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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농협에서 오기로 한 절임배추가 시간을 훨씬 넘겼다. 전화를 해보니 조금만 기다리란다. 그리고도 한 시간 가까이 훌쩍 지났다. 다시 전화를 했다.
"어머, 아직 안 갔어요? 이상하네요. 가고도 남을 시간인데, 제가 알아보고 전화해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잠시 후, 농협마트 직원한테 전화가 왔다.
"지금 기사아저씨가 전민동에 있다고 하네요. 한 십분만 더 기다려주시면 될 것 같아요."
동네만 배달된다더니 다른 동네(전민동)도 간 모양이다. 그래서 늦는구나싶었다. 전화를 끊자 초인종이 울렸다. 절임배추 기다리다 김장속 다 익겠다고 배달아저씨한테 쫑알댔더니 아저씨 왈.
"주문이 폭주해서 지금 중단시킬 지경이에요. 생각보다 주문들을 많이 하셔서 배달이 엄청 밀렸거든요."
요즘 한창 김장철이다. 동네시장엔 날마다 김장시장이 선다. 배추와 무, 알타리, 쪽파, 대파, 미나리 따위를 파는 트럭에서 아저씨들 장단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 집 김장은 친정아버지가 키운 배추로 해왔다. 그런데 올해는 가뭄이 들어서 김장배추가 영 건질 게 없단다. 백포기를 심었는데 쓸만한 건 열 포기도 채 안된다고 했다. 그러니 어쩌랴, 내가 알아서 하는 수밖에. 그러다 동네 가까운 농협에서 절임배추를 주문받는다는 펼침막을 봤다. 가만 보니 시골 고향에서 절여오는 배추다.
배추 값이 싸다는데 이참에 고향배추도 팔아주고 나도 절임배추로 일 좀 덜어볼까 했다. 한 박스 20kg에 1만9800원. 배추포기수로는 7~8포기라고 한다. 세 박스를 할까, 네 박스를 할까 하다가 네 박스를 주문했다. 그래봐야 30여포기다. 우리 네 식구가 일년 반양식을 하려면 배추 30포기는 기본으로 해야 한다.
박스를 뜯으니 비닐에 싸인 절인배추가 차곡차곡 누워있다. 배추가 오기 전에 속은 이미 준비를 다 해 놨다.
친정에서 보내온 무와 갓을 채 썰거나 적당히 잘라놓고, 찹쌀 한 대접을 불려 빻아 찹쌀풀을 쑤었다. '전라도식'으로 하는 육수를 만든다고 적당한 물에 대파이파리와 멸치, 양파껍데기, 다시마를 넣고 30분 정도 달였다. 국수를 말아 먹고 싶을 만큼 구수한 냄새가 진해질 때쯤 불을 끄고 육수를 식혔다.
양파와 배를 갈아 단맛을 내고 생새우와 까나리 액젓, 다진 마늘과 생강, 쪽파, 미나리에 고춧가루를 버무려서 하룻밤을 재웠다. 고춧가루는 괴산에 사시는 시골형님이 농사지은 것인데, 빛깔이 참 곱다.
절임배추로는 처음이라 소금간이 어떤지 먹어보니 어쩜, 씹을수록 고소하고 달큰하다. 배추를 싼 비닐은 두 겹으로 되 있어서 한 겹으로는 바닥에 테이프를 붙여 깔았다. 그릇에 속을 따로 넣고 하는 것보다 그냥 바닥에 덜어서 하다가 나중에 마무리할 때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면 된다.
김치통에 속 채운 김치가 들어갈수록 여기저기 몸이 쑤시고 마음은 뿌듯해졌다. 김치통이 채워지면 뜯어놓은 겉대로 우거지를 질렀다. 따로 남긴 노랑 속배추를 얼른 먹고 싶어 신랑을 시켜 수육거리를 사오라고 했다. 오늘 같은 날, 돼지고기 보쌈을 아니 먹고 어찌하리.
작년엔 생배추를 다듬어 절이고 씻고 그걸 혼자 다 어떻게 했을까. 절임배추로 김장에 할 일 반이 줄었지만, 나는 여전히 김장이 힘들다. 뒤처리를 할 때쯤엔 내 몸이 아니었다. 김장하기 전에는 김장시장에서 보이는 온갖 채소와 양념들이 내 일로 보이더니, 이젠 그저 남 일이 되었다. '이름' 짓고 나니 커다란 숙제 하나를 해치운 듯 개운하다.
덧붙이는 글 | sbs u포터에도 송고합니다.
2008.11.24 09:32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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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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