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7)

[우리 말에 마음쓰기 488] ‘우리 같은 존재’, ‘논픽션 작가 같은 존재’ 다듬기

등록 2008.11.30 18:01수정 2008.11.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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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우리 같은 존재

 

.. 아마 우리 같은 존재를 얼마나 더 살려 두어야 하는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  <시몬 비젠탈/박중서 옮김-해바라기>(뜨인돌, 2005) 42쪽

 

‘의문시한(疑問視)’이라 하지 않고 ‘궁금한’이라 적은 대목이 반갑습니다.

 

 ┌ 우리 같은 존재를

 │

 │→ 우리 같은 사람들을

 │→ 우리 같은 놈들을

 │→ 우리 따위를

 │→ 우리들을

 └ …

 

철학을 따지거나 사상을 말할 때, 역사를 살피거나 예술을 읊을 때, 정치를 들먹이거나 경제를 뇌까릴 때,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를 이야기하면서 흔히 ‘존재’라는 한자말을 쓰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얼마나 알맞게 넣은 한자말 ‘존재’인지는 생각하지 못하면서, 또 얼마나 올바르게 넣은 한자말 ‘존재’인가는 돌아보지 못하면서 그냥 씁니다.

 

그러는 가운데, ‘가볍게 주고받는 이야기’에서는 잘 안 쓰고 ‘속깊은 이야기나 무겁게 주고받는 이야기’에서 곧잘 씁니다. “이 사람아, 그러면 안 되지!” 하고 말할 때와 “이 인간아, 그러면 안 되지!” 하고 말할 때 다른 느낌을 담는 우리들이듯, “너 같은 사람은 없어도 돼!” 하고 말할 때와 “너 같은 존재는 없어도 돼!” 하고 말할 때에는 무게부터가 다르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지식인들만 흔히 쓰던 ‘존재’였습니다. 이제는 따로 지식인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 여느 사람들도 손쉽게 쓰는 ‘존재’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대학생도 쓰고 교사도 쓰며 중고등학교 아이들도 씁니다. 어린이책에도 실리는 낱말이고, 아이들은 일기에 이 낱말을 적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에 나오는 낱말이 되고, 운동경기를 들려주는 자리에서도 나오는 낱말이 됩니다.

 

 바야흐로, 우리한테는 없어서는 안 될 낱말처럼 굳어집니다. 우리로서는 안 써서는 안 될 낱말처럼 입에 붙습니다. 우리들 어느 누구나 스스럼없이 쓸 만한 낱말로 여겨집니다. 한국사람이 넉넉히 쓰고 널리 쓰며 너도나도 쓰는 낱말로 뿌리를 내립니다.

 

 ┌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을

 ├ 우리 같은 부스러기들을

 ├ 우리 같은 쓰레기들을

 ├ 우리 같은 찌꺼기들을

 └ …

 

 보기글에 나온 “우리 같은 존재”를 돌아봅니다. 이 자리에서는, 독일 군인이 유대인(우리)을 수용소에 가두고 있는데, 이 유대인들은 어느 때라도 손쉽게 죽여 버릴 수 있는 하찮은 목숨으로 다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독일군한테 수용소 유대인은 하찮은 티끌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쓸모없는 먼지부스러기라면서, 유대인 스스로 “나 같은 주제가 뭐”라든지 “우리 따위가 뭐” 하고 생각하도록 한다지요.

 

 이 이야기흐름을 헤아리면서 “우리 같은 존재”를 “우리 같은 놈”이나 “우리 따위”로 다듬어 보다가 “우리 같은 쓰레기”나 “우리 같은 찌꺼기”로도 다듬어 봅니다. 쓰레기나 찌꺼기 대접을 받는 사람들한테는 그지없이 끔찍한 노릇이지만, 쓰레기나 찌꺼기로 짓눌리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생채기와 아픔을 나타내려는 대목이므로, 이렇게 적을 때가 한결 잘 어울리지 않으랴 싶습니다.

 

 

ㄴ. 논픽션 작가 같은 존재

 

.. 국어사전은, 길거리로 나와 우리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쓰고 있나’를 열심히 수집하고 기록해서 세상에 알리는 논픽션 작가 같은 존재다. 국어사전은 법전이 아니라 역사서다 .. <기획회의>(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32호(2008.9.20.) 75쪽

 

 ‘도대체(都大體)’는 ‘참으로’나 ‘참말로’로 다듬고, ‘열심(熱心)히’는 ‘부지런히’로 다듬으며, “수집(蒐集)하고 기록(記錄)해서”는 “모으고 적바림해서”로 다듬습니다. ‘논픽션(nonfiction) 작가(作家)’는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작가’라고만 하거나 ‘사람’이라고만 적어도 어울립니다.

 

 ┌ 논픽션 작가 같은 존재다

 │

 │→ 논픽션 작가와 같다

 │→ 실화 작가와 같아야 한다

 │→ 실화 작가와 같은 사전이다

 │→ 실화 작가와 같은 책이다

 └ …

 

 보기글은 국어사전과 논픽션 작가를 견줍니다. ‘국어사전이라는 존재’는 ‘논픽션 작가라는 존재’와 같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곰곰이 따져 봅니다. 국어사전은 ‘책’입니다. 논픽션 작가는 ‘사람’입니다. 책을 사람한테 견주는 셈이고, 국어사전이라고 하는 책은 논픽션이라는 문학, 한자말로는 ‘실화’를 쓰는 사람과 같아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실화(實話)란 “실제로 있는 이야기”입니다. ‘실제(實際)’는 “사실의 경우나 형편”이라고 합니다. ‘사실(事實)’이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실화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있는 이야기” 꼴이 되니, 국어사전 말풀이는 영 엉터리입니다. 국어사전을 뒤적이면서는 ‘실화-실제-사실’을 알 노릇이 없어요.

 

그러면 ‘논픽션’이란 참으로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우리 말’이 아닌 ‘한자말’을 즐겨쓰도록 되어 있는 이 나라 사람들로서는 ‘실화 작가’라는 이름보다는 ‘논픽션 작가’라고 해야 뜻이나 느낌이 한결 또렷하게 느껴지지 않으랴 싶습니다. 뒤죽박죽이고 엉망진창입니다. 따져야 할 대목은 ‘존재’인데, “어떤 존재”인가를 따지려고 하다가 실타래만 외려 엉기고 꼬입니다.

 

 ┌ 국어사전은 … 부지런히 모으고 적바림해서 세상에 알리는 사람과 같아야 한다

 ├ 국어사전은 … 부지런히 모으고 적바림해서 세상에 알리는 책이어야 한다

 ├ 국어사전은 … 부지런히 모으고 적바림해서 세상에 알릴 수 있어야 한다

 └ …

 

 보기글을 통째로 손질해서 다시 적어 봅니다. “국어사전은, 길거리로 나와 우리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 사람들이 참으로 무슨 말을 어떻게 쓰고 있나’를 부지런히 모으고 적으면서 세상에 알리는 노릇을 해야 한다.”쯤으로.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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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30 18:01ⓒ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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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한자 #우리말 #우리 말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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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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