을 밟았을 때 발바닥이 맛보는 맛은 매운맛이고, 기울어진 돌을 밟아 살짝 미끄러질 때 느껴지는 맛은 새콤하면서 쌉싸래한 맛입니다. 흙살이 두터워 푹신푹신하기까지 한 흙길을 걸을 때 발바닥으로 음미하는 맛은 군침이 돌 만큼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맛입니다.  

 분홍빛 고마리에 앉아 있던 벌레가 '아저씨 어디가요'하고 묻든 빤히 바라봅니다.
분홍빛 고마리에 앉아 있던 벌레가 '아저씨 어디가요'하고 묻든 빤히 바라봅니다.임윤수

그런 흙길을 걷다 보면 발만 포식을 하는 게 아니라 빈 노트처럼 허전하기만 했던 가슴에도 서너 개쯤의 서시가 이러쿵저러쿵한 풍경으로 채워집니다. 가을풍경이 연필을 대신해 마음에 써가는 계절의 서시입니다.

누렇게 익어가고 있는 가을들녘, 다랑논과 뙈기밭을 덧대 한 땀 한 땀을 꿰맨 가을들녘은 논두렁과 밭두렁으로 이어져 커다란 들판이 되어 펼쳐집니다.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시작한 가을 산책은 어느새 가을 들녘을 뛰노는 메뚜기의 마음입니다.

이쪽으로 펄쩍 뛰니 분홍빛 고마리꽃이고, 저쪽으로 펄쩍 뛰니 가을의 진미라고도 하는 쑥부쟁이꽃밭입니다. 쑥부쟁이 꽃을 더듬고 있는 노랑나비, 고마리꽃에 집적거리고 있는 잠자리에 눈길이 잡혀 걷던 발걸음을 멈춰섭니다.


 고마리를 더듬고 있는 곤충
고마리를 더듬고 있는 곤충임윤수

쑥부쟁이에 앉아 있는 노랑나비에 마음 줄이 걸렸습니다. 머지않아 기온이 더 떨어지면 어찌 살 것인가가 걱정입니다. 걱정스런 마음에 한참을 바라다보고 있노라니 노랑나비가 촉수로 더듬고 있는 건 단순한 화분이 아니라 쑥부쟁이꽃에 담긴 슬픈 전설이었습니다.

대장장이의 큰딸, 쑥 나물을 뜯던 '쑥부쟁이'


가난한 대장장이(불(부)쟁이)의 딸로 태어나 어린동생들을 위해 쑥을 캐러 다녀야 했기에 붙은 '쑥부쟁'이란 별명,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를 구해주고, 노루를 쫓다 멧돼지를 잡는 함정에 빠진 사냥꾼, 박재생의 아들마저 구해준 불쟁이의 큰딸 쑥부쟁이.

'이 다음 가을에 꼭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떠난 사냥꾼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쑥부쟁이. 노루가 가져다 준 세 개의 구술 중 하나를 사냥꾼을 만나기 위해 사용하지만 그렇게 오매불망하던 사냥꾼은 이미 결혼을 하였고, 자식을 둘이나 둔 처지여서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되어버린 비련의 주인공 쑥부쟁이.

 고추잠자리라서 그런지 노랑나비만큼 안타까운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고추잠자리라서 그런지 노랑나비만큼 안타까운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임윤수

세월이 흘러도 가슴에 묻어 둔 사냥꾼 때문에 결혼조차 할 수 없었던 쑥부쟁이. 동생들을 보살피고, 사냥꾼만을 그리며 이산 저산을 돌아다니며 쑥나물을 뜯으며 애틋한 나날을 살아가는 쑥부쟁이.

그러던 어느 날,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떨어진 쑥부쟁이는 죽었고, 쑥부쟁이가 떨어져 죽은 그 자리에 더 많은 쑥나물이 무성하게 자라났으니 쑥부쟁이는 죽어서까지도 동생들의 주린 배를 걱정했기에 이렇게 많은 나물이 돋아 난 것이라고 하며 그 꽃조차 쑥부쟁이라고 불렀다는 동네사람들의 마음이 만들어 낸 전설을 더듬는 듯 보였습니다. 

고추잠자리도 가을꽃을 더듬고, 이름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곤충도 가을꽃에 머물고 있었지만 눈길이 멈추고 마음이 쏠리는 것은 쑥부쟁이꽃을 더듬는 노랑나비에 유독합니다.

 같은 나비지만 노랑나비만큼 '어쩔거나?'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같은 나비지만 노랑나비만큼 '어쩔거나?'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임윤수

머지않아 닥쳐올 추위에 움츠러들거나 멈춰버릴 노랑나비의 날갯짓을 상상하는 허무함, 발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흙길의 포근함마저도 윤회의 수레바퀴에 달린 톱니바퀴가 덜컹하고 넘어가는 계절의 뒤안길쯤으로 기억하렵니다.   
#쑥부쟁이 #고마리 #노랑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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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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