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얼마를 더 걸어야 하는거야?

한계령에서 백담사까지 설악을 걷다

등록 2008.10.23 14:46수정 2008.10.24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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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몇km를 걸어야 하는 거야?"

 

묻는 아이들에게 20km를 걸어야 한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평지라면 몰라도 산길이라면 만만치 않은 길이기 때문이지요. 안 그래도 요즘 부쩍 산에 가자는 말에 불평을 늘어놓는 녀석들을 어떻게 해야 잘 구슬릴 수 있을지 도통 생각이 잘 안납니다.

 

올 가을 들어 두 번째 설악산행을 앞두고 아이들과 실랑이가 길어집니다. 어떻게든 꼭 아이들을 데리고 가고 싶은 엄마 아빠의 간절한 마음을 녀석들이 알아주지 않아서 속이 상합니다. 사교육 열풍이 지나쳐 폭풍처럼 세상을 휘몰아치는 지경이지만, 내게 있어 아이들 교육은 여전히 인성교육, 감성교육이 으뜸입니다. 정서가 먼저 안정이 되어야 공부하는 올바른 자세가 갖춰진다고 보는 거지요. 정서를 기르는데는 '자연'만한 게 없다는 게 저의 지론이구요, 자연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은 '산' 만한데가 없다는 생각을 평소에 해 왔습니다. 그랬기에 아이들을 대동하고 산행을 나서곤 했었던 것이지요.

 

더구나 설악산을 그것도 가을에 가는 일이라면 당연히 아이들이 함께 해야지요. 설득 작업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힘들거란 걸 저희들도 알고 있지만 산을 다녀오면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녀석들도 싫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a 깨어나는 아침, 설악산 서북능선길 한계령에서 시작된 산행길이 서북능선으로 접어들때 아침해가 솟아 올랐다

깨어나는 아침, 설악산 서북능선길 한계령에서 시작된 산행길이 서북능선으로 접어들때 아침해가 솟아 올랐다 ⓒ 김선호

▲ 깨어나는 아침, 설악산 서북능선길 한계령에서 시작된 산행길이 서북능선으로 접어들때 아침해가 솟아 올랐다 ⓒ 김선호

그런 녀석 둘을 데리고 한계령휴게소에 도착한 시각이 19일 새벽 6시, 동이 트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 시각이었지요.

 

산도 아이들도 잠에서 덜 깬 시각입니다. 한계령은 1004m 지점에서 등산로가 시작됩니다. 산행의 기점이 비교적 높은 곳이지요. 덕분에 시간은 단축 되었지만, 때문에 등산로 주변이 삭막해져 버렸습니다. 새벽 참에 그곳을 지나가게 된 것이 오히려 감사할 정도였지요.

높은 해발고도에서 산행이 시작되었으니 당연히 산은 가파르게 이어집니다. 첨부터 헉헉대며 역시 설악산은 만만치 않다는 걸 호되게 느껴야 했습니다.

 

설악의 남쪽에 위치한 한계령을 막 넘어 서북능선에 진입하기 직전에 동해바다를 가르며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만났습니다. 두터운 구름층이 하늘을 가려도 그 사이를 뚫고 기어이 해가 불쑥 떠오르는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산에서 아침 해가 솟아나는 장관을 보기도 참 오랜만입니다. 나도 모르게 두 손 모아 비나리를 하려니 아이들도 옆에서 해를 향해 두 손을 마주 잡습니다.

 

