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 지키려다 '동지' 잃은 언론재단 노조
구조조정 임박, 이젠 누구에게 손 내밀 건가

[取중眞담] 임원퇴진압력에 굴복하고 낙하산 인사 받아들여

등록 2008.12.01 08:50수정 2008.12.0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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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언론재단 지부(지부장 정용재)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의외로 그들의 '침묵' 때문이었다.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박래부 전 이사장과 독대하며 "자리 내놓으라"고 협박했다는 사실이 폭로됐을 때, 그들은 침묵했다. 곧이어 문화부 미디어담당 국장, 과장 등까지 나서 이사진 사퇴를 종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와 생각하면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이들은 지난 8월 중순경 국가정보원 직원이 흘렸다는, "재단이 담당하고 있는 정부광고 대행업무를 언론재단에서 제3기관으로 이관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자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단 주요 수입원인 '정부광고 대행업무'가 언급됐기 때문이었다.

 

언론재단 노조, 오랜 침묵 끝 이사진 퇴진투쟁 나선 이유

 

지난 8월 한국언론재단 노동조합이 정부의 사퇴 압력을 받던 박래부 이사장 등 이사들의 퇴진 투쟁을 벌이고 있다. 결국 임원진은 10월말 사표를 내고 퇴진했다. ⓒ 남소연

지난 8월 한국언론재단 노동조합이 정부의 사퇴 압력을 받던 박래부 이사장 등 이사들의 퇴진 투쟁을 벌이고 있다. 결국 임원진은 10월말 사표를 내고 퇴진했다. ⓒ 남소연

프레스센터 12층~15층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던 조합원들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러고는 재단 임원실이 있는 15층 버튼을 눌렀다. 이 순간이었다. 언론재단 노조의 선명한 투쟁 대상이 드러난 것은. 이들은 '재단을 흔드는 정부기관'보다 '주요 수입원을 빼앗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부와 각을 세우고 있는 이사장'을 투쟁 대상으로 삼았다. 언론재단 위상을 흔들고 있는 외부 세력에 따지러 가기 위해서라면 1층을 눌러야 했지만 이들은 15층을 선택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임원 퇴진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턴 재단의 투쟁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북을 두드리면서 재단 임원진 퇴진 투쟁에 '올인'했다. 임원실 입구에는 "나 살자고 재단 죽이는 임원직은 물러가라"는 종이가 붙었다. 당시 노조에서 공개한 설문 결과를 보면 130여 명의 직원 중 1~2명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이사진 퇴진에 찬성했다.

 

당시 한 언론계 인사는 이렇게 개탄했다.

 

"볼 일이 있어 당일 프레스센터에 갔다가 언론재단 직원들이 우르르 내가 탄 엘리베이터에 탔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15층에서 내려 이사진 퇴진 구호를 외치는 게 아닌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직원들 얼굴도 많이 보였다. 충격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생각했다. 정부가 재단을 맘놓고 주무르고 있는데 노조가 그 사람들과 같은 방향에 서 있는 것 아닌가. 언론운동 차원에서 봐도 아마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결국 이들의 투쟁은 '승리'했다. 박래부 이사장과 김국수, 손정연, 정운현 이사 등 네 명의 이사진들이 '항복'선언을 하고 10월 마지막날 '불명예 퇴진'했다. 이후 언론재단 노조의 투쟁방향도 주목대상이었다. 재단 임원진이 사퇴하기도 전에 새 임원으로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이름이 오르내렸고 그중에는 정치권에 몸 담았던 인사들의 이름도 심심찮게 거론됐기 때문이다.

 

언론재단 노조의 승리한 투쟁, 그 결과는 낙하산 인사

 

지난 8월 한국언론재단 노조가 박래부 이사장 등 4명의 이사진 퇴진을 요구하며 만든 홍보물들. 결국 박 이사장 등은 10월말 사표를 내고 재단을 떠났다. ⓒ 남소연

지난 8월 한국언론재단 노조가 박래부 이사장 등 4명의 이사진 퇴진을 요구하며 만든 홍보물들. 결국 박 이사장 등은 10월말 사표를 내고 재단을 떠났다. ⓒ 남소연

지난 11월 25일 언론재단 이사회에서 새 임원진이 결정됐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고학용 한국신문윤리위원회 독자불만처리위원이 이사장으로, 서옥식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이 사업이사, 선상신 불교방송 보도국장이 연구이사, 김문오 전 대구 MBC 보도국장이 기금이사로 이사회 승인을 받았다.

 

서옥식 사업이사는 잘 알려진대로 이명박 대선 후보 당시 특별보좌역과 언론특보를 지냈다. 정치인이다. 김문오 기금이사는 2006년 지방선거 때와 18대 총선 때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다가 떨어진 인사다. 전형적인 폴리널리스트, 정치인이다. 누가 봐도 명백한 '낙하산' 인사다. 왜 그토록 정부가 전 임원진을 내쫓으려 안달복달, 조직을 휘저었는지가 잘 드러난 결과였다.

 

언론재단 노조는 이사회가 열린 11월 25일 오전, 19층 이사회장을 막아 나섰다. '낙하산 인사 반대', '특보 출신 인사 반대', '정치 인사 반대'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언론특보 출신과 정치인사가 언론재단 상임이사로 오면 재단의 중립성과 독립성이 훼손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고학용 이사장 내정자가 "특보 출신이라고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만약 이사들이 정치적 편향을 보이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하며 손을 내밀자 정용재 노조 위원장이 그 손을 덥석 잡았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피켓은 철수됐으며 조합원들은 바로 업무에 복귀했다. 이사회는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지난 11월 26일부터 새 임원진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업무를 시작했다.

