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진주만 기습과 루스벨트의 선전포고

[김갑수 역사팩션 135] '열두 개의 눈동자 편'

등록 2008.10.15 08:47수정 2008.10.15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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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강 언덕의 임수경

임수경은 허드슨 강 언덕의 벤치에서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외국에서 황혼을 맞이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그 시간의 자연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서, 마음은 오히려 황폐할 정도로 외로워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지나치면 병과 흡사했다. 아까부터 임수경은 지독한 향수로 자리를 뜰 줄 모르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뉴저지가 있었고 왼쪽으로는 맨해튼 섬이 보였다. 강물은 뉴저지와 맨해튼 사이에서 석양을 되쏘며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부터 어린 시절의 서울 북촌과 남산과 한강 등을 눈에 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동생이 눈물겹도록 보고 싶었다. 물론 죽은 어머니는 하루도 생각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녀는 어제 연구소로 찾아온 베어드 소령을 떠올렸다. 베어드는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태도와 눈빛에는 신실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백인 남자가 싫었다. 특히 앵글로 색슨은 그녀가 질색하는 종족이었다. 차라리 흑인들에게는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끼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백인들에게서는 인간미를 찾기가 어려웠다.  

베어드는 한사코 임수경을 만나고 싶어 했다. 그는 조선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조선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한 것 같았다. 그는 한국말도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임수경은 한국인 중에 베어드처럼 자기를 좋아해 줄 남자만 나타난다면 금세라도 그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인 남자 친구만 있다면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 품에 안기고 싶을 정도로 외로움에 빠져 있었다.

미풍이 그녀의 콧날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바람을 타고 오는 구수한 토스트 냄새를 맡았다. 저녁인데도 어디선가 빵을 구워 먹는가 보았다. 그녀가 유일하게 친해질 수 있었던 미국 음식은 버터를 조금 바른 토스트였다. 그녀는 짙은 향수 속에서 강렬한 식욕을 느꼈다.

이제 그녀는 고향 땅과 가족보다는 고향의 음식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된장과 고추장과 청국장을 떠올렸다. 상추쌈과 호박잎과 오이소박이 등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녀는 떡국과 국수와 굴비를 그려보며 입맛을 다셨다. 쇠고기 무국에 김장 겉절이를 생각하게 된 그녀의 목에서는 무심결에 꿀꺽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먹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우스웠다. 그녀는 얼마 전 미국 물리학자들의 모임에서 오간 얘기들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원자폭탄의 위험성을 거론할 때가 아닙니다. 적이 먼저 폭탄을 개발할 경우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는 시간과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효율적으로 일을 추진하려면 미국 대륙에 흩어져 있는 우라늄 연구자들을 한 곳에 모아야 합니다."


진주만 기습 이후 미국 내 물리학자들은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국 내 7,000명 정도로 추산되는 물리학자 중에서 4분의 1정도가 우라늄 연쇄 반응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제각기 흩어져 느슨하게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중 전쟁에 돌입하게 되자 정부와 학자들은 순식간에 의기가 투합하여 원자폭탄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었다.

아마도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몇을 고른다면, '크리스마스'나 '오케이'나 혹은 '벅큐' 등이 되겠지만, 그보다도 더 좋아하는 단어는 단연 '리멤버'일 것이다. 미국인들은 1836년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엘라모를 기억하라 Remember the Alamo!'라고 했고,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 때에는 '메인 호를 기억하라 Remember the Maine!'고 외쳤다.

그러나 '진주만을 기억하라' 만큼 미국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리멤버'는 일찍이 없었다. 그것은 일본의 공격이 국제법에 명시된 선전포고조차 없는 기습이었고, 세계 제일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미국의 자존심에 대한 전면 도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미국인들은 반일감정이 생길 때 진주만을 '리멤버' 하자고 말하고는 한다.

루스벨트의 선전포고문

진주만 기습 다음날 미국의 루스벨트는 의회에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청하는 연설을 했다.