저의 기도는 별거 아닙니다. 그저 설악의 너른 품에 잠시 깃들었다 가니,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산행 마치게 해주십사 올리는 기도입니다. 서북능선길은 설악산을 서쪽과 남쪽을 가르는 정상능선을 말합니다. 길고 지루하지요. 주변은 이왕에 낙엽이 진 풍경을 보여주며 벌써 겨울 분위기마저 풍깁니다. 어쩐 일인지 11월을 앞둔 날씨가 너무 더운 것 같은데 설악산 정상능선은 벌써 겨울 준비를 하는가 싶어,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설악산이 바위산임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능선길이기도 하네요. 능선길이 온통 바위길입니다. 잎은 지고 바위길이고, 어찌 보면 삭막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 길에 살아서 천년을 살고 죽어서도 천년을 산다는 주목나무들이 씩씩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둘러보니 고산지대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뭇 생명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네요. 눈측백나무이며, 눈잣나무며 고산지대에서 살아가는 나무들은 한결 같이 키가 작고 잎이 풍성합니다. 나름대로 악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겠지요. 모진 추위와 바람을 견디기 위해 키를 낮추고 엎디어 자라는 고산식물들이 있어 설악산 정상능선은 한결 풍부한 표정을 띠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아이들이 앞서가네요. 돌투성이 길이 발길을 더디게 합니다. ‘그렇게 잘 걸어갈 거면서!’ 칭찬 한마디에 아이들의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집니다. 참 길이 길기도 하지요. 비슷한 풍경이 계속되면서 끝나지 않는 능선길은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길을 걷다 눈을 들어 바라본 설악산 연봉은 참으로 장대하기 이를데 없네요.

 

a 정상능선 설악산 정상능선은 이미 겨울로 접어들었다.
마가목 열매만이 고산식물과 가을의 끝자락을 물들인다

정상능선 설악산 정상능선은 이미 겨울로 접어들었다. 마가목 열매만이 고산식물과 가을의 끝자락을 물들인다 ⓒ 김선호

▲ 정상능선 설악산 정상능선은 이미 겨울로 접어들었다. 마가목 열매만이 고산식물과 가을의 끝자락을 물들인다 ⓒ 김선호

"봐라, 저기는 공룡능선, 바로 앞에 기암괴석으로 이어진 저 능선은 용아장성이란다. 저 멀리 크고 하얀 바위는 울산바위야."

 

설악산을 이루는 많고 많은 능선들이 물결치듯 이어져 있습니다. 아이들과 더불어 그 능선 몇 개를 걸어보았지만 설악의 그 크고 너른 품을 헤아리기에 택도 없는 듯싶습니다. 설악의 남쪽에서 시작된 산행이 서쪽과 북쪽을 가르는 능선을 따라 이제 북쪽 방향으로 선회를 합니다. 걷다 보니 어느덧 중청봉과 소청봉 갈림길입니다. 까마득한 높이의 대청봉엔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어 보이네요.

 

a 영시암 아궁이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정겨운 산속의 암자

영시암 아궁이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정겨운 산속의 암자 ⓒ 김선호

▲ 영시암 아궁이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정겨운 산속의 암자 ⓒ 김선호

백담사를 향해 가는 여정에서 소청봉대피소는 적절한 쉼터가 되어줍니다. 산장 옆 샘터에서 물을 떠다 라면을 끓여 가져온 밥과 함께 배불리 먹었습니다. 산에서 먹는 것은 뭐든 다 맛있습니다. 아이들이 별 불만 없이 잘 따라와 주어서 순조롭게 예까지 왔습니다. 잘 따라와 주었다기 보다 잘 앞장서 갔다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이제 엄마 키를 훌쩍 넘긴 6학년 아들녀석은 뒤처진 엄마 배낭까지 제가 짊어지고 가겠다며 제 배낭을 벗어듭니다.

 

밥 먹은 자리를 원상태로 복구시키고 이제 봉정암을 향한 내리막길에 들어섭니다. 백담사까지 11.3km라고 씌여 있네요. 역시 만만치 않는 거리입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역시 돌자갈이 깔려 있는 길을 따라 봉정암으로 향합니다. 설악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라고 들었고, 기도의 효험이 좋기로 소문나 언제나 사람들도 북적이는 곳이라고 들었지요. 그래도 ‘암자’라는 이름이 붙은 절집이니 산속에 고즈녘히 자리한 작은 절집을 떠올려보며 갔는데 막상 도착한 봉정암은 그 규모와 크기가 나의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습니다.

 

사람은 또 어찌나 많은지요. 미역국을 보시한다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 벌써 미역국을 한사발씩 받아 들고 경내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로 절집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입니다. 약수터에서 물 한바가지 마시고 서둘러 봉정암을 벗어납니다.

