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 살아도 판잣집은 내 집 안 됩니까
 공원 만든다고 살던 사람 내쫓아서야"

[부동산 빈곤층②] 화곡본동 판잣집 사람들

등록 2008.10.31 09:47수정 2008.11.0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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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10.21 대책'으로 부동산 살리기에 나섰다. 국민 세금으로 그동안 폭리를 취한 건설사를 살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지만 정부는 "가계 주거 부담 완화"라는 명분을 내건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든 폭락하든 항상 주거 불안에 시달리는 빈곤층을 위한 대책은 어디에도 없다. <오마이뉴스>는 몇 평짜리 보금자리에서마저 내쫓기고 있는 '부동산 빈곤층'의 절규를 듣고 대안을 모색해본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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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 화곡본동 산 42번지 판자촌 '초록마을' 전경 ⓒ 장윤선


서울 지하철 5호선 화곡역 3번 출구에서 약수터 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10분. 봉제산 등산로에 접어들면 1950~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을 찍어도 될 만한 판잣집들이 33채 있다. '아스팔트 등산로' 좌측으로 50보 걸으면 '흙길'. 여기부터가 서울 강서구 화곡본동 산 42번지 판자촌 '초록마을'이다.

나무판자를 얼기설기 엮어 벽을 세우고 반투명 비닐로 좁다란 창을 낸 방 두 칸짜리 판잣집 주인 방아무개(51)씨. 그는 23년째 이 집에서 살고 있다. 사기 사건에 휘말린 남편이 지하단칸방 보증금마저 날려버린 뒤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자 시어머니가 마련해준 보금자리다.

나무판자 대문을 열면 신발 두어 켤레 벗어놓을 수 있는 좁은 현관이 있고, 한 칸짜리 싱크대가 놓인 부엌 겸 마루 겸 부부 방이 있다. 그 옆은 상고를 졸업하고 올해 '늦깎이 야간 대학생'이 된 스물일곱 딸아이의 방이다. 말이 딸아이의 방이지 사방 벽엔 세 식구의 사계절 옷이 쏟아질 듯 걸려 있고, 방바닥엔 온기가 식지 않은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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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 화곡본동 산 42번지 판자촌. ⓒ 장윤선


"23년 살아온 내 집인데 나가라굽쇼?"

13년째 임파선 암으로 투병 중인 남편과 딸 자식 키우느라 23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는 방씨. 그는 요즘도 남편 병원비와 생활비를 버느라 아파트 입주 청소를 한다. 하루 일당은 4만5천 원. 그날 벌어 그날 살기 바빴고, 한 대에 150만 원씩 하는 항암제를 남편이 투약할 때마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고 했다. 빚이 많을 때는 5000만 원까지 쌓였다고 한다.

"제가요, 배운 게 없어요. 할 줄 아는 건 막노동뿐이에요. (웃음) 병든 남편 수발하고 자식 키우는 데는 월세 부담 없는 판잣집이 좋더라고요. 집주인이 밤마다 찾아와 방세 내라고 문 두드리지 않아 좋았고, 또 어린애 때문에 방 못 빌려준다는 소리 안 들어도 되니까."

아침마다 붐비는 공동화장실과 집안에 마땅히 씻을 데가 없다는 것만 빼면 전혀 불편함이 없다는 방씨. 큰돈 벌어 이사할 형편이 되지 않는 한 그는 이곳에 눌러앉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최근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서울시 예산으로 강서구가 추진하는 봉제산 근린공원 추진 사업이 그것. 강서구는 지난 4월부터 총 예산 26억원을 들여 '초록마을' 일대를 자연체험학습원으로 바꾼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 중이다. 

지역주민들은 주변 환경이 좋아져 집값 오른다고 환영하지만, 정작 초록마을 사람들은 주거권을 빼앗길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강서구청은 아파트 입주권이나 임대APT 신청권, 주거 이전비를 선택하라고 압박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여기를 나가면 갈 곳이 없다. 

강서구청은 일단 '초록마을' 33가구에 대해 무허가 주택이라 해도 1982년 항공 촬영 당시 근거가 남아 있는 8가구에 대해서는 SH공사가 짓는 일반 아파트 분양권을 보상으로 지급할 계획이다. 그러나 근거가 없는 25가구에 대해서는 세입자로 판단해 임대아파트 혹은 주거 이전비를 주는 것으로 보상 문제를 갈음하겠다는 태도다.

그러나 이 마을 25가구 세대원들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개별적으로 19만~1000만 원 이상의 돈을 주고 샀기 때문에 세입자가 아니라 집주인이라고 주장한다. 토지에 대해서는 재산권을 행사하지 않겠지만 건물에 대해서는 재산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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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직 노동으로 암투병 중인 남편과 딸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방아무개씨. ⓒ 장윤선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살던 동네

특히 이 마을에서 31년째 살고 있는 윤아무개(65) 노인은 구청이 이 같은 사업을 추진한다는 사실조차 최근에 알게 됐다는 점을 가장 불쾌하게 생각했다. 동네사람이 서울시보에 난 관련 내용을 우연히 보지 않았더면 지금까지 모른 채로 지내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윤 노인은 "무허가 판자촌이라 해도 30년 넘도록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알 수 없도록 '모르쇠'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느냐"며 "내가 통반장을 맡아 활동해 온 것만도 십수년인 데 관청에서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니 화가 끓어오른다"고 말했다.

