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가, 은빈아! 우리 또 만나자

등록 2008.10.10 08:51수정 2008.10.10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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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은빈이를 마지막으로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아 그런데 은빈이가 누구냐구요? 은빈이는 바로 저희 성내동 본가 옆건물에 있는 조그마한 제과점집 딸아이 입니다. 초등학교 일학년짜리 여느집 애들과 다름없는 조금은 평범하지만 총명하고 예쁜 아이입니다.


동네에서 우리 갓난쟁이 아이를 업고 있는 어머니를 보고서 "아 갓난장이 애다" 그러면서 반가워 하는 것을 성내동 어머님이 집에 데려다가 먹을것도 같이 먹고 아이도 같이 보게 하면서 친하게 된거죠. 저도 우리 아들을 귀여워 해주는 그 아이가 너무 고마워 뭐 해줄게 없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집에 가끔 놀러오며 어머니와 대화하게 되고 그걸 들은 아내가 제게 이야기 전해주고 그러면서 그 집사정을 좀 알게 됐습니다. 성내동에 가게를 연 지 꽤 되는 그 집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제과점을 운영하면서 가까운 풍납동에 사는 아주 부지런한 분들이었습니다. 가게는 옆에 브랜드제과점이 몇 개씩이나 생기면서 잘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은빈이는 학교에 갔다오면 하루종일 어머니와 빵집에 있는 것 같았고 그건 휴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중에 피아노 학원에 다닌다는 걸 알았지만, 왠지 가게에 하루종일 있는 그아이를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곤 했습니다. 아이가 가지고 노는 알파벳 장난감이 있는데 아직 알파벳은 모르더군요. 아내 말로는 요즘 아이들 학교 갈 때쯤에 알파벳은 다 안다고 하던데 그 아이는 아직 영어학원에 다니지 않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집 사정을 전해들은 처형은 처조카가 입던 브랜드 옷을 모아 보내주었습니다. 은빈이 엄마가 혹시라도 기분상해 할까 했는데, 너무 기뻐하시면서 좋은 옷 입히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하셨다군요.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저도 빵을 자주 사 아침에 동료들에게 돌리고는 했죠. 뭐 별도움은 안 되었겠지만, 은빈이를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는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간의 보증금에 많은 돈을 주고 월세로 운영하는 빵집은 정말 쉬는 날도 없고 밤늦게까지 열려 있습니다. 제가 아침에 회사갈 때도 열려 있고, 밤늦게 야근하다가 열 한시쯤에 들어가도 열려있고요. 그 옆가게는 일년간 비어 있었다는데, 가게가 나가지 않아도 절대 세를 안 깎아 준다는 게 그 집주인 방침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게를 깎아주면 옆집도 깎아 주어야 한다고. 정말 너무하지요.


그 집에 터전을 잡고 있는 다른 가게들도 비싼 월세를 감수하고 있는 거였죠. 그런데 얼마전에 은빈이네가 이번달 중순에 가게문을 닫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세가 또 오르기도 하고, 장사도 잘 안돼서 일단 폐업을 한다는 거지요.

유난히 자영업자가 많은 동네여서 가게 생기고 없어지는 게 다반사로 일어나지만 제가 알고 있는 분들이 그런 상황이 된 게 많이 우울합니다. 가장 문제는 가게를 닫고 난 후 아무계획이 없다는 겁니다. 또 다른 가게를 열 자본도 없고, 다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 자영업자가 선진국에 비해 과도하게 많고 그래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자연스럽게 동감하고, 무너져 가는 자영업자에 대한 기사를 건성건성 읽던 제가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놓인 사람들을 흡수할 아무 대안도 없으면서 구조조정 운운하는 경제학자나 정책 입안자들이 과연 이런 상황을 접해보기나 했을까요?

오늘도 본가로 들어가야 되는데 얼마 남지 않는 빵이라도 사서 내일 아침에 동료들에게 돌려야겠습니다.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요. 은빈이가 앞으로 어느 동네에서 어떻게 살게 될지 모르지만, 우리 아이와의 인연도 그리 오래 지속될 순 없겠죠. 앞으로 어딜 가서라도 밝고 건강하고 교육 잘 받으면서 살았으면 합니다. 잘가 은빈아. 우리 짱이 앞으로 볼 때 지금처럼 귀여워해줘.
#자영업 #성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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