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고 낯익어서 슬픈 풍경

공선옥 소설집 <명랑한 밤길>

등록 2008.10.13 15:54수정 2008.10.13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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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책표지 공선옥

책표지 공선옥 ⓒ 이명화

▲ 책표지 공선옥 ⓒ 이명화

“내 글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나는 내 흔들리는 초상을 본다... 나는 확실히 화려한 정원에서 보호받고 주목받는 꽃과는 인연이 먼 사람임이 분명하다. 나는 다만 그들이 눈에 잘 띄지 않는 바람 부는 길가에서나마 피었다 지고 피었다 지고 하면서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만이 부를 수 있는 작고 고운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작가의 말 중)

 

공선옥 소설집 <명랑한 밤길>은 작가의 삶과 그 주변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들풀처럼, 들꽃처럼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어도 피고 지는 소외된 자들의 삶, 변방의 삶의 이야기들이다. 공선옥의 소섭집에 실린 작은 소설들은 결코 ‘명랑’할 것 같지 않은, 생의 화려한 무대위의 삶이 아니라 소외되고 서글프고 상처 입은 사람들의 삶이지만, 애써 ‘명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 주인공들은 모두가 불안한 가족이거나 재혼한 가정, 남편이 죽거나 위태로운 가족, 실패한 사랑, 거짓된 사랑 등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명랑한 밤길’에서 시골처녀 주인공 ‘나’는 소설 쓴다는 남자한테 반한다. 사랑의 환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주인공,

 

“나는 나의 스물한 살 봄밤을 그와 함께 먼먼 나라, 그가 없으면 닿을 수 없는 나라를 여행하는 것만 같았다. 그가 있어야만 닿을 수 있는 나라를 여행하는 것은 그래서 슬펐다. 아름답고 슬프고 쓰라린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이번에는 낯익고 낯익어서 슬픈 풍경과 맞닥뜨려야만 했다. 엄마는 나를 기다리며 먼지 푸석푸석한 마당에서 밤중 내맴을 돌았다.“

 

남자의 거짓 사랑에 속고 내침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 비 오는 밤길에서 주인공 ‘나’는 그 순간에도 악을 쓰듯 슬프게 명랑하게 희망한다.

 

"나는 빗속에서 악을 섰다.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나는 노래를 불렀다. 저기, 네팔의 설산에 떠오른 달이 보인다. 나는 달을 향해 나아갔다. 비를 맞으며 천천히, 뚜벅뚜벅, 명랑하게.“

 

공선옥 소설집 <명랑한 밤길>에는 ‘꽃진 자리’로부터 ‘영희는 왜 우는가’, ‘도넛과 토마토’, ‘아무도 모르는 가을’ 등 총 12개의 소설이 담겨 있다.

 

현대사에 큰 상처의 자국으로 남아있는 5.18과 관련 있었고, 이혼 후 생계에 대한 공포 속에서 아이들을 광주시립임시아동보호소에 맡기고 절의 식모살이를 살아보기도 했던 작가, 달동네를 전전하며 재봉일로 아이들과 입에 풀칠을 하기도 했던 작가는 지금은 하루에 버스가 네 번 들어오는 한 시골의 폐교를 집을 삼고 닭도 치고 채소도 일구며 살고 있다고 한다.

 

공선옥 작가의 소설은 어쩔 수 없이 작가 자신의 삶의 발자국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작가의 삶의 흔적, 그 삶의 지문에 묻어난 글들은 소설 속에서 이따금 발견한다. ‘어린아이가 딸린, 이 세상에 기댈 데 하나 없는 여자에게 궁핍한 삶은 참으로 사나운 것이었다. 궁핍이 물어뜯고 할퀴고 간 자국은 견디기 힘든 쓰라림이었다.’(‘도넛과 토마토’ 중)라든가, ‘불로 덴 혀로 왕소금을 씹어 삼키는 것 같던 나날들...’,

 

‘문희는 소설가와 국어선생님의 꿈을 접고 일직이 열일곱 시절부터 공장엘 가야했다. 그러나 꿈이란 마음속이라는 화로에 숨어 있다가 언제든지 기회만 오면 활활 타오를 수 있는 불씨 같은 것’, 등에서 작가의 삶의 지문이 드러나는 것을 본다. 작가의 말대로 작가의 운명이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소설 속에 작가의 삶 또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보다.

 

그녀 말대로 작가 자신이나 소설 속에 나타난 주인공들이나 ‘확실히 화려한 정원에서 보호받고 주목받는 꽃과는 인연이 먼 ’사람들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바람 부는 길가에서나마 피었다 지고 피었다지곤 하는 그들의 삶과 그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그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있다. ‘불에 덴 혀로 왕소금을 씹어 사미는 것 같은 나날들’이 있어도, 그래도, 그래도 말이여, 살아볼 만한 것이여~’라고 말하는 듯 하다.

 

1963년 전남 곡성 출생, 1991년 재봉질하며 틈틈이 쓴 단편소설 <씨앗불>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공선옥 소설가는 우리 주변의 소외된 자들의 삶에 따뜻한 온기와 희망을 불어넣는 소설을 쓰고 있다. 소설집으로 <피어라 수선화>, <내 생의 알리바이>, <멋진 한 세상>, 장편소설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 <시절들>, <수수밭으로 오세요>, <붉은 포대기> 등 다수가 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리겠는가

어머님 보고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빡란 감 바람 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의 시 '가난한 사랑의 노래' -

2008.10.13 15:54ⓒ 2008 OhmyNews

명랑한 밤길

공선옥 지음,
창비, 2007


#공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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