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정지 당한 리먼브러더스 서울지점. 리먼 브라더스, 메릴린치, AIG보험이 한꺼번에 파산에 몰리고 7000억 달러 구제금융법안이 준비되고 있을 때에도, 한국의 금융정책 당국자들과 금융회사들은 여전히 2009년 2월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되면 글로벌 투자은행을 키우겠다는 희망을 접지 않았다.
정미소
미국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하던 2008년 상반기만 해도 우리나라 은행과 금융기관의 부실이나 파산을 걱정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국내 은행들이 미국 모기지 관련 파생상품에 투자했던 수십억 달러 정도의 손실을 우려하는 정도였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금융기관이 1997년 외환위기로 혹독한 시련을 겪은 후에, 재무건전성이 매우 양호해졌기 때문에 미국발 금융위기의 충격을 적게 받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각종 파생상품 거래와 헤지펀드 등장이라는 금융혁신이 한국에서는 덜 발전했기 때문에 그나마 충격을 적게 받는 것이라는 논지를 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금융기관들은 상대적으로 안전지대에 있는 줄 착각했다. 덕분에 선진국의 대형 투자은행들과 보험회사, 은행이 줄이어 파산하는 와중에도 국내 금융기관은 글로벌 메가뱅크, 글로벌 투자은행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지주회사 전환에 성공하여 KB금융지주가 된 국민은행의 황영기 회장은 2008년 9월 9일 KB금융지주, 신한, 우리 금융지주 등 자산규모 200조 원대의 은행들이 대등하게 합병을 추진해서 자산 규모 500조 원대의 글로벌 은행을 만들자는 주장을 펴며, 글로벌 메가뱅크를 위한 금융권 재편을 호언했다.
정부 역시 지난 6월 산업은행 민영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산업은행 민영화는 '경쟁력 있는 투자은행(CIB : Corporate & Investment Bank) 육성'이라는 국가적 아젠다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이며, "글로벌 플레이어(Global Player)로 도약하기 위해 사업다각화, 대형화 및 해외진출 등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여타 금융회사들에게 새로운 사업모델을 제시하는 벤치마크로 기능"하겠다는 화려한 비전을 제시했다.
이후 리먼 브러더스, 메릴린치, AIG보험이 한꺼번에 파산 지경에 내몰리고 7000억 달러 구제금융법안이 준비되고 있을 때에도, 한국의 금융정책 당국자들과 금융회사들은 여전히 2009년 2월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되면 글로벌 투자은행을 키우겠다는 희망을 접지 않았다. 모델로 삼았던 메릴린치 같은 글로벌 투자은행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자, 자신들은 미국식의 전형적인 투자은행 모델이 아니라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이 결합된 CIB모델을 추구한다고 강변했다.
은행에 이어 제2금융권까지 유동성 경색 조짐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가 극단적인 신용경색과 자금 조달 단절이라는 상황까지 전개되자 양상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2005년부터 해외 단기차입을 급격히 늘렸던 은행들은 달러 유동성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른바 민간 상업은행발 외환위기가 다시 터질 수 있다는 외신 보도가 줄을 이었다. 무디스와 S&P 등 신용평가 기관들은 10월 들어 일제히 한국의 주요 시중은행들에 대한 등급을 '안정적(stable)'에서 '부정적(negative)' 관찰 대상으로 내렸다. 급기야 정부가 10월 19일 시중은행에 대한 1000억 달러 정부 지급보증, 300억 달러 자금 직접 조달을 발표하고, 10월 말 미국과 300억 달러 통화스와프까지 체결하는 긴박한 상황까지 이어진다.
달러 유동성 경색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원화 유동성 경색마저 겹치면서 은행들은 급격히 대출을 줄이고 자금 조달 숨통을 열고자 급히 예금이자율을 높였다. 그러나 이미 시중에서 은행채 등이 소화되지 않는 국면에까지 몰리면서 결국 정부와 국민연금 등이 은행채 등을 매입하겠다는 발표를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2008년 11월 접어들면서 원화 유동성 경색은 은행을 넘어 캐피탈, 카드사 등 제2금융권으로 번져갈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고객 수신 기반을 갖춘 은행과 달리 카드, 캐피탈 등 여신 전문 금융기관들은 은행채보다도 신용이 낮은 카드채와 같은 여전채(여신전문회사 채권)나 기업어음(CP) 발행이 더욱 어려워지고, 자신들이 보유한 채권을 담보로 한 자산유동화증권(ABS, Asset backed Securities) 발행이 여의치 않으면서 더욱 궁지로 몰리게 된 것이다.
급기야 여신금융협회장과 주요 캐피탈사 사장들은 11월 11일 김종창 금융감독원장과 간담회를 잡았다. 카드업계 한 고위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은행채를 매입해준 것처럼 카드채를 매입해 수요를 진작시키는 방안을 건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증권사나 보험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증권사가 가지고 있는 채권을 담보로 빌린 자금이 이미 대폭 늘어난 상태이고, 보험사도 보유하고 있는 채권과 주식 등의 보유자산가치가 하락하여 지급여력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은행의 위기가 카드사의 위기, 캐피탈사의 위기, 증권사와 보험사의 위기로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금융기관들이 수익이 치솟을 때에는 정부에게 간섭하지 말라고 큰소리치다가, 위기에 몰리니 너도나도 정부와 중앙은행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아우성쳤던 모습이 태평양 건너 대한민국에서 완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다.
과도한 수익 추구와 몸집 불리기로 이룬 텅 빈 성장그렇다면 외환위기 이후 자본건전성을 강화하고 관치금융을 없애며 선진 금융시스템을 도입해왔다고 자부했던 국내 은행들과 금융기관들이 어째서 이토록 외부 금융충격에 취약하게 되었는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의 한복판에 있었던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들은 그동안 '금융기관'으로서 고유한 자금 중개 기능을 수행하기보다는 '금융회사'로 변신하여 철저히 수익을 추구했으며, 이를 위해 규모화와 겸업화를 추구해왔다. 수익 제일주의와 규모화를 위해 무수한 금융상품을 개발하거나 외국에서 들여와 판매하는 데 열을 올렸으며, 무리한 자본조달을 동원하여 대출을 강행했다.
그 결과 외형적으로는 규모가 급격히 팽창하여 우리은행의 경우 2005년 이후 2007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이 무려 23퍼센트에 이르며 초고속 성장을 이루었다. 당기순이익도 대부분 조 단위를 돌파하여 국민은행의 2007년 당기 순이익은 2조 7000억 원에 달하였으며, 나머지 은행들도 대부분 조 단위의 순이익을 올렸다. 국제 경쟁력을 갖춘 제품을 개발하여 수출해서 올린 수익이 아니다. 오로지 국내 금융영업으로, 그것도 기업대출이 아니라 대부분 소매영업으로 올린 매출들이다. 그래놓고 이제 다음 목표는 글로벌 메가뱅크라고 큰 소리 치는 것이다.
이들 금융회사의 화려한 성장을 받쳐주기 위해 우리 국민이 치른 대가는 가혹했다. 금융회사가 수익을 올리기 위해 무분별하게 남발한 신용카드로 한국경제는 2003년 엄청난 카드대란에 휩싸이며 경제침체를 겪어야 했고, 당시에 400만 이상의 신용카드 불량자들이 양산되는 초유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카드 대란, PF대출 부실, 펀드 폭락, KIKO... 금융기관의 욕심이 부른 파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