 

a 봉정암 소청봉방향에서 내려다 본 봉정암

봉정암 소청봉방향에서 내려다 본 봉정암 ⓒ 김선호

▲ 봉정암 소청봉방향에서 내려다 본 봉정암 ⓒ 김선호

봉정암 아랫길은 가파르기가 꼭 숨이 깔딱 넘어갈듯 하다 하여 '깔딱고개'라 불리는 가파른 길입니다. 바로 눈앞에서 등산객 한명이 발을 잘못 디뎌 사고가 날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올라오는 사람이 붙잡아 주어서 그만하기 다행이었지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구곡담계곡길에 들어서니, 그곳에서부터 단풍행렬이 조금씩 눈에 띕니다.  이름만 달라질 뿐, 그곳에서부터 백담사까지는 줄곧 계곡을 낀 단풍길이 이어집니다. 단풍으로 해서 눈이 즐겁고 더불어 발길 또한 가벼워지는 길이지요.

 

산벚나무, 생강나무, 은사시나무와 자작나무까지. 유난히 노란색 단풍이 고운 길입니다. 내설악에 해당하는 이 길은 숲이 깊고 그윽합니다. 바위산인 설악산 중에서도 흙산의 면모를 가진 길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단풍빛깔이 다양하고 곱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마치 천상의 정원을 거니는 듯하네요. 맑고 파랗다 못해 마치 보석을 품은 듯한 계곡물과 어울린 단풍든 숲길은 오래 이어졌습니다. 

 

백담사를 5km여를 앞두고 영시암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고 쉬지 않고 걸었습니다. 영시암은 숲 속의 작은 절집에 맞는 아담한 곳이었지요. 마당 한쪽에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었고, 국수를 삶아 오가는 객들에게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절집 마당에 흰 구절초가 피었고, 절집 주변은 지금 불타오를 듯 단풍 숲에 안긴 형국이었습니다.

 

a 가을의 끝자락 어여쁜 단풍이 지고 있다.

가을의 끝자락 어여쁜 단풍이 지고 있다. ⓒ 김선호

▲ 가을의 끝자락 어여쁜 단풍이 지고 있다. ⓒ 김선호

다시 백담사를 향해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길'을 걸었습니다. 길고 지루하게 이어진 길이었지만 단풍 숲이 있었고, 맑고 깨끗한 계곡이 있어서 지루한 줄도 모르고 걸었던 길이었습니다. 내설악에서 손꼽히는 수렴동계곡의 단풍은 익히 들었던 대로였습니다. 외설악에 ‘천불동계곡’이 있다면 내설악엔 단연 '수렴동계곡'이지요. 천불동이 남성적인 느낌인데 반해 수렴동은 여성적인 느낌입니다. 천불동은 계곡미가 더 뛰어나고 수렴동은 단풍이 더 좋다고나 할까요. 물론 우위를 따질 수 없습니다. 계곡과 단풍숲은 저 홀로 아름다운 법은 없으니까요. 모두 설악산이 품은 아름다움 아니겠는지요.

 

a 개구장이 개구장이 아들녀석이 계곡을 훌쩍 뛰어넘어 간다. 엄마 배낭까지
뺏어 지고서.

개구장이 개구장이 아들녀석이 계곡을 훌쩍 뛰어넘어 간다. 엄마 배낭까지 뺏어 지고서. ⓒ 김선호

▲ 개구장이 개구장이 아들녀석이 계곡을 훌쩍 뛰어넘어 간다. 엄마 배낭까지 뺏어 지고서. ⓒ 김선호

 

마침내 도착한 백담사 앞마당에서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까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용대리로 가는 버스를 타는 줄이라네요. 한용운 선생의 자취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두 시간이나 걸려 백담사계곡을 빠져나왔습니다. 10시간 가까이 산길을 걷는 것보다 서서 버스를 기다린 2시간이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설악산에서 아침해를 맞이했고, 저녁해를 또한 맞아 들였으니 하루를 꼬박 설악산과 함께 한 하루였습니다.  설악산은 지금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는 독특한 시기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한 20km여의 산행길에서 설악의 너른 품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하루가 참 길고도 아름다웠습니다.

2008.10.23 14:46ⓒ 2008 OhmyNews
#설악산 #한계령 #수렴동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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