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어린이
유혜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저는 인종 차별을 겪은 적도, 상대적으로 가난하다고 느끼긴 했어도 굶주려 본 기억은 없고, 까칠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난 덕에 집단 따돌림을 당한 적도 없고, 몸이 불편하지도 않고, 성 차별다운 성 차별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여러모로 운 좋은 딸부잣집 맏딸입니다.
제 욕심에 능력이 못 미쳐 답답했던 적은 많지만, 그래서 괴로운 날도 많았지만 외부로부터 폭력적으로 밟힌다고 느꼈던 기억은 돌이켜보니 두세 번 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기억들은 공포를 학습하게 하고,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살면서 공포감을 갖게 되고, 이웃을 적으로 느끼는 것처럼 견디기 힘들고 억울하다 못해 비참해지는 일이 또 있을까요?
한국 땅에서 사는 일이 힘들고, 억울하고, 비참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행복한 사회공동체 학교>(휴먼어린이 펴냄)는 아이들에게 우리 사회의 병들고 아픈 곳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주 노동자의 인권, 인종과 민족, 생명과 환경의 위기, 미디어와 인터넷 세상, 가난과 굶주림, 집단 따돌림과 아동 학대, 몸이 불편한 사람들, 성 차별과 성적소수자, 소중한 가족, 외로운 노인들까지. 사회 안전망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생각주머니'를 통해 문제와 대안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구성됐습니다. 아이에게 건강한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고 싶은 부모나 좋은 논술 교재를 찾는 선생님들에게 반가울 이 책에는 제가 헤엄치고 있는 물이 썪어가는 지점 10곳이 지적돼 있습니다.
한국은 'Happy', 중국은 'Gold'행복이 개인적인 영역의 문제라고 방치해 두기에는 개인에게 미치는 사회의 영향이 너무 큽니다. 무인도에 사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이상, 세상과 떨어져 행복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행복으로 정한 제게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레디앙 펴냄)에 나오는 영어 단어 이야기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책을 쓴 목수정과 사는 프랑스인 희완 트호뫼흐는 한국인 여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칼리의 아버지이지만, 법적으로 결혼 절차를 밟지 않고 '시민연대계약'을 한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한국 정부로부터 3개월짜리 관광비자를 받았습니다. 아이와 한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석 달에 한 번 꼴로 주변 국가에 잠깐 나갔다가 들어와야 하는 아버지 입니다.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차례 중국에 다녀온 뒤 그는 한국과 중국에서 자주 본 영어 단어를 말해 줍니다.
한국에서는 'Happy', 중국에서는 'Gold'.
목수정은 지천에 Happy가 장식된 나라지만 '행복은 버석거리는 포장지로만 존재하는 공허한 사기'라고 일갈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갈구하지만, 의도적으로 외치는 표어나 구호처럼 행복이 멀다는 방증일 겁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어요. 그리고 오염된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건강하고 행복할 수 없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 수밖에 없어요. 사회가 병들면 그 속에 사는 사람 역시 행복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도, 사회를 낫게 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의 몫이랍니다.” 이 책의 지은이가 서문에 적고 있는 말들입니다.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 편지 쓰듯 조근조근 풀어 쓴 서문에 지은이들이 왜 이런 책을 쓰게 됐는지 개인적인 경험담부터 담아내면서 결국 사람만이 희망이라고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제목처럼 모두가 행복한 사회공동체가 되길 바라는 지은이들은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가 '관심'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관심'은 마음을 갖고 보는 태도입니다. 나와 상관 없는 이웃의 문제였을 때와 내가 마음을 갖고 바라보는 이웃의 문제는 분명 다릅니다. 연대감의 시작은 관심어린 눈빛입니다.
아이 책장에 슬며시 꽂아주고 싶은 책제목 그대로 이 책은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사회공동체를 지향하며 노골적으로 독자를 가르치려 드는 책입니다. 짧은 이야기가 소개되고, '생각주머니'를 통해 토론할 문제점과 대안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한밤중에 방송되는 PD수첩이나 뉴스 후, 시사투나잇 같은 프로그램이나 주간지 시사IN에서 자주 보던 주제들이 빠짐 없이 등장합니다.
이 책에서 다룬 내용 중에 가장 마음에 남는 글들은 조상 중에 단 한 명이라도 흑인이 있다면 다른 조상님들이 모두 백인이더라도 '흑인'으로 판정받았던 미국의 '피 한 방울의 법', 지구 온난화로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투발루 주민들의 이야기, 1958년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 땅을 떠나본 적 없는 혼혈인 김정균의 '나는 한국인 입니다', 동성애자의 결혼 법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등등 입니다.
여자들만 다니는 학교에서 만난 제 친구의 애인은 여자입니다. 몇 해 전 딸을 낳은 이성애자인 제게 물었습니다. "만약에 쿠하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넌 어떻게 할 거야?"대답에 걸린 시간은 채 1초도 안 걸렸습니다. "아니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자기 맘이지."제가 아이들 보는 책을 많이 안 본 탓일 수도 있습니다만, 아이들이 보는 책에 성적 소수자 문제가 본격적으로, 진지하되 무겁지 않게 등장하는 책은 처음 봅니다. 또, 노인 문제도 그렇구요. 노인 복지 문제가 자세하게 소개된 것이 무척 반갑고 고맙습니다. 마음을 갖고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문제에 대해 아이들이 편견 없이 생각하고, 어른들에게 "왜 그런 거예요?"하고 기특하게 물어오는, 그래서 먹고 사는 문제 말고 다른 문제는 제껴두고 사는 팍팍한 어른들도 함께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어른들을 대상으로 이렇게 직설적으로 사회 문제를 드러내는 책을 쓰는 것과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 가운데 어느 편이 더 성공적인 전달일런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답이 보입니다. 굳어진 고정관념과 편견 덩어리 어른들에게 대답없는 신호를 보내는 것보다, 아직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세계 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긍정적이고 건강한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더 쉽고 더 보람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가 좀더 자라면 잡지 '고래가 그랬어'와 함께 조용히 책상에 놓아주고 싶은 책입니다.
행복한 사회공동체 학교 - 건강한 사회, 행복한 사람들
서해경.이소영 지음, 마정원 그림,
휴먼어린이,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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