 

박래부 이사장을 비롯한 이사진 4명이 보따리를 싸고 재단을 떠난 뒤인 지난 11월 17일, 프레스센터에서는 언론재단 노조가 붙인 대자보가 눈에 띄었다. 제목은 '문화부는 미디어 진흥에 역량 있는 인사를 선임하라'. 노조가 밝히는 '재단의 차기 임원 자격'이 나열되어 있었다.

 

첫째, 재단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으며,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켜낼 수 있는 언론계의 신망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둘째, 미디어 진흥과 공익성을 책임질 수 있는 역량과 전문성을 지녀야 하며, 조직과 재원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경영능력이 있어야 한다. 셋째, 자신의 사욕보다는 재단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적인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문화부는 재단의 임원자리를 대선 전리품으로 전락시키며 미디어 진흥의 후퇴를 원치 않는다면 이번 임원선임을 통해 권력의 하수인이 아님을 반드시 증명해야 할 것이다.

 

이 대자보를 다시 읽으며 약간의 현기증이 일어났다.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켜낼 수 있는 언론계의 신망 있는 인물'에 박래부 전 이사장과 정운현 전 이사를 대입시켜 봤다. 30년 동안 한 매체에서 한우물만을 팠던 기자, 평생 한 분야에만 천착해 오면서 그 분야 전문가로 인정받았던 기자는 결국 이 노조의 원칙에 어긋나는 인물들이었다.

 

새 이사들 이름을 넣어봤다. 두 정치인이 딸려 들어온 새 이사진은 아무리 양보해도 첫 번째 원칙부터 턱 걸리는 인사들인데도 노조는 투쟁을 금세 접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재단의 임원 자리를 대선 전리품으로 전락시키지 말라'는 문구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노조는 투쟁을 접으며 이 대자보도 모두 철거했다. 

 

생존권 지키고 낙하산 반대 투쟁까지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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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태평로 한국언론재단. ⓒ 권우성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재단. ⓒ 권우성

길게 잡으면 9개월여 동안 진행됐던 언론재단 사태는 결국 이렇게 일단락됐다. 노조는 일단 조합원들의 '생존권'을 지켜냈고, 어쨌든 '낙하산 반대' 투쟁까지 벌였다고 자조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통해 언론재단 노조가 놓친 게 많다. 우선 언론계에서 노조의 건강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귀족노조의 밥그릇 투쟁'이라는 비난의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언론노조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최근 6년간 횡령 등 내부비리가 모두 네 차례나 발생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처음엔 그저 지엽적인 '부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누가 그렇게만 생각하겠나. 조직의 비건강성, 보신주의, 온정주의 때문이라고 본다. 이번 사태로 이 정부가 언론재단을 얼마나 쉽게 여기는지 증명된 셈인데 언론재단 노조 역시 이를 부추겼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 있다. 가장 핵심일 것이다. '둥지' 지키는 투쟁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동지'들을 잃었다. 언론재단 노조가 이사장 퇴진 운동을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과거 박기정 이사장 시절에도 퇴진 투쟁을 벌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싸늘한 시선이 꽂히지 않았다. 명분이 있고 합리적인 투쟁이라면 언론운동 진영 전체가 충분히 공감하고 함께했을 것이다.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언론재단에 들이닥칠 구조조정, 누구에게 손 내밀 건가

 

앞으로도 언론재단은 줄곧 '구조조정 요구'에 시달릴 것이다. 언론기관 통폐합 문제, 고임금 방만 운영도 그동안 단골로 지적되어 온 문제, 이를 풀어내기 위한 각종 정책이 추진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비단 재단의 문제만이 아닌만큼 독자 투쟁으로는 풀어낼 수 없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지금 언론재단 노조를 바라보는 언론노조와 언론운동 진영의 반응은 싸늘하다. 언론재단 노조는 과연 '결정적인 국면'에서 누구와 함께 싸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번 사태로 인해 언론노조 일부 지부 중에는 언론재단 노조를 제명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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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용 새 언론재단 이사장(오른쪽)이 '낙하산 인사 반대' 피켓을 들고 이사회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던 정용재 언론재단 노조 위원장에게 "이후 정치적 편향을 보이는 이사들이 있을 경우 내가 책임질 것"이라고 말하며 악수하고 있다. ⓒ 미디어오늘 이치열

고학용 새 언론재단 이사장(오른쪽)이 '낙하산 인사 반대' 피켓을 들고 이사회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던 정용재 언론재단 노조 위원장에게 "이후 정치적 편향을 보이는 이사들이 있을 경우 내가 책임질 것"이라고 말하며 악수하고 있다. ⓒ 미디어오늘 이치열

어쨌든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됐다. 결국 언론재단 노조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이 '선택'은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언론재단은 지난 수년간 줄곧 '구조조정'을 요구받아온 조직이다. 국감 때마다 '월급 너무 많은 것 아니냐'고, '구조가 너무 방대한 것 아니냐'고, '언론 유관기관들 적당히 합쳐도 되는 것 아니냐'고 지적당해 왔다.

 

더구나 이 정부는 출범 이전부터 기관 슬림화를 주창해 온 정부 아닌가. 잊힐 만하면 터져 나오는 횡령 등 비리사건으로 운신의 폭도 넓지 못하다.  

 

그 부메랑, 피할 자신 있는가? 미리 준비하고 어깨 걸 동지들이 있는가? 정말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상황이 오진 않을까?

 

노조는 지난 8월 이사진 퇴진 운동을 벌이며 '임원진이 재단을 불통과 고립의 길로 내몰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제 차분하게 자신에게 던져야 할 과제가 됐다.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언론재단 노조는 지금 몹시 외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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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1 08:50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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