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도 모르는 새에 제게 있어서 누구보다도 큰 존재가 돼 있었던 거죠 .. <푸른 하늘 클리닉 (8)>(카루베 준코/최미애 옮김, 학산문화사, 2006) 31쪽
“제게 있어서”는 “저한테”나 “저로서는”으로 고쳐 줍니다. “있었던 거죠”는 “있었지요”나 “있었더군요”로 손봅니다.
┌ 누구보다도 큰 존재가 돼 있었던
│
│→ 누구보다도 큰 기둥이 돼 있었던
│→ 누구보다도 큰 사람이 돼 있었던
└ …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낱말이며, 어디에서나 흔히 듣는 낱말 ‘존재’입니다. 우리 말 운동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라는 낱말은 너무 두루뭉술할 뿐더러 알맞지 않다고 느껴서, 저는 이 낱말을 안 쓰고 있습니다만, 제 둘레에서는 이 낱말에 담는 뜻과 느낌이 아주 크다고 느끼시는지 좀처럼 이 낱말을 떨구어 내지 않으십니다. 아니, 떨구어 내야 할 까닭을 못 느끼실 테고, 안 느끼실 테지요.
그런데, 제 둘레에서 아이들은 이 낱말을 안 씁니다. 동네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이 낱말을 안 씁니다. 여든을 넘긴 헌책방 할아버지도, 일흔을 넘긴 헌책방 할머니도, 예순을 넘긴 헌책방 할아버지도 “나 같은 사람은” 하고 말씀할 뿐, “나 같은 존재는” 하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구멍가게 할아버지도, 마트에서 짐 나르는 아저씨도, 우체부 아저씨도, 중국집 아주머니도 ‘존재’라는 낱말을 섞어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아직 못 보았습니다.
┌ 큰 밑돌이 돼 있었던
├ 큰 디딤돌이 돼 있었던
├ 큰 버팀나무가 돼 있었던
├ 큰 언덕이 돼 있었던
└ …
기자라며 이름쪽을 내미는 분들이 찾아와서 여쭙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헌책방의 존재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빙그레 웃으며 대꾸합니다. “그런 어려운 말은 모르겠고요, 헌책방이 오늘날 왜 있어야 하느냐면 …….”
해마다 하루, 한글날을 앞두고 사람들은 이야기를 합니다. 한글이 얼마나 훌륭하고 우리 말이 얼마나 어지러워지고 있는가 하고. 그러나 다른 기림날과 마찬가지로, 한글날에도 꼭 하루만 한글과 우리 말을 잠깐 겉스침으로 돌아볼 뿐, 다른 삼백예순나흘은 한글도 우리 말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나라깃발을 대문간에 내건다고 하여 한글을 기리는 일이 아니건만, ‘글쓰기 완전정복’이나 ‘논술강좌’ 같은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다고 자기 말과 글을 살릴 수 있지는 않건만,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길로만 걸어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헌책방을 헌책방 그대로 바라보면서 언제나 즐겨찾고 어느 때이든 자기 마음밭을 살찌우는 책 하나 곱게 껴안으려는 매무새가 없기 때문일까요. 헌책방이 자기 삶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헌책방이 우리 마을을 어떻게 가꾸어 주고 있는가를 몸으로 느끼지 않을까요.
