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4살 손자에게 질서를 배우다

손자에게 노상방뇨 시킬 뻔한 사연... "우협아, 미안"

등록 2008.12.11 11:15수정 2008.12.1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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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할머니 오줌 마려워."

"우협아 참을 수 있어?"

"아."

 

손자는 몸을 비틀면서 다급함을 알린다.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손자와 화장실이 있다는 밖으로 나왔다. 마트에서 화장실은 제법 멀었다. 화장실로 가는 길에 인적이 드물고 좀 외진 곳을 찾았으나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급한 김에 길에서 적당히 실례를 시킬 생각이었다. 4살이니깐.

 

'가끔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길에서 볼일을 보게 하는 걸 보곤 했는데, 바로 이래서였어.' 이젠 그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그나마 조금은 한적한 곳이 눈에 띄었다. 손자보고 "우협아 저기에서 오줌 눌까?" 했더니 "할머니 창피해. 여기서 오줌 누면 안 돼. 화장실가야 해"한다.

 

'아이고 이런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4살짜리 손자만도 못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내가 되레 창피해졌다. 그리고 '이 녀석, 유치원을 다니더니 제법이네'하는 생각도 들었다. 녀석의 반응이 그러니 난 녀석의 손을 잡고 뛰어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2층에 가니 남자화장실이 있었다. 여자 화장실이라면 나도 함께 들어 갈 수있는데.

 

손자보고 "할머니 여기 있을게 우협이 혼자 들어가서 오줌 누고와"라고 했더니 손자는 "할머니도 같이 들어가"하는 게 아닌가. 그때 마침 어느 남자분이 볼일을 보고 화장실에서 나온다. 난 그때다 싶어 "봐 여기는 남자만 들어가는 화장실이야. 할머니가 들어가면 아저씨들한테 혼나. 할머니가 옷 벗겨줄게"하니 녀석은 힐끔 힐끔 나를 쳐다보면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할머니 어디 가지 말고 문열어 놓고 그 앞에 서있어"라고 한다.

 

내가 그 앞에 서있자  녀석은  안심이 되었는지 씩씩하게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다. 문을 열고 서있으려니 난감했다. 들어가려는 남자도 나오려는 남자도 잠시 머뭇거린다. 녀석이 들어가서 볼일을 보려고 소변기 앞에 섰다.  쬐금한 녀석이 무슨 볼일이 이렇게 긴지 쉽게 안 나온다.

 

"우협아 아직 멀었어?"

"아니, 할머니 이젠 문 닫아도 돼."

손자를 데리고 다니다 보니 남자화장실 앞에서 큰소리를 다 질러보고.

 

내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화장실 문을 열고 서있으니 화장실을 들어가려는 젊은 군인이 멈칫한다. 난 얼른 화장실 문을 닫고 좀 더 멀찌감치 떨어져 서있었다. 그제야 녀석이 옷을 반은 올리고 반은 아래에 걸친 상태로 나왔다. "이리와 할머니가 옷 잘 입혀줄게. 화장실에서 우협이 혼자 볼일 잘 봤네. 옷도 안 적시고." 녀석은 들어갈 때의 불안감은 어느새 떨치고 싱글 싱글 웃으면서 "응 할머니" 한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녀석은 한걸음에 달려간다. 달려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한결 경쾌해 보였다. 볼일을 보고나니 몸이 개운했나 보다. 4살이라고 녀석을 편하고 만만하게 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기사 요즘 아이들은 어려도 자신의 의견과 생각이 정확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싫은 것은 싫다고 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표현을 잘 하는 편이란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기는 하다. 

 

그리고 보니 왜 질서·규칙 등을 큰 것부터 가르치려고 했었을까? 작은 것부터 몸에 익힐 수 있도록 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급한 일이 코 앞에 닥치니 이론과 실질과 그렇게 차이가 생기고 만 것이다. 

 

어린 4살이라고 편하게 생각하고 노상방뇨를 시키려했던 내가 새삼 부끄러웠다. 3살 손자에게 80살 할아버지가 배운다더니.

 

"우리 우협이 노상방뇨 시켜 하마터라면 창피할 뻔했지. 할머니 생각이 짧았다. 다음부턴 조심할게!"

2008.12.11 11:15 ⓒ 2008 OhmyNews
#노상방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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