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부 한 세상, 색에 미쳤노라

[서평] 백금남 <소설 신윤복>

등록 2008.12.09 20:44수정 2008.12.10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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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소설 신윤복 ⓒ 미래인

김홍도나 신윤복 하면 풍속화의 대가 정도로만 여기고 있던 내가 그들이 그렸다는 춘화를 처음 보게 된 게 교실에서였다. 그것도 수업 시간 중에, 한 아이가 손을 들고 보여준 잡지 속에서.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아이가 손을 들고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이 풍속화 말고 또 있는 거 아시냐는 질문을 했다. 풍속화 이외에 그들이 그린 그림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던 나는 당연히 모른다고 대답했다.


대답을 듣고 난 그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잡지를 하나 들고 나왔다. <계간 미술>이었다. 그 아이가 책을 들고 나오는데 아이들 반응이 이상했다. 보여주면 안 된다며 손사래 치는 아이, 이상한 소리 내며 손으로 얼굴 가리는 아이, 킥킥대며 웃는 아이….

<계간 미술> 잡지를 건네받아 보는 순간 깜짝 놀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킥킥대면서도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눈치를 보고 있었다. 책 가지고 나온 아이도 눈 말갛게 뜨고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무턱대고 화를 낼 상황이 아니란 생각에 이 책 어디서 났는지, 왜 이 책을 가지고 나왔는지 등등을 아이에게 묻고 들여보냈다. 삼촌이 보던 책이고, 수업 듣다가 그냥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어 가지고 나왔다고 했다. 그 시간의 기억은 오래 남아 춘화를 그렸다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이미지는 그 뒤로 한동안 내 잠재의식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열혈 대장부 신윤복이 여자라고?

<소설 신윤복>의 출간 시기가 공교롭게도 사극 <바람의 화원>이나 영화 <미인도>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이 신윤복에게 집중될 때였다. 드라마나 영화 속 신윤복이 남장여인이었을까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게 바로 드라마의 위력이다. 주몽 드라마에 빠져 살던 이들은 주몽하면 송일국이 먼저 떠오르고, 왕건 드라마를 좋아하던 이들의 의식 속에는 왕건하면 최수종이 먼저 생각난다. 그래서 사극은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적어도 시청자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왜곡 전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한반도> 영화에서처럼 민비는 일본 사무라이들의 칼날 앞에서 당당하지 못했다. 

<바람의 화원>이나 <미인도>에서 설정했던 남장여인 신윤복에 대해 <소설 신윤복>의 작가는 어떤 입장인지 잠시 살펴보자.

무한한 상상력으로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저작물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김홍도의 필선이 남성적이라면 신윤복의 필선은 여성적인 세필이라서 그런 상상력이 나오게 된 듯싶다. 하지만 신윤복은 어디로 보나 여자가 아니라 열혈 대장부였다.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선조의 예술성이 요즘 작품들이 내세우는 섹슈얼리티에 녹아버려 와전된 감이 없지 않은 게 안타깝다. (작가의 말 중에서)

<바람의 화원>이나 <미인도>와는 달리 작가는 열혈 대장부 신윤복의 삶을 형상화했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는 오랜 기간 조선의 회화사를 공부했다. 신윤복의 아버지도 화원이었는데, 초상화와 속화에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화원이 된 신윤복에 대한 기록은 그의 명성에 비해 보잘 것 없다. <청구화사>란 책에 "동가식서가숙하며 지냈다"는 정도만 전해진다.

열혈 대장부 신윤복의 예술 세계

<바람의 화원>이나 <미인도>에서 신윤복을 남장여인로 변신시킨 동기가 기녀들의 모습이나 남녀의 성을 소재로 하는 그림을 즐겨 그렸던 그의 그림에서 풍기는 느낌 때문이다. 하지만 신윤복을 남장여인으로 변신시킨 작품에서 궁극적으로 부각된 것은 섹슈얼리즘이고 그로 인해 사라져버린 것은 신윤복의 예술혼이라고 작가는 비판한다.

부친의 뒤를 이어 도화서 화원이 된 신윤복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못했다. 그림 솜씨를 인정받아 현감까지 역임했던 김홍도와는 달리 신윤복은 당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도화서 소속 화원들은 자신들의 예술혼을 불사르기 보다는 자신들이 소속된 도화서에서 요구하는 그림을 더 많이 그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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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불교가 천대되던 조선 시대, 스님이 쓰는 송낙과 법복 바지중의를 들고 있는 여인네가 기다리고 있는 건 무엇일까? ⓒ 미래인


하지만 신윤복은 도화서에서 요구하는 색이나 선을 따라가지 않고 독자적 그림을 고집한다. 청록색 화폭에 기녀들을 등장시키는 그림은 그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는 스승이나 선배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윤복은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고수한다. 그러다보니 도화서에서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진다.

결국 도화서를 떠나 동가식서가숙하는 생활을 하면서 생계를 위해 투전을 하고 춘화를 그려 팔기도 한다. 천재는 시대와 불화한다고 했던가. 도화서의 정해진 규격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신윤복은 철저한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창조하면서 예술혼을 불사른다.

조선 후기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는 무너지고 있었고, 성리학 중심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럴수록 양반들은 무너지는 질서와 가치에 매달리고 집착했다. 그런 양반들의 허위와 위선을 향해 신윤복은 거침없이 야유와 조롱을 보냈다.

시대와 불화했던 천재 화원 이야기

활짝 피어난 금강초롱 같은 <미인도>에서부터 노골적인 성행위까지 묘사한 춘화에 이르기까지 신윤복의 그림은 다양하다. 동가식서가숙하면서 그린 다양한 그림을 통해 그는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창조했다. 삿갓 쓴 방랑 시인이 시를 통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창조했던 것처럼.

열혈 대장부 신윤복이 도화서 및 시대와 불화하면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을 솜씨 있게 그려낸 작가의 역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대와 불화하며 살아간 천재 화원 신윤복의 삶을 읽는 재미와 더불어 김홍도, 강세황, 강희안, 심사정, 이상좌, 김득신, 윤두서 등의 작품을 맛깔스러운 해설과 더불어 볼 수도 있다. 오랜 기간 조선 회화사를 공부했던 작가의 내공이 소설 곳곳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백금남 / 미래인 / 2008.11 / 1만1000원


덧붙이는 글 백금남 / 미래인 / 2008.11 / 1만1000원

소설 신윤복

백금남 지음,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2008


#신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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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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