"강서구청은 무허가 건물이라도 1982년 항공촬영 때 나타난 집이면 점유권을 인정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우리 집은 없었대요. 그렇지만 나는 1977년에 이 집을 19만원 주고 샀고 여태껏 살고 있거든요. 여기서 애들 다 학교 보냈고, 결혼시켰어요. 그보다 더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까. 구청 사람이 절더러 '아 그때 왜 재산권 주장 안 했느냐'고 묻더군요.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빠듯했던 저한테, 더군다나 학습이 짧아 점유권이 뭔지, 재산권이 뭔지도 모르는 나한테 말이에요."

윤 노인은 31년 살아온 세월의 증거를 더 냈다. '아스팔트 등산로'가 깔리기 전, 초록마을은 온통 흙투성이라 질척거려서 남자들이 농담으로 "이 동네에선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강서구청의 3가지 제안... 그러나 주민이 받을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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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 화곡본동 산 42번지 판자촌엔 33가구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1960년대 형성된 이 마을은 76년에 전기가 들어왔고 89년에야 수도가 생겼다. 주민들은 주거권을 빼앗길 수 없다며 투쟁을 결의했다. ⓒ 장윤선

강서구청은 마을 사람들에게 이주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첫째, 등재된 무허가 건물 8가구의 경우엔 SH공사의 일반아파트 분양권이 나오지만 ㎡당 분양값을 모두 내야 한다. 서울시내라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3.3㎡ 당 800만 원이 넘는다.

둘째, 구청이 임의로 판단한 세입자 25가구도 임대APT를 받으려면 입주비를 내야 한다. 서울 월곡동 임대APT의 경우 입주비가 3735만 원이다.

셋째, 주거 이전비 문제다. 강서구청은 4인가족 기준으로 1200만 원을 주겠다는 입장이다. 1인 단독세대라면 300만 원이다. 이 돈을 갖고 서울시내에 구할 집은 없다. 

20년째 신장투석 중인 이아무개(52)씨는 2002년 홀로 이곳에 와 1000만 원을 주고 산 방 한 칸짜리 판잣집에서 살고 있다. 그는 "지난 6년간 문제없이 잘 살아왔는데, 갑자기 집이 철거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밤잠을 설치게 됐다"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판잣집이어도 좋다, 내 주거권을 빼앗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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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째 신장투석 중인 이아무개씨가 연탄불을 갈고 있다. 초록마을 주민 가운데는 연탄보일러를 쓰는 사람들도 있다. 1장 430원짜리 연탄 1000장을 들여놓으면 내년 5월까지는 충분히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는 이씨는 "내 집을 빼앗지 말라"고 비통해 했다. ⓒ 장윤선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초록마을에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는 조아무개(50)씨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조씨는 "전세대란에 목숨 끊는 가장의 심정을 누구보다 이해한다"며 "비록 판잣집이라도 내 집 갖고 사는 행복감이 얼마나 큰데 그걸 단돈 300만 원에 빼앗으려 하니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 뒤 눈시울을 붉혔다.

조씨는 "최근 도시 미관 때문에 우리 동네를 없애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구청이 정말 그런 목적에서 공원사업을 추진하는 것이라면 인권도 모르는 문외한"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강오성 강서구청 주택과장은 30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지자체 재원이 충분치 않으니 별도로 해줄 게 없고, 또 법적 근거도 없다"며 "화곡본동 뿐만 아니라 서울시내 재개발, 재건축 지역 살던 세입자라면 모두 마찬가지 아니겠냐"고 말했다.

강 과장은 "정부가 큰 틀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일개 구에 문제 제기한다고 되겠느냐"며 "이 분들도 내년 2단계 공사가 본격화되면 어쩔 수 없이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서구청은 1단계 공사를 연내 마무리하고 내년부터 2단계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그런데 '초록마을' 주민들이 투쟁을 선포하면서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됐다고 울상을 지었다. 강서구청 공원녹지과의 한 관계자는 "지난 2일부터 공원 개발공사가 중단된 상태"라며 "초록마을은 내년 2단계 사업인데 벌써부터 도로 닦는 것부터 못하게 하니 손해가 막심하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공사 장비만 들어가도 주민들이 모두 나와 방해한다"며 "보상이 추진 중이니 그에 따라 빠른 결론이 나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이들이 받을 만한 보상 대책이 아니라는 얘기에는 "주택과로 문의하시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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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빈곤층 #판잣집 #화곡본동 #판자촌 #초록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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