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만한 쿠바 이민국에 '판관 포청천' 뜨다!

[자전거 세계일주 카리브 해 편 24 - 쿠바 24] 산티아고 데 쿠바

등록 2008.12.03 12:13수정 2008.12.03 14:13
0
원고료로 응원
a 나이스크림(Nice Cream)!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단 돈 1페소(약 50원). 자꾸 손이 간다.

나이스크림(Nice Cream)!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단 돈 1페소(약 50원). 자꾸 손이 간다. ⓒ 문종성


"당신 여권과 항공권 티켓 좀 줘 봐."
"아니, 아까 그거 다 조사했었잖아요?"
"알아. 다시 줘. 조사해야 하니(주라면 줄 것이지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의욕 없어 보이는 눈빛, 귀찮은 벌레 취급하는 듯한 거만함. 이민국 직원은 제 본위대로 설렁설렁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홈그라운드도 아니고 여행자 권리를 비벼볼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도 아닌 이상 대꾸는 상상도 못할 판.


저녁 8시. 물론 일과 시간이 끝났다는 건 인정. 그래서 부탁하는 입장에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경찰이 특별히 부탁하는데 조금만 신경 써 줘도 되는 일 아닌가. 난 지금 동행자를 잃어버렸다니깐!

여권과 항공권을 받아 든 남자의 태도에 주먹이 운다. 사무실도 아니고 건물 밖 난간에 기대 한 쪽 다리를 꼰 채 심문하는 모양이 자기가 무슨 특수수사대 CSI인 줄 착각한다. 난 꼿꼿이 선 채로 물음에 답한다.

"이름?", "나이?", "안경 벗어 봐.", "쿠바에 들어온 날짜?", "목적은?", "언제 떠날 건가?", "돈은 얼마나 가지고 있지?", "쿠바에 아는 사람 있나?", "짐 다 풀어 보도록."

"(아니, 내가 여기 불법 체류라도 할까 싶어 그러나 이 사람아?) 거기 여권과 항공권에 다 나와 있잖아요. 그리고 사람 찾을 생각은 안 하고 왜 계속 나만 검사하는 거요?"

참다가 한 마디 했더니 그건 내 알 바 아니란 듯 여권과 항공권을 집어 들고 건물 내부로 유유히 들어간 직원은 조사를 이유로 한참동안 나오지 않았다. 기분이 상한 건 그의 일처리 내용보다 신분우월에 의한 고압적인 자세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조롱하는 듯한 말투 때문이다. 이민국 직원이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건지.


a 어르신네들의 놀이  골목에서 도미노 게임을 하고 있다.

어르신네들의 놀이 골목에서 도미노 게임을 하고 있다. ⓒ 문종성


20여분 만에 나온 직원은 기다리란 말만 하고 여권과 항공권을 건네 준 뒤 다시 들어가 버렸다. 도와주던 경찰도 떠나고 나 혼자 이민국 건물 밖에서 밤바람을 맞대며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또 조사 때문에 내 여권과 항공권을 달라고 하니 도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지 답답했던 것이다.

다시 시간을 죽이고 나서 나온 직원은 그토록 소식을 기다리던 내게 감정 없는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성과가 없어. 가 봐."

정말로 조사는 제대로 해 봤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경과도 가르쳐 주지 않고, 경찰이 부탁했는데도 한 시간 넘게 기다린 나에게 무성의하게 대하는 태도란.

9시가 넘었다. J를 찾는 것도 그렇지만 일단 숙소가 필요했다. 이민국은 도시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영 마뜩찮은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잠자리는 알아봐야 해서 직원에게 숙소에 대해 문의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놀부 심보가 따로 없었다.

"주변을 돌아 봐. 아님 센트로로 가든지."
'누가 그걸 몰라? 조금만 더 세심해지면 어디 덧나나?'

직원은 이쯤에서 끝내자는 듯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고, 망연자실한 난 터벅터벅 이민국을 나왔다. 그 때 이민국 맞은 편 건물에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혹시나 싶어 숙소를 물어볼 참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들은 맞은편에서 나를 보며 진작부터 상황을 알아채고 있었다. 살짝 토라져 서러웠던 난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모두 얘기했더니 별안간 그 중 한 남자가 급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술에 약간 취한 그는 내 얘기를 듣고는 얼굴이 더욱 붉게 상기되었다.

a 나의 영웅 페드로  가난한 노동자이지만 그의 기백은 정말이지 멋졌다고 밖에는.

나의 영웅 페드로 가난한 노동자이지만 그의 기백은 정말이지 멋졌다고 밖에는. ⓒ 문종성


"가 보자고!"

남자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이민국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대문을 쾅쾅 두드리고는 직원을 불러냈다. 직원이 나오자마자 그는 속사포처럼 말을 쏴 대며 그를 나무랐다. 어찌나 흥분했던지 상황이 격해질까 했지만 직원이 당하는 모습이 내심 고소했기에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당신 뭐요?"
"내가 누군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이 친구는 지금 우리나라를 여행하러 왔는데 왜 일처리를 그 모양으로 하냔 말이야! 손님이 왔으면 친절하게 대해 줘야지 이민국이면 다야? 아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는데 당신 너무 하는 거 아냐? 한 시간 넘게 기다렸다고 했잖아!"

그렇지 위풍당당! 남자의 주장은 방파제를 삼켜버리는 파도처럼 거침이 없었다. 직원은 기세가 한풀 꺾인 모습이었다.