"어제, 우리가 앞으로 치욕으로 간주하며 살아가야 할 1941년 12월 7일에,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해군과 공군에 의해 계획적인 공격을 받았다. 미국은 일본과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의 간청으로 태평양에서 평화 유지를 위하여 일본 정부 및 천황과 여전히 대화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일본의 항공편대가 폭격을 시작한 지 한 시간 후에야 주미 일본 대사와 그 동료가 미 국무장관에게 최근 미국이 일본에 보낸 메시지에 대한 공식 답변서를 전달했다. 그나마 거기에는 작금의 외교 교섭이 무의미하다고 답했을 뿐이지, 전쟁이나 무력 공격에 관한 위협이나 암시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일본과 하와이의 거리를 생각할 때, 공격은 며칠 또는 몇 주 전에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으로 명백하게 기록될 것이다. 그동안 일본이 평화를 유지하겠다고 한 성명과 표현들은 미국을 기만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어제 하와이의 섬들에 대한 공격은 미국 해군과 군사력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많은 미국인의 생명이 희생되었다. 게다가 샌프란시스코와 호놀룰루 사이의 공해에서 미국의 선박들은 어뢰 공격을 받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어제 일본은 말레이 반도를 습격했다. 어젯밤 일본군은 홍콩을 습격했다. 어젯밤 일본군은 필리핀을 습격했다. 어젯밤 일본군은 웨이크 섬을 습격했다. 오늘 아침 일본군은 미드웨이 섬을 습격했다. 일본군은 태평양 지역을 기습· 공격한 것이다.

어제의 사실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미국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는 미국 국민들은 이미 여론을 정했다. 육해군의 통수권자로서 나는 우리의 방어를 위하여 모든 조치를 이미 강구하도록 지시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공격의 의미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이 의도적인 침략을 극복하는 데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미국 국민들은 정의의 힘으로 절대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끝까지 지켜야 할 뿐 아니라, 이런 형태의 배신이 다시는 우리를 위협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이 의회와 국민의 뜻을 바로 해석한 것이라고 믿는다.

교전 상태는 존재한다. 우리 군사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함께, 우리 국민의 무한한 결의와 함께, 우리는 필연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신이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나는 12월 7일 일요일, 일본에 의해 비겁한 공격이 이루어진 이래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회가 선포하기를 요구한다."

진주만 기습, "도라, 도라, 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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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다룬 1970년작 영화 <도라 도라 도라>의 한 장면


일본 시각 1941년 12월 8일 새벽 3시 19분, 워싱턴 시각 12월 7일 낮 1시 19분, 하와이 시각 12월 7일 아침 7시 49분, 일본 전투기 편대는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애리조나와 오클라호마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폭격은 2차에 걸쳐 한 시간 반 정도 맹렬히 계속되었다. 일요일 아침 진주만의 미국 함정은 18척이 피해를 입었으며, 300여대의 전투기가 부서졌고 3천 5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국은 일본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공격한다면 전면적인 해상 침공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미군은 레이더에서 일본 전투기들을 포착했지만, 그것을 자신들의 장비 이상이라고 판단하며 우물거렸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일본 비행기들은 우회해서 캘리포니아와 진주만을 연결하는 항로를 타고 진주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1차 공격에서 40대의 공중어뢰폭격기, 43대의 전투기, 49대의 고공폭격기, 51대의 경폭격기를 동원했다. 2차 공격에는 167대의 항공기가 진주만 상공을 종횡했다. 일본 비행대원들은 교전에서 흘리게 될 피를 감추기 위해 빨간 셔츠를 입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 태평양 함대의 대부분을 격침하거나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고 판단했다. 요컨대 기습 공격의 목적을 십분 달성한 것으로 본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어로 호랑이를 뜻하는 '도라, 도라, 도라'라는 무선 암호를 본국으로 타전했다. 공습에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한 보고였을까?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루스벨트 #진주만 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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