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덮인 山골짝에 해(年)가 저문다

[윤희경의 山村日記] 새 봄을 기다리며..

등록 2008.12.28 09:41수정 2008.12.28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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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눈덮인 산골짝에 해가 저문다.

눈덮인 산골짝에 해가 저문다. ⓒ 윤희경

눈덮인 산골짝에 해가 저문다. ⓒ 윤희경

 

산촌(山村)엔 눈이 한 번 쌓이면 녹을 줄 모른다. 눈은 오는 대로 쌓이고 쌓여 장설(丈雪)로 웅크리고 있다가 봄이나 돼야 해토를 하며 몸을 풀어 내린다. 돌각 담 너머로 눈 쌓인 산골짝과 들판을 바라보니 올해도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다.

 

순백에서 오는 고독과 맑은 영혼, 산을 넘고 하늘에 닿는다. 갑자기 하얀 설움과 적막감 같은 것이 북 바쳐 오른다. 그 동안 가졌던 모든 것과 가지려 했던 것, 만났다 헤어진 사람들과 내안에 품고 있던 번뇌 망상 등 어지러운 것들이 용해되어 눈밭을 달리고 있다.

 

a  눈 속에 파묻힌 배추들, 미처 추수를 못한 지난 가을 내 분신들이다.

눈 속에 파묻힌 배추들, 미처 추수를 못한 지난 가을 내 분신들이다. ⓒ 윤희경

눈 속에 파묻힌 배추들, 미처 추수를 못한 지난 가을 내 분신들이다. ⓒ 윤희경

 

오늘따라 얼음 속을 뚫고 낮은 곳으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시냇물 소리가 시리게 와 닿는다. 저녁햇살아래 다소곳 누워있는 처마 밑으론 키가 삐죽 자라난 고드름이 대롱대롱 매달려 눈물雪水 툭툭 흘리고, 하얀 속살 아래로 어린 시절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 되살아난다.

 

‘수수께끼 하나낼까?’

‘어려운 거 쉬운 거.'

‘아주 쉬운 걸로.'

‘크면 클수록 키가 작아지는 건 뭐.’

‘….’

 

a  거꾸로 키가 크는 수정고드름

거꾸로 키가 크는 수정고드름 ⓒ 윤희경

거꾸로 키가 크는 수정고드름 ⓒ 윤희경

 

봉당과 앞마당을 서성이다 눈 덮인 텃밭과 장독대와 김치광을 기웃거리며  뒤 곁을 한 바퀴 돌아 나온다. 장독들은 ‘제 맛 하나’를 위해 자신을 통째로 드러내놓고도 눈을 맞으며 묵묵히 서있다.

 

a  '제맛 하나'를 위하여 알 몸으로 이 겨울을...

'제맛 하나'를 위하여 알 몸으로 이 겨울을... ⓒ 윤희경

'제맛 하나'를 위하여 알 몸으로 이 겨울을... ⓒ 윤희경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켜켜이 쌓인 눈발 위에 한 영혼이 서있다.

돌아보면 한 해를 지나온 발자국만 남아 가슴이 저려온다.

 

창고에 그득한 감자와 고구마, 구덩이 속 무 배추, 봉당에 장작 비늘, 뒤 곁 시래기들, 이만하면 한 해를 보내도 아쉬움이 없을 듯하고….

 

a  시래기가 눈을 맞고 있다.

시래기가 눈을 맞고 있다. ⓒ 윤희경

시래기가 눈을 맞고 있다. ⓒ 윤희경

 

처마 밑 대봉 곶감, 곰삭은 김치, 여름에 숨겨 논 매실주가 한참 익어가고 있다. 이런 날엔

친구 하나 찾아오면 참 좋겠다. 내 그를 위해 황토방 군불 때 아랫목이 절절하는 동안 많은 눈 또 내려 푹푹 쌓이면 더 좋겠다.

 

a  산수유, 눈 속에 봄을 기다리고 있다.

산수유, 눈 속에 봄을 기다리고 있다. ⓒ 윤희경

산수유, 눈 속에 봄을 기다리고 있다. ⓒ 윤희경

 

무슨 인연으로 마당가 산수유는 아직도 열매를 털어내지 못하고 붉은 마음을 쏟아내고 있을까.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에서일까. 벌써 봄을 기다리고 있을게다.

 

세상 살아가는 이치나 거스르지 말며 나도 봄을 기다릴 수밖에….

덧붙이는 글 | 무자년 한 해 보잘 것 없는 글을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독자님들께 고마움을 표합니다.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 농촌공사 웰촌포탈 전원생활, 북집네오넷코리아,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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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8 09:41ⓒ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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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산촌 풍경 #그드름 #장독대 #시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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