어쩌면, ‘말 다듬기 = 말 가꾸기’요, ‘말 가꾸기 = 삶 가꾸기’임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시험성적 높이는 논술공부만 하는 데다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처세에 매여서 ‘글쓰기 완전정복’을 노리고 있기 때문일까요. 말을 말 그대로 볼 줄 모르고 글을 글 그대로 껴안으려 하지 않으니, 한글이 어떤 글이고 우리 말이 어떤 말인지를 마음속 깊이깊이 못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 큰 어른이 돼 있었던
├ 큰 품이 돼 있었던
└ …
다 안다고들 말합니다. 요사이는 텔레비전과 인터넷 영향을 받아서 사람들 말투가 많이 바뀐다고. 그러나 다 알고들 있다고 하면서 좋게 영향을 받으려고 마음을 기울이는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다 안다고들 하지만 얄궂게 영향을 받아 자기 말씨와 마음씨가 짓궂게 물드는 모습을 다독이거나 추스르거나 걸러내는 분들을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처음에는 지식인들만 그렇게 어설픈 번역책 말투에 찌들고 길든다고 느꼈습니다. 이제는 지식인뿐 아니라 여느 이웃들마저도 텔레비전 연속극 영향이 뼛속 깊이 파고들어서 어찌하지 못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우리 세상에서 이론과 지식도 틀림없이 크고 쓸모가 있습니다만, 초중고등학교 교사를 뽑는 자리에서 시험성적만으로 교사를 가리는 일이 우리 아이들을 얼마나 벼랑으로 내모는 일인가 싶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아이들과 어떻게 마주하는지, 아이들한테 어떤 말로 이야기를 건네는지, 아이들 마음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아이들하고 얼마나 오랜동안 부대끼면서 마음동무가 되는 매무새인지를, 시험성적 못지않게 또는 시험성적보다도 더 크게 살피고 돌아보고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이란, 말로 가꾸는 문화란, 말로 뿌리내리는 삶이란 무엇일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말이란, 우리 말로 가꾸는 우리 문화란, 우리 말로 뿌리내리는 우리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를 곱씹어야 합니다. 말을 쓰는 우리들은 어떤 자리에 어떻게 서 있는지, 문화를 즐기거나 누리거나 가꾼다는 우리들은 누구와 함께 어느 곳에 서 있는지, 하루하루 애틋하고 고마운 삶을 보내는 우리들은 둘레에 누구를 이웃과 동무로 두면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놀이를 즐기는지 하나하나 돌아보아야 합니다.
┌ 저도 모르는 새에 저한테 누구보다도 큰 마음언덕이 돼 있었어요
├ 저도 모르는 새에 재개 누구보다도 큰 힘과 믿음이 돼 주셨더군요
└ …
값싸게 사서 쓰다가 버리는 모든 물건은, 우리 손을 떠나면 쓰레기가 됩니다. 우리 눈앞에서는 사라지고 우리 마음에서는 잊히지만, 우리 땅 한 구석을 더럽히고 우리가 마시는 물과 공기를 나쁘게 합니다. 100원짜리 작은 빵을 싸고 있던 조그마한 비닐봉지라 해도, 30원쯤 값할 사탕을 싸고 있던 작은 비닐봉지라 해도, 이 비닐봉지 하나는 우리 손을 떠나는 바로 그때부터 쓰레기입니다. 요 조그마한 쓰레기 하나가 모여서 지난날 난지도를 이루었고, 우리가 냇물을 손으로 떠서 마실 수 없도록 더럽혔습니다.
크게 생각하지 않고 읊는 낱말, 그다지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내뱉는 낱말 하나가 모이고 또 모여서 우리 말 문화를 이룹니다. 우리 말 문화는 누가 보아도 그지없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누가 보아도 그예 더럽고 못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우리 말 문화는 다름아닌 우리 스스로 이루어 낸 모습입니다. 누가 무너뜨린 우리 말이 아닙니다. 일제강점기 때처럼 이웃나라에서 쳐들어와서 망가뜨려 놓은 우리 말이 아닙니다.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우리 스스로, 값싼 셈속과 돈에 눈이 어두운 우리 스스로 무너뜨리고 망가뜨리고 갉아먹고 깎아내리고 내팽개치면서 지금 모습대로 빚어 놓은 우리 말이요 우리 문화입니다.
‘존재’라는 낱말 하나 그대로 붙잡고 쓴다 하여 우리 말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일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존재’라는 낱말을 붙잡고 있는 분들이 가꾸는 우리 말과 문화와 삶이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합니다. 우리 말과 문화와 삶을 지금 어떻게 돌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8.10.08 11:42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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