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완화와 감세, 민영화, 금융화, 친(親)기업, 개발주의를 공약으로 내세운 이명박 정부의 임기 초부터 이런 공약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심각한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사진은 지난 5월 23일 공기업 민영화 방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청와대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다는 방패를 팔면서 동시에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다는 창을 팔았던 고대 중국인을 21세기 경제정책에서 되살린 사람이 있다면, 그 원조는 단연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좌파 신자유주의'란 말이 바로 그것이다. 도대체 좌파이면서 신자유주의자가 현실에서 있을 리 없고, 신자유주의자이면서 좌파가 있을 수 없는데도 좌파 신자유주의를 정책으로 집행하는 경우가 현실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순의 진실은 '가짜 좌파 진짜 신자유주의'로 판명 났다.
그런데 이 '좌파 신자유주의' 정책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그야말로 모순으로 뒤범벅된 경제정책을, 평상시도 아니고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 상황에서 '위기 극복 대책'이라고 밀어붙이는 현실이 2008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바로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이 그렇다.
① 그린 개발 정책: 4대강 정비사업과 같은 개발정책을 밀어붙이면서도 녹색성장을 주장하는 경제 정책 ② 감세 재정 확대 정책: 감세 기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대규모 재정적자를 감수하고 재정지출을 확대하겠다는 재정 정책 ③ 개입 민영화 정책: 은행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고 채권매입에 나서는 등 무차별 정부개입을 하면서도 산업은행 민영화 강행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금융 정책 ④ 감원 일자리 창출 정책: 공기업 직원을 약 1만 9000명 정도 감원하면서도 새로이 청년 인턴제를 도입하고 사회적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노동 정책이 대표적인 사례다.
어째서 이런 모순된 정책들이 탄생하게 된 것일까.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규제완화와 감세, 민영화, 금융화, 친(親)기업, 개발주의를 공약으로 내세운 이명박 정부의 임기 초부터 이런 공약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심각한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규제완화가 아니라 정부개입과 규제강화가 요구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감세가 아니라 재정지출 확대가 필요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민영화가 아닌 국유화, 공공화 방향이 글로벌 대세가 되었으며, 친(親)기업이나 개발주의가 아니라 고용대란을 막을 고용대책이 절실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러다 보니 애초의 공약과 현재 상황에 대한 위기수습책이 점점 더 양립 불가능해지고 있다.
위기는 일시적이고 신자유주의는 영원하다는 믿음자본주의 역사를 뒤바꿀 엄청난 금융위기와 세계 경제 침체 상황에서 기존의 경제정책들이 순식간에 쓰레기더미에 묻혀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가 되고 있는 마당이니 기존 정책을 고수하지 않는다고 해서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부시 대통령마저 민주당에서조차 꿈꿀 수 없는 강력한 개입주의 정책을 채택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모순을 없애고 위기 극복 대책을 세우는 방법은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기존 정책을 폐기하고 위기 상황에 맞는 대책을 새로 수립하면 된다. 비상적인 위기 상황에 맞는 비상적인 대책이란 그런 것이다. 이미 전 세계 정부들이 실제로 이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우리 정부만이 기존의 규제완화, 감세, 민영화, 개발주의 같은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기에 위기대처를 위한 정책을 접목시키다 보니 도저히 합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희한한 정책방안들이 탄생하고 있다. 이런 모순된 정책들은 위기를 진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폭시킨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정부는 스스로 자신의 정책이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일단, 기존 정책을 전혀 수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고안했거나 외국에서 수입한 녹색성장, 재정확대, 개입주의나 고용창출 정책 등은 단지 '일시적'인 위기를 넘기기 위한 지극히 '일시적'인 요법일 뿐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정부는 현재의 글로벌 경제위기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고, 조만간 수습과 회복국면으로 전환되면 다시 신자유주의적 경제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기존 정책을 확고히 고수하면서 일시적인 위기를 넘기기 위해 잠시 모순된 정책들을 차용하고 있는 것뿐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어쨌든 산업은행은 민영화한다?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산업은행 민영화 정책이다. 촛불 시위가 정점을 달리고 있던 2008년 6월 2일, 민영화에 대한 저항이 비교적 적었던 금융부분, 그 가운데 산업은행 민영화 방안이 전격적으로 발표되었다.
그 핵심 방안은 2008년 안에 산업은행을 KDF(한국개발펀드)와 산은지주회사로 분할하고, 2009년에 산은지주회사를 주식시장에 상장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2010년까지 산업은행에 대한 정부 지분 49퍼센트를 매각한 뒤, 현 정부 임기가 만료되기 전인 2012년까지 나머지 지분 51퍼센트를 모두 민간 자본에게 넘겨 민영화를 완료한다는 것이다(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신자유주의 이후의 한국경제>, 2008).
산업은행 민영화를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정부의 계획은 야심만만했다. 자산 규모 100조 원대의 산업은행과 함께 비슷한 규모의 기업은행, 그리고 200조 원 규모의 우리금융지주회사를 통합해 초대형 메가뱅크로 육성하겠다거나, 아니면 산업은행이 40퍼센트 지분을 보유한 대우증권과 통합하여 전문 투자은행으로 키우겠다는 구상 등을 다양하게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부는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실제로 2008년 9월 말, 청와대가 한나라당에 보낸 중점관리 45개 법안 가운데 '한국산업은행법' 개정안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당시는 9월 중순으로 산업은행 민영화의 모델이었던 리먼브러더스와 메릴린치가 파산하거나 다른 회사에 인수되면서 금융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급격히 확산되던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