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힌 말과 삶 (19)

[우리 말에 마음쓰기 507] ‘자신의 존재 자체’, ‘김지하의 존재’, ‘단어가 존재’

등록 2008.12.27 13:04수정 2008.12.27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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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고

 

.. 무슨 일이 있어도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고 말 것 같은, 그런 기분마저 들었다 ..  《후쿠오카 켄세이/김경인 옮김-즐거운 불편》(달팽이,2004) 38쪽

 

 “목표(目標)를 달성(達成)해야”는 “목표를 이뤄야”나 “꿈을 이루어야”나 “뜻한 바를 이루어야”로 다듬습니다. “부정(否定)되고 말 것 같은”은 “흐지부지 될 것 같은”이라든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 같은”쯤으로 풀어냅니다. ‘기분(氣分)’은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느낌’이나 ‘생각’으로 손질하면 한결 낫습니다.

 

 ┌ 자신의 존재 자체가

 │

 │→ 나라는 사람이

 │→ 내 삶이

 │→ 내가 왜 이러는지

 │→ 내가 왜 사는지

 │→ 내가 무엇을 하는지

 └ …

 

 보기글은 통째로 “무슨 일이 있어도 뜻한 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나라는 사람이 못난이가 되고 말 듯한,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로 고쳐쓸 수 있습니다. 보기글 뒤쪽을 “내 삶이 깡그리 무너지고 말 듯한,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로 고쳐 보아도 괜찮습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고 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까닭”이기도 할 테고, “무엇보다 내가 왜 사는지”를 말하는 셈이기도 할 테지요.

 

 우리들이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면서 왜 살아가는가를 가만히 되새기고 헤아리는 일은 큰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발자취를 뒤돌아보거나 헤아리면서 지난날 잘잘못을 곱씹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을 어떻게 해야 좀더 슬기로우면서 다부지게 맞이할 수 있는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삶을 추스르고 마음을 다스리고 매무새를 추스릅니다. 이러는 동안 생각을 다잡기도 하고, 말과 글을 갈고닦기도 합니다. “살아가는 나”를 생각하고, “살고 있는 나”를 살피며, “숨쉬고 있는 나”를 느끼는데다가, “두 다리를 땅에 디디고 있는 나”를 되돌아보는 가운데, “자전거를 타는 나”를 들여다보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대로 삶을 꾸려 갈 나”란 어떤 모습인가를 그려 보게 됩니다.

 

 

ㄴ. 김지하의 존재

 

.. 투옥도 불사하고 시를 쓰던 김지하의 존재는 나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  《이응노ㆍ박인경ㆍ도미야마/이원혜 옮김-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삼성미술문화재단,1994) 7쪽

 

 “투옥(投獄)도 불사(不辭)하고”는 “감옥살이도 마다하지 않고”나 “감옥살이도 꺼리지 않고”로 다듬습니다. “붙잡아 가두어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라든지 “감옥에 가두어도 꺾이지 않고”로 다듬어도 잘 어울립니다.

 

 ┌ 김지하의 존재는

 │

 │→ 김지하라는 시인은

 │→ 김지하라는 사람은

 │→ 김지하 이 사람은

 │→ 김지하 같은 사람들은

 │→ 김지하는

 └ …

 

 “김지하 같은 사람이 있은 일”이 글쓴이한테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독재자 박정희 씨가 이 나라를 더욱 어둡고 숨막히게 하던 때, 꿋꿋하게 독재자를 나무라고 꾸짖으면서 시를 썼으니, 우리와 이웃한 일본땅 지식인들이 보기에 무척 놀라우면서 대단하다고 느끼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한국땅에서 살던 한국사람이 보기에도 놀랍고 대단했으니까요.

 

 비록 그 뒤로 보여준 모습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란 어떤 매무새와 넋으로 글을 써야 하는가를 일깨웠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꿰뚫어보아야 하는가를 온몸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머리에 지식 한 줌 담은 사람은 이 지식을 어떻게 삭여서 이웃들하고 나누어야 하는가를 말이 아닌 몸뚱이로 밝혔습니다.

 

 처음과 끝이 한길이라면 그지없이 아름다울 텐데, 아쉬우나마 지금이라도 아니면 앞으로라도 처음과 끝이 한길인 지식인 한 사람쯤 이 땅에서 당차게 살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즐거우랴 꿈꾸어 봅니다.

 

 

ㄷ. 개그맨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도

 

.. 그보다 훨씬 뒤에 어린 윤복희가 가수 활동을 하던 무렵에도 대한민국에는 ‘개그맨’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안정효-가짜 영어 사전》(현암사,2000) 15쪽

 

 “훨씬 뒤”라고 쓰니 반갑습니다. ‘후(後)’나 ‘이후(以後)’가 튀어나오지 않아서요. “가수 활동(活動)을 하던”은 “노래를 부르던”으로 손봅니다. ‘단어(單語)’는 ‘낱말’이나 ‘말’로 고쳐 줍니다.

 

 ┌ 이런 단어가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

 │

 │→ 이런 낱말이 있지도 않았기 때문

 │→ 이런 말은 쓰이지도 않았기 때문

 │→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

 │→ 이런 말은 아무도 안 썼기 때문

 │→ 이런 말은 아무도 몰랐기 때문

 └ …

 

 우리한테 ‘존재’라는 한자말이 쓰인 때는 언제부터였을까 궁금합니다.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곳곳에 퍼지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들은 우리 뜻이나 느낌이나 마음이나 생각이나 넋이나 얼을 우리 말과 글로는 나타낼 길이 없어서, ‘存在’와 같은 한자말을 받아들이게 되었을까요. 우리 말과 글로도 넉넉히 우리 뜻과 넋을 담아낼 수 있었는데에도 ‘존재’를 슬그머니 받아들였을까요.

 

 우리들 힘으로만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다른 이한테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들 두 손으로는 할 수 없는 노릇이라면 이웃한테 도움을 바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 힘으로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인데 도움을 받으려 한다면, 또 우리 두 손으로 너끈히 치러낼 수 있는 노릇인데 자꾸자꾸 딴전을 피우거나 게으름을 피운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 말은, 우리 글은, 우리 마음은, 우리 머리는, 우리 넋은, 우리 슬기는 어떻게 되어 버릴까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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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7 13:04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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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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