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 자료를 보면 2007년 1년 만에 서울 면적의 3분의 1이나 되는 논이 사라졌다. 최근 1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논의 면적은 8만 헥타르 정도로 서울 면적의 약 1.3배 가량 된다. …언제까지 논이 논일 수 있을까. 이미 논은 돈이 된 것이 아닐까. 도시 주변의 논들은 곧 돈으로 환산될 위태로운 운명일 것이다. 콘크리트가 온 세상을 점령한다면 그것은 콘크리트가 주인인 세상이 아닐까. - 책속에서
논이나 볏섬이 아닌 땅이 부의 척도가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 이렇게 사라진 논에는 공장이나 주택들이 지어진다. 그리하여 벼들이 키를 재던 논에는 이젠 고층 아파트들이 키와 부피 값을 뽐낸다. 아니, 이젠 이런 아쉬운 푸념도 고리타분해 할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 대신 그들은 "논을 택지로 조성하여 아파트단지나 상업 지구를 조성하면 땅값의 몇 배나 올라가 훨씬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는데, 까짓 논 얼마쯤 사라지는 것이 무슨 대수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혹은 "먹는 게 지천인 세상에 논이 좀 사라지면 어떠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쌀이 부족하면 밥 대신 다른 것을 먹으면 된다"고 아이들은 반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의 논들이 사라진 속도만을 계산한다면 150년 후, 우리의 논들은 완전히 사라질 거라고 한다. 농지개발 제한으로 농지 보존을 하고 있기에 물론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논이 더 이상 논이 아닌 땅값으로 환산되는 시대요, 곡물 자급률 20%대인 우리의 실정인지라 사라지는 논들에 대한 씁쓸함과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논은 우리에게 밥 한 그릇을 주는 존재만이 아니다. 여름철 집중호우로 인한 홍수를 막아 주기도 하고 깨끗한 산소를 공급하는 녹지다.
<논, 밥 한 그릇의 시원>은 이처럼 우리들이 이제까지 보아 왔던 논, 단지 벼나 보리 등을 재배하는 용도로만 여겨왔던 논의 다양한 역할과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농민신문사 <전원생활>의 사진 기자인 저자(최수연)가 10년 넘게 만난 논들은 <토지>의 무대인 경남 하동 평사리부터 음성과 장수, 강화, 진영, 제주 등 전국의 논들. 평야의 너른 들판이나 문전옥답부터 산골짜기 다랑이논, 구들장논까지. 참 많은 논들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다랑이논,구들장논,무논,샘논,고래논,두레논,세골논,사래논,고지논, 천둥지기, 물잡이논, 뙈기논… 장구배미, 나팔배미, 구석배미, 진배미, 벼락배미, 버선배미, 소시랑배미… 맡은 일이 막중하니 종류도 많고 각 지방마다 불리는 이름도 참 많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런 논들의 생김새와 특징, 그 시원을 일일이 들려준다.
이밖에도 우리의 벼 재배와 논의 역사, 모내기의 역사를 들려준다. 논두렁 태우기나 보리밟기, 가래질이나 모내기 등, 봄이 덜 깬 이른 봄부터 우리들이 흔히 '빈 들'이리고 부르나 겨울에도 쉴 틈이 없는 은혜로운 논의 한살이를 들려준다.
논을 세는 단위나 수많은 농기구들의 쓰임새, 소 길들이기나 인간과 소의 관계에 대한 글도 특별하게 읽혔다. 논에서 경작하는 또 다른 작물들인 보리와 밀에 대한 이야기도, 보릿고개를 이기고자 도입한 통일벼 이야기도 시골태생인 내게는 특별하게 읽혔다.
단지 '힘들다', '고되다'고 표현하는 농사와 농부의 뼈가 녹는 숱한 애환, 즉 못자리를 만드는 이른 봄날부터 수확을 끝내는 가을까지 밤잠을 설치기 일쑤인 농사꾼들의 노심초사를 (시골 태생이어서) 그나마 조금 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저자가 있다.
논에 물이 차오른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논에 물 들어오는 것이 제일로 기쁜 일이라 했다. 따져보면 둘 다 같은 말이다. 물이 차야 모를 심고 모를 심어야 내 자식 입에 밥이 들어가니까.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벼는 자란다. 돌밭을 일구어 논을 만들고 나온 돌로 논둑을 삼아 벼들은 제주의 모진 바람들을 이겨낸다. 벼 잎과 벼 잎이 서로를 안으면 어떤 바람도 이들을 쓰러뜨리지 못한다. - 책 속 사진 설명 두 꼭지
책 속 풍성한 사진 설명 중 극히 일부다. 이처럼 인간과 농사(논)를 한 몸뚱이로 여기는 사진 설명을 쓴 사람은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글을 쓰는 농민 소설가 최용탁씨. 그는 농민의 마음과 농사의 가치, 이유 등을 끈끈하면서 녹록하게 사진 설명으로 녹여내고 있다. 때문에 이 책은 내용 따로 사진 따로 읽어도 좋다. 사진집을 따로 만나는 덤이랄까.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무거동 논 |
무거동 논은 기원전 9~10세기 즉, 청동기 시대에 사용되었던 논으로 확인됐다. 이전에도 탄화미와 조 등의 곡식이 발견돼 우리 조상들이 청동기 시대부터 농사를 지어왔다는 사실을 추측은 했지만, 논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다. 아직까지 동아시아에서 청동기 시대의 논이 발견된 기록이 없어 무거동 논이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오래된 논이 되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 벼농사는 일본으로 전래되어 일본의 야요이 문화에 큰영향을 미쳤다.무거동 옥현 유적지의 논이 발견됨에 따라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일본 벼농사 기원설이나 일본의 농경이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인도 등 남방에서 직접 전래되었다는 일본의 학설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1998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동안 세계 최고의 볍씨는 1997년 중국 허난성에서 출토된 약 1만 년 전의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소로리의 볍씨는 약 1만 3000여 년 전의 것으로 확인됐다. 그 전에 한국애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91년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출토된 약 5020년 전의 볍씨였다.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가 야생벼인지 재배벼인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논농사와 관련된 자료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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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의 밥 한 그릇이 다시 보인다
어느 날 이 책을 밤잠 이루지 못하며 읽었다. 내 유전자의 일부부분인 쌀(논)에 대해 알려주고 있는 이 책을 읽다 덮어두고 그냥 쉽게 잠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속 사진 한 장 한 장이 눈을 오래도록 붙잡았다. 유년기에 낯익은 풍경들을 사진으로나마 만나는 동안 아스라한 추억에 잠겼고, 그런 추억들이 몹시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농사꾼인 내 아버지가 어김없이 들로 나가던 새벽 어스름께 책장을 덮을 즈음에 비로소 알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밑도 끝도 없이 마음이 불편하고 끊임없이 서러웠던 이유는 논을 잊고 있었기 때문임을! 이 책은 단지 책이 아니라 오늘 내가 먹을 수 있는 밥 한 그릇의 의미와 이유를 알려주고 있음을!
논과 밥 한 그릇이 다시 보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논, 밥 한 그릇의 시원>(최수연 글과 사진/마고북스/2008년 10월 1일/15000원)
2008.10.30 15:29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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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 밥 한 그릇의 시원 - 2009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최수연 지음,
마고북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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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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