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꾼이지만, 농사꾼이기도 하지요"

경남 고성 영오5일장 풍경과 '투잡' 농민

등록 2008.12.04 14:50수정 2008.12.0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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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사도 하고 농사도 짓는 투잡 농민 서정갑(67)씨
장사도 하고 농사도 짓는 투잡 농민 서정갑(67)씨이승철

“농촌은 그래도 요즘이 돈이 젤 많이 풀리는 시기인기라 예.”


겨울 옷 좌판을 벌인 상인에게 오늘 장사 어땠느냐고 물으니 엉뚱한 대답이 나옵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요즘이 돈이 제일 많이 풀리는 시기라는 말은 장사가 잘 됐다는 뜻이었나 봅니다.

“하모요, 많이 팔았심더. 날마다 오늘 같았으믄 좋겠심더.”

생선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는 오늘 장사 잘했다고 기분이 매우 좋은 표정이었습니다. 국가적인 경제위기 상황이었지만 농촌의 5일장 풍경은 추수가 끝난 계절이서인지 그리 삭막하지 않았습니다.

 파장이 가까운 시간의 썰렁한 5일장 풍경
파장이 가까운 시간의 썰렁한 5일장 풍경이승철

“시골 5일장인데 그냥 지나가면 안 되겠지요? 잠깐 들렀다 가겠습니다. 시골 장날의 정취도 맛보시고 탁배기 한 잔씩 드시고 가시도록 하지요.”

12월 2일 경남 고성에 있는 연화산 등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산으로 가는 길에 지나쳤던 영오면 5일장을 돌아가면서도 그냥 다시 지나칠 수 없었던지 산악회 측에서 시간을 내준 것입니다.


버스에서 내린 40여 명의 등산객들이 우르르 장터 마당으로 들어섰습니다. 오후 4시쯤이어서 파장이던 장터가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보따리 꾸릴 준비를 하던 상인들은 대부분 노인들이었습니다.

“이 고구만 좀 사이소. 맛있는 호박고구인기라.”


장터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할머니가 비닐봉지에 든 고구마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앞장서 내려간 일행이 5천원을 주고 고구마 한 봉지를 사들었습니다.

 겨울옷을 벌여놓은 좌판
겨울옷을 벌여놓은 좌판이승철

 생선을 사는 등산객
생선을 사는 등산객이승철

장터는 도로가에서 안쪽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장터래야 빙 둘러 몇 개의 가게들이 있는 가운데 마당에 건어물과 야채, 과일을 파는 곳이 있었고 젓갈류와 곡식을 파는 곳이 있었지만 매우 초라한 모습이었지요.

“산에 갔다 오시나 봐 예? 어느 산입니꺼?”

장터에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돌아보니 건강해 보이는 노인입니다. 연화산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대답하며 5일장에 장보러 오셨느냐고 물으니 웃으며 옆에 쌓여 있는 건어물들을 가리킵니다.

“많이 팔았심더. 그카고 장사꾼이지만 또 농사꾼이라 예!”

상인이냐며 많이 팔았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하면서도 아리송한 답변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장사하시면서 농사도 하느냐고 물으니, 자신은 지금 비록 장사를 하고 있긴 하지만 본래 직업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 마을 이장도 보고 농지위원도 하고 있으니 본업이 농사꾼 맞지 예?”

그는 인근 마을에서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있으며 마을 이장 일도 하고 있다는 서정갑(67세)씨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농사일을 하면서 장사를 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농사도 짓지만 또 이렇게 5일장마다 짬을 내 장사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경남 고성 영오5일장 풍경
경남 고성 영오5일장 풍경이승철

 생선가게의 커다란 대구 3마리
생선가게의 커다란 대구 3마리이승철

“어디 농사만 지어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꺼?”

그는 농사도 제법 많이 짓는 사람이었지만 장날이면 이렇게 장사를 하여 살림에 보탠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부지런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농부이자 상인이었습니다. 그가 파는 물건은 대부분 건어물과 과일 등 농수산물이었는데 이날은 장사가 잘 되어 60여만 원어치나 팔았다고 합니다.

장터가 썰렁한 모습인데 어떻게 그리 많아 팔았느냐고 물으니 낮에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요즘이 농한기여서 장날이면 대부분 노인들인 농촌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장터로 몰려든다고 합니다.

그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귤 두 개를 꺼내 맛보라고 권합니다. 물건을 사는 것도 아닌데 그냥 얻어먹을 수 없어 사양했지만 막무가내로 권합니다.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이렇게 산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시골 5일장에서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디 보통 인연이냐는 것이었지요.

 영오면 거리풍경
영오면 거리풍경이승철

 시계점과 문구점, 그리고 다방이 있는 풍경
시계점과 문구점, 그리고 다방이 있는 풍경이승철

비록 작은 귤 2개지만 그렇게 소박한 정을 나누고 싶어 하는 그에게서는 장사꾼이 아니라 순박하고 정겨운 시골 농부의 정이 가득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와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오다가 좌판을 벌여놓은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할머니도 전업 장사꾼은 아니었습니다. 이곳 5일장은 매 2일과 7일에 서는데 이날은 대부분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가난하게 살아가는 농촌이지만 그래도 가을걷이가 끝난 요즘이 그래도 돈이 제일 많이 풀리는 계절이기 때문이랍니다. 추수한 곡식을 내다 팔아 겨우살이 준비도 하고 모처럼 몸보신이며 입고 싶었던 따뜻한 옷 한 벌이라도 장만하는 시기가 바로 요즘이라고 합니다.

등산객들은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농산물이며 새우젓도 샀지만 싱싱한 도다리와 광어, 그리고 갈치를 제일 많이 샀습니다. 그 사이 일행 두 사람은 순대국밥 집에서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어슬렁거리며 나왔습니다.

 빈집과 빈 우물, 그리고 마당의 잡초와 감나무도 쓸쓸한 풍경입니다
빈집과 빈 우물, 그리고 마당의 잡초와 감나무도 쓸쓸한 풍경입니다이승철

길가에 있는 필름가게는 카메라용 필름이 아니라 농사용으로 쓰는 두루마리 비닐을 파는 가게였습니다. 허술한 간판을 단 학용품 가게와 시계점이 시골 면소재지의 옛 정취를 풍겨주고 있어서 정겹습니다. 그러나 2충에 자리 잡고 있는 다방은 조금 낯선 풍경이었지요,

버스로 돌아가는 길 안쪽에 잡초가 우거진 허술한 집이 보여 다가가보니 빈집입니다. 말라비틀어진 잡초가 뒤엉킨 마당가에는 우물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시커멓게 썩은 물만 고여 있었지요. 울안 감나무에 붉게 익은 감 몇 개가 남아 있는 모습이 더욱 쓸쓸한 풍경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승철 #영오5일장 #서정갑씨 #장사꾼 #농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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