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멋부리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책이름 되짚기 9] 삶은... 여행, 이상은 in Berlin

등록 2008.10.08 17:56수정 2008.10.0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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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 서서 책을 한 권 들여다봅니다. 낯익은 이름이 보여서 선뜻 집어듭니다. 촤라락 하고 책을 죽 훑습니다. 괜찮은가? 괜찮나? 마음에 들면 몇 군데 콕콕 집으면서 읽고,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제자리에 얌전하게 내려놓습니다. 몇 대목을 읽으면서 마음 한구석을 건드리는 무엇인가 있다면 머리말을 살피고 차례를 돌아보고 한두 꼭지를 더 살핍니다. 이렇게 하면서 이끌리는 무엇인가 있을 때 비로소 주머니를 뒤적여 돈이 얼마 있는가를 헤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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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책이름 하나 좀더 멋드러지게 붙이고픈 마음은 알겠지만...... 그러고 보면, 이 책을 낸 출판사는 '문학동네'인데, '북노마드'라는 영어 이름을 구태여 따로 쓰면서, "'북노마드 booknomad는 (주)문학동네의 '여행' 부문 임프린트입니다" 하고 판권에 적어 놓고 있더군요. ⓒ 북노마드

노래하는 이상은 님 책 <삶은… 여행, 이상은 in Berlin>은 이렇게 해서 만났습니다.


 ┌ 베를린에서
 └ in Berlin

그러나, 책을 처음 살 때 퍽 망설였습니다. 멋인지 치레인지 껍데기인지 종잡기 어려운 책이름 한 대목 때문입니다. 수수하게 말하지 못하고 그예 덕지덕지 꾸미고야 만 책이름 한 자락 때문입니다. 당신 삶이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준다기보다 겉으로 뽐내고야 마는 책이름 한 귀퉁이 때문입니다.

 ┌ 이상은 in Berlin
 │
 ├ 베를린에 머문 이상은
 ├ 베를린을 밟은 이상은
 ├ 베를린을 만난 이상은
 ├ 베를린을 안은 이상은
 ├ 베를린을 사랑한 이상은
 └ …

서울에서 살던 이야기를 글로 쓸 때에도 'in Seoul'처럼 적을는지 궁금해집니다. 제주섬 나들이를 한 다음 글을 쓸 때에도 'in Jeju'처럼 적으려나 궁금합니다.

그러고 보니 베를린은 독일땅인데, 독일땅을 밟았으면 독일말로 적어 주지 영어로 적어 놓았군요. 하긴, 네덜란드를 밟는다고 네덜란드말로 적어 줄 사람은 없고, 포르투갈을 나들이했다고 포르투갈말로 적어 놓을 사람은 없을 테지요. 우리 나라에는 폴란드가 폴란드말을 쓰고 헝가리가 헝가리말을 쓰며 버마가 버마말을 쓰고 티벳이 티벳말을 쓰는 줄 아는 사람이 아주 드뭅니다.


어느 나라 어느 겨레나 제 나라말이 있고 제 겨레말이 있습니다. 인천에는 인천말, 전주에는 전주말, 구례에는 구례말이 있습니다. 볼리비아에는 볼리비아말, 칠레에는 칠레말, 몰타에는 몰타말이 있어요. 지금 이 여러 나라들이 유럽 나라가 쳐들어오게 된 뒤부터 제 나라말과 제 겨레말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예부터 고유하게 이어온 문화와 넋마저 빼앗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많은 곳에서 빼앗겼고, 많은 곳이 짓밟혔으며, 많은 곳은 자취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만, 과테말라에는 과테말라 삶이 있고, 브라질에는 브라질 삶이 있으며, 필리핀에는 필리핀 삶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는 우리 문화가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았는가요. 끔찍한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반 식민지가 되어 경제와 사회와 문화와 정치 모두 미국한테 매이면서 우리 넋과 얼을 우리 나름대로 가꾸는 일이란 하나도 못하게 되었나요.


돌아보면, 일제강점기로 짓눌리기 앞서도, 우리 땅을 다스렸다고 하는 분들은 중국을 우러르고 섬기고 받들고 모시고 하면서 우리한테 남다르게 있던 삶을 북돋우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발디딘 문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 땅 여느 사람들, 낮은자리에서 조용히 땀흘리며 땅을 일구던 사람들 삶자락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서민들 막사발을 대단한 문화재로 여기기도 하지만, 서민들 옷차림을 되살리는 일이란 없고, 언제나 임금님 옷차림만 되살립니다. 서민들 밥상을 되살리는 역사란 없고, 언제나 임금님 수라상만 갖고 떠듭니다.

 ┌ 삶은 떠남 …, 이상은이 밟은 베를린
 ├ 삶은 나들이 …, 베를린에서 사랑한 이상은
 ├ 삶은 길나섬 …, 베를린에서 이상은
 └ …

어느 한 곳에 눌러앉아서 떡고물만 챙기려는 노래꾼이 아닌 이상은 님이라면, 어딘가 돈방석 하나 챙겨들어 룰루랄라 탱자탱자 지내려는 노래쟁이가 아닌 이상은 님이라면, 이냥저냥 눈치레 겉치레 입치레 말치레로 무늬놀이만 하려는 노래장사가 아닌 이상은 님이라면, 당신이 애써 떠나서 만난 사람과 땅 이야기를, 한 번 더 삭여서 돌아보아 줄 수 있지 않았으랴 생각해 봅니다. 조금 더 곱씹고, 다시금 뒤돌아보면서, 가만가만 이야기를 펼칠 수 있지 않았나 헤아려 봅니다.

인천땅 배다리에서 몇 글자 끄적입니다. 베를린에서 여러 날 보내며 좋은 느낌 듬뿍 받으셨다는 이상은 님한테.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책이름 #우리말 #영어 #한글날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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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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