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햇살은 봉창에 머물고...

[윤희경의 山村日記] 빈방에 혼자 앉아

등록 2008.12.06 12:23수정 2008.12.06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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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가 약 오른 고추처럼 독하고 맵습니다. 게다가 칼바람까지 세차게 몰아쳐 체감온도는 빈호주머니만큼이나 속살을 시리게 파고듭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오는 것을 '득하다'라고 하는데 오늘 추위가 하도 매워 온 몸에서 득득 뼈마디가 부서질 듯 저려옵니다. 산골짝 바람이 내리칠 때마다 언 나뭇가지들을 '솨솨' 쥐어 뜯고, 대문에 걸려있는 풍경(風磬)들이 달카당거리며 죽겠다 아우성입니다.

 

a  세찬 칼바람에 풍경이 달카당거리며 죽겠다 아우성입니다.

세찬 칼바람에 풍경이 달카당거리며 죽겠다 아우성입니다. ⓒ 윤희경

세찬 칼바람에 풍경이 달카당거리며 죽겠다 아우성입니다. ⓒ 윤희경

한파가 밀려와 나무토막들이 탱탱하게 얼어붙어 달달한 떨림을 보일 때일수록 장작패기는 더욱 신명이 납니다. 숨을 몰아쉬며 맑은 햇살 아래 알몸을 깔고 있는 나목(裸木)들을 바라보면 어떤 승리감 같은 것이 솟아 건강하게 살아있음을 확인하곤 합니다. 장작들을 나뭇광에 쌓아놓으면 집안 가득 훈기가 돌아 배가 저절로 불러옵니다. 잘 정돈된 장작더미만 봐도 이 정도의 강추위는 이겨낼 듯싶습니다.

 

a  장작을 싸놓은 처마밑. 주렁하게 매달려 있는 것은 시래기입니다.

장작을 싸놓은 처마밑. 주렁하게 매달려 있는 것은 시래기입니다. ⓒ 윤희경

장작을 싸놓은 처마밑. 주렁하게 매달려 있는 것은 시래기입니다. ⓒ 윤희경

대낮부터 군불을 지펴놓습니다. 방바닥이 서서히 더워오기 시작하면 냉랭한 온기가 돌아 구들장을 절절하게 달궈냅니다. 세찬 칼바람 소릴 들으며 아랫목에 이불을 깔고 몸을 녹여봅니다. 침대나 보일러에서 느껴보지 못한, 애틋하게 저려오는 그 옛날의 따스함과 추억만으로도 부러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a  군불 때기, 굴뚝을 타고 온 연기가 바람에 까치집을 넘어갑니다.

군불 때기, 굴뚝을 타고 온 연기가 바람에 까치집을 넘어갑니다. ⓒ 윤희경

군불 때기, 굴뚝을 타고 온 연기가 바람에 까치집을 넘어갑니다. ⓒ 윤희경

 

바깥세상은 아우성이어도 산촌 오막살이 방안은 따사롭습니다. 빈방에 홀로 앉아 있으려니 지난 가을에 발라놓은 창문이 고맙기만 합니다. 하얀 창살 사이로 맑은 햇살이 스며들어와 방안이 한결 깨끗하고 정갈해 보입니다. 햇살이 하도 맑아 서러움 같은 것이 북받쳐 오르다가도 금세 넉넉한 마음의 여백(餘白)같은 것이 온 몸에 되비쳐옵니다.

 

a  겨울 햇살은 창가에 머물고, 맑고 따스한 햇살이 봉창에 비쳐 따스하게 겨울을 녹여냅니다.

겨울 햇살은 창가에 머물고, 맑고 따스한 햇살이 봉창에 비쳐 따스하게 겨울을 녹여냅니다. ⓒ 윤희경

겨울 햇살은 창가에 머물고, 맑고 따스한 햇살이 봉창에 비쳐 따스하게 겨울을 녹여냅니다. ⓒ 윤희경

그 동안 농사핑계로 밀쳐놓았던 고서들을 들척이다 옛 성현들의 목소릴 듣습니다.

 

깨달음을 얻어 깊이 생각하고

명상에 전념하는 지혜로운 이는

세속을 떠나 고요를 즐긴다.

신들도 그를 부러워한다.

 

'세속을 떠나 고요와 명상을 즐기면 신들도 부러워한다'는 구절이 하도 좋아 읽고 또 읽어봅니다.

 

전쟁터에서 싸워

백만 인을 이기기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승리자다.

 

밖에서 생긴 녹이

쇠에서 나서 쇠를 먹어 들어가듯

방종한 자는 자기 행위 때문에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진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했던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모두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 일, '자신을 이기라'는 말 한마디가 강추위만큼이나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산촌(山村)에 살아 품앗이로 술을 가까이하다 보니 이젠 주독(酒毒)이 내장을 녹아내리나 봅니다. 얼마 전 종합검진에 '지방간 의심, 재검요'라는 빨간 글씨의 진단 결과 통보를 받고는 정신이 번쩍합니다.

 

'지방간이 무슨 병이지요?'하자 나보다 이십년은 젊어 보이는 의사는 그것도 아직 모르냐 싶게 무식한 촌부(村夫) 얼굴을 빤히 쳐다봅니다. 시골이라고 무절제한 생활을 하다가는 소식도 없이 염라대왕이 간을 회수해 갈 것이라며 겁을 덜컥 줍니다. 병원문을 나서며 '동물의 왕 사자도 외부로부터 침해를 받는 게 아니라, 몸에 자생하는 벌레로 생명을 잃게 된다'는 말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새삼 되뇌어봅니다.

 

a  토종 문고리, 하도 잡고 여닫아 반들반들합니다.

토종 문고리, 하도 잡고 여닫아 반들반들합니다. ⓒ 윤희경

토종 문고리, 하도 잡고 여닫아 반들반들합니다. ⓒ 윤희경

산 속에 들어와 절제를 하며 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던가. '혼자 있을수록 깨어 있어야 해.' 내 하잘 것 없는 영혼의 나락을 칼바람에 실어 보내며 빈 방에 홀로 앉아 자신을 반추해 봅니다.

 

얼마나 장작을 패고 군불을 더 지펴야 이 영혼과 육신을 깨끗이 태워버릴 것인가. 밖에는 아직도 칼바람 불어와 벌거벗은 나목들을 저리 쥐어뜯고 있는데….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 북집 네오넷코리아, 농촌공사 웰촌 전원생활,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쪽빛 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이야기를 찾아오시면 농촌과 고향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2008.12.06 12:23ⓒ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 북집 네오넷코리아, 농촌공사 웰촌 전원생활,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쪽빛 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이야기를 찾아오시면 농촌과 고향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겨울햇살 #장작 #군불 #봉창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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