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태양은 저물지 않을 것이다

알렉스 쉬어러의 장편동화 <13개월 13주 13일 보름달이 뜨는 밤에>

등록 2008.10.08 10:10수정 2008.10.0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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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월 13주 13일 보름달이 뜨는 밤에> 표지 ⓒ 책과콩나무

<13개월 13주 13일 보름달이 뜨는 밤에> 표지 ⓒ 책과콩나무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노약자 전용 좌석'을 볼 수 있다. 버스에는 출구 주변 좌석이, 지하철에는 각 전동차 구석자리가 바로 그렇다. 눈에 확 띄게 강조되어 있거나, 아니면 격리되어 있거나. 좋은 의도임에 틀림없지만 이것은 때때로 그들을 사회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이 된 것이 아닐까. 마치 '건드리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 멀찍한 간격이 그들에게 마냥 행복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노인복지정책이나 시설이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닐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다.

 

그들은 여전히 까마득하게 어두운 골목길을 홀로이 걷고 있다.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늙고 병들지만, 누구나 다 노인이 되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늙어간다는 것은 점점 주변부로 밀려난다는 쓸쓸함을 동반한다.

 

마모되었거나 소모된 이들은, 젊음이 소진된 그 존재들은 그저 생산라인의 마지막 벨트에서 추락만을 기다려야 한다. 사회의 모든 요소는 젊음과 열정을 위해 달려간다. 성형이나 그 어떤 조작도 영원한 젊음과 생명을 가져다줄 수는 없다.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신체조직은 때가 되면 퇴화되기 마련이다.

 

아이의 눈을 통해 들여다 본 노인들의 삶과 이야기

 

장편동화 <13개월 13주 13일 보름달이 뜨는 밤에>의 주인공 칼리는 빨간 머리에 주근깨를 가졌고, 약간은 통통한 평범한 열두 살 소녀다. 노는 시간 대부분을 한쪽 구석에서 홀로 보내는(14쪽) 칼리는 어느 날 전학 온 메르디스라는 아이에게 흥미를 갖게 되는데, 그는 수업이든, 놀이든, 친구든 관심이 통 없는 이상한 친구였다.

 

그러다 칼리는 메르디스와 단 둘이 산다는 할머니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실은 자신이 메르디스고, 그레이스라는 마녀가 자신의 몸을 빼앗아 대신 자신의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 게다가 마녀가 아이의 몸에서 '13개월 13주 13일'을 보내고 나면 영원히 그 육체의 주인이 된다며 메르디스는 칼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때부터 칼리는 믿기 힘든 놀라운 일들을 겪게 된다.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육체 교환(물론 마녀에 의한 강제적인)이다. 수백, 수천 년을 살아왔을 마녀는 그동안 육체를 바꿔가며 젊음을 유지해왔고, 칼리 앞에 선 메르디스 역시 바로 그 열망에 의한 피해자다. 하지만 마녀가 전혀 아이답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젊음이 비단 육체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무엇보다 정신자체가 수백, 수천 년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장편동화에 등장하는 마녀는 외모 성형에 대한 풍자적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무리 젊고 싱싱한 외모를 가지고 있더라도, 정신이 노회하다면 그것을 젊다고 정의내릴 수는 없다는 것.

 

반면 아이는 졸지에 노인의 육체를 갖게 된다. 늙고 병들어 한 걸음 떼는 것도 힘겨운 그 몸속에서 아이는 비로소 늙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노인이 세상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얼마나 힘든지를 깨닫는다.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때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준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려 준다. 우리는 모두 나이를 먹고 결국 약해진다는 사실. 어느 누가 그런 일을 떠올리고 싶겠는가?"(32쪽)

 

아이는 노인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피하고 싶은 존재로 여겼다. 하지만 원치 않게 노인의 육체를 가지게 되면서 아이는 비로소 그들이 일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장애물과 마주치는지 깨닫게 된다. 빠르게 가라고 강요하는 사람들, 사회 속에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뒤처진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는다. 한때 뜨거웠던 정오의 태양을 그리워하며, 이따금씩 기억을 끄집어내어 젊은 날을 추억한다.

 

이 장편동화는 여기에 치매라는 소재에도 접근한다. 노인의 몸을 갖게 된 아이가 주위 사람들에게 처지를 설명하고 하소연도 해보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노인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드디어 갈 때가 됐다고 믿는 어른들은 그를 요양원이나 고립된 공간으로 보내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죽음의 그림자에서 잠시나마 해방감을 맛본다.

 

덕분에 외진 곳에 격리되어버린 그들은 극한의 외로움과 마주한다. 노인이 죽고 나면 자식들에게 남겨줄 돈을 위해 보험에 가입하라고 광고하는 이 '세상'은 그들에게 맞는 정책이나 진실한 마음을 갖기 보다는 형식적인 조치에 급급하다. 어쩌면 세상은 늙었다는 것을, '노인'이라는 존재를 죽음으로 가는 징검다리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산라인 벨트는 끊임없이 돌아가고, 공장에서는 끊임없이 사회가 요구하는 새 인간들이 제조되는 법이니까. 삶을 거의 다 소진한 존재들은 죽음이라는 다음 단계로 내몰리는 법이고, 공장과 기계는 이들을 돌보지 않는다. 막 태어난 존재들에 애정을 쏟는 것이 더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탄탄한 플롯과 발랄한 상상력 돋보이는 매혹적인 동화

 

<13개월 13주 13일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영국 동화작가 알렉스 쉬어러의 작품으로 탄탄한 플롯을 가졌다. 명확한 선악구도와 친절한 설명을 바탕으로 자신의 가야할 길을 거침없이 내달린다. 또한 작품 곳곳에 반전이 숨겨져 있어 흥미진진하고, '노인문제'라고 하는 주제의식을 상당히 창의적으로 다루고 있다. 의학 발전으로 인해 수명 연장이 실현되고 있는 요즘, 아이들에게 쉽지 않은 주제의식을 재미와 함께 전해줄 만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 작품을 보게 되면 실제 주변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떠올리게 된다. 한참이나 뒤처진 발걸음, 가끔씩 보이는 이상한 행동과 기억의 소멸. 사람들은 그걸 '치매' 증세와 유사하다고 부른다. 하지만 소설 속 화자는 그런 그들이 실은 순수하고 동심으로 가득한 젊음을 간직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충고한다. 늙어간다는 것, 그리고 '치매'라는 현상에 대해 발랄하면서도 귀여운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모든 할머니들의 마음속에는 친구들을 부르는 날씬하고 예쁘고 생기발랄한 여자 애가 있을 수 있다. 모든 할아버지들의 마음속에도 발에 스케이트보드를 단 남자 애가 있을 수 있다."(349쪽)

 

작가는 젊다고 하는 것은 비단 육체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마녀가 젊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차갑게 식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열두 살 아이들은 할머니로 바뀌는 마법에 걸렸으면서도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처럼.

 

세상의 모든 사물과 존재에 촉수를 내미는 순수한 동심은 결국 마녀가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현실을 살아가는 주변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내미는 작은 위안이기도 하다. 작가는 아직 지지 않았다고, 정오의 태양은 이따금씩 명멸하다가도 다시금 뜨겁게 타오를 것이라고 어깨 톡톡 두드리며 위로를 건넨다. 어서, 이 손을 잡으라는 듯.

2008.10.08 10:10 ⓒ 2008 OhmyNews

13개월 13주 13일 보름달이 뜨는 밤에

알렉스 쉬어러 지음, 원지인 옮김,
책과콩나무, 2008


#장편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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