'이 사람 뭐지? 대단한데?'

난 목에 핏대를 세우고, 거칠게 밀어붙이는 이 남자의 야성에 흠뻑 매료되고 말았다. 내 편이니깐. 그 거만하던 이민국 직원에게 이렇게 강력한 언사를 대동할만한 직위는 뭘까? 이 동네가 정부 고위 관료나 이런저런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데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이민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맨 파워! 그의 아우라는 흡사 혈기 넘치는 젊은 시절의 판관 포청천을 보는 듯했다.

a 담배 한 모금  생의 끝자락에 유일한 낙일까.

담배 한 모금 생의 끝자락에 유일한 낙일까. ⓒ 문종성


한껏 기세를 올리는 남자의 뒤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나는 지원공격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슬며시 그의 어깨를 잡고는 귓속말 가깝게 나직이 말했다.

"이름이 뭐예요?"
"나? 페드로."
"그래요, 페드로. 있잖아요, 나 지금 숙소도 못 구했잖아요. 그런데 마냥 기다리느라 아직까지 저녁도 못 먹고 이렇게 굶고 있다고."
"뭐? 저녁도 굶었어? 아니, 이 사람아! 이 친구 지금 저녁도 못 먹었다잖아!"

인간의 말초적인 욕구인 식욕의 환경부재를 털어놓았더니 과연 '효과 만빵'이었다. 식사 못한 것이 꼭 직원의 탓은 아니었지만 아까 당한 수모에 비하면 조족지혈. 페드로는 더욱 기세등등해져 이민국 직원을 코너로 몰아붙였다. 직원은 심히 착살스러운 페드로의 주장에 당황해 하면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페드로는 든든한 아군의 우두머리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직원은 끝내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꼴불견 같으니. 한참을 훈계와 비판으로 사자후를 토해낸 페드로가 기어이 이민국이라는 거대한 바위에 계란을 던져 버렸다.

"그나저나 이 친구 숙소는 어떻게 할 거요?"
"알아서 찾아야지 뭐 별 수 있나요?"
"오, 그래? 그럼 이 친구 오늘 밤 우리 집서 재우리다."
"후훗, 그거 불법인 거 아시죠? 신고하면 당신 곤란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법이든 아니든, 신고하든 말든. 알아서 해. 배 째! 어이, 자네. 우리 집으로 가지. 배고픈가?"
"여기 퀭한 눈 좀 보시죠.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그래? 그럼 오늘 밤은 우리 집에 가서 먹고, 씻고, 자고 하자고! 망할 이민국. 자, 가지!"

뜻밖의 제의였다. 강경한 그의 태도가 나로서는 든든하긴 했지만 내 어려움을 일거에 자신이 해결하려는 저 꼿꼿한 기상을 보라. 그렇게 나는 자전거를 끌고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위기의 순간 일면여구로 나를 감싸준 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a 쿠바 판 치킨 버스  뒷자리가 사람들로 꽉 찼다.

쿠바 판 치킨 버스 뒷자리가 사람들로 꽉 찼다. ⓒ 문종성


"그런데 페드로, 당신 뭐하는 사람이에요?"
"나? 난 그냥 막노동꾼인 걸?"
"네? 아니 그럼 왜 이민국 쪽에 오셨나요?"
"친구랑 술 한 잔 걸치러 왔지. 왜?"
"아뇨, 그게 아니라 당신 너무 당당해서 난 또 무슨 고위직인 줄 알고."
"푸하하. 잘못한 게 있으면 직업이 무슨 상관이야! 할 말은 해야지. 배고프지? 아내에게 부탁해서 특별히 너를 위한 스페셜 요리를 부탁할게. 네 친구는 내일 아침 찾아보자고. 걱정 마, 무사할거야."

무엇이 그리 기분 좋은지 페드로는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어 젖혔다. 제 아무리 사회주의 국가라지만 여기도 사람 사는 곳. 그리고 누구나 좀 더 사람답게 대우받고 살기 원한다는 사실. 페드로는 수세에 몰린 내 상황을 반전시키며 이민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었다. 가난한 노동자가 이민국을 상대로 호통 치는 모습. 그 날 밤 페드로의 거침없는 행동은 사회주의의 편협한 시각에 물든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남게 되었다.

a 그란다 호텔  세스뻬데스 광장에 위치해 있는 화려한 건물로 낮에는 뜨겁고 눈부신 느낌이, 밤에는 차갑고 맑은 느낌이 난다.

그란다 호텔 세스뻬데스 광장에 위치해 있는 화려한 건물로 낮에는 뜨겁고 눈부신 느낌이, 밤에는 차갑고 맑은 느낌이 난다. ⓒ 문종성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덧붙이는 글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쿠바 #자전거 여행 #자전거 세계일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유인촌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로 판명되었다 유인촌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로 판명되었다
  2. 2 서울대 경쟁률이 1:1, 이게 실화입니다 서울대 경쟁률이 1:1, 이게 실화입니다
  3. 3 "600억 허화평 재산, 전두환 미납 추징금으로 환수해야" "600억 허화평 재산, 전두환 미납 추징금으로 환수해야"
  4. 4 아내가 점심때마다 올리는 사진, 이건 정말 부러웠다 아내가 점심때마다 올리는 사진, 이건 정말 부러웠다
  5. 5 아무 말 없이 기괴한 소리만... 대남확성기에 강화 주민들 섬뜩 아무 말 없이 기괴한 소리만... 대남확성기에 강화 주민들 섬뜩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