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을수록 몸이 아프면 회복력도 떨어지는가 보다. 지난 연말부터 몸이 기울더니 근 열흘 넘게 호되게 앓았다. 며칠 전 토요일, 겨우 몸을 일으키니 자꾸 밖으로 눈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겨울 전원에는 할 일이 많지 않다.
그래서 토요일에는 눈 내리는 무등산을 다녀오고 일요일은 그런 대로 쉬었지만, 다시 하룻밤을 자고나니 눈 내리는 바깥 풍경이 자꾸 나를 밖으로 당겼다. 마침 전북 정읍 지방에 대설 경보가 내렸다가 해제 되었다는 뉴스도 있어 가까운 역에 전화를 해서 시간을 맞추고 서둘러 집을 나선 것은 어제(12일) 아침 10시였다.
나는 여행이란 장시간 계획하고 준비할수록 복잡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준비로 집을 나서는 편이다. 한 끼의 식사는 발길 닿는 곳에서 해결하고, 부족한 것은 현지 조달을 하면 되지만 문제는 교통편이었다. 차를 가지고 가면 주차문제 안전 사고 문제 등 신경 쓸 일도 많지만 그래도 내 계획대로 시간을 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피곤함을 무릅쓰고 차를 끌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어제는 눈이 온다는 핑계로 과감하게 차를 두고 몸만 나서기로 했다.
집 가까운 곳에서 전철을 타고 송정리역에 도착하니 아내는 아직 내가 어디로 방향을 잡은 것을 모르는지 대전까지 표를 끊을 거냐고 묻는다. “눈에 갇힌 내장사로 가세.” 두말없이 표를 사온 아내는 두 사람의 요금이 만원도 안 된단다. 특별대우라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기차에 올라 창 밖을 보니 천지는 하얗고 함박눈은 계속 날린다. 눈꽃 열차가 따로 없다. 우리들만의 눈꽃 관광열차가 된 셈이다. 어쩌면 주변에는 생사의 기로에서 몸을 낮추고 숨을 죽인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의 모습까지 헤아리기에는 차창 밖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정읍역에 내려서도 눈은 여전했다. 내장사 들어가는 버스가 다닐까 싶어 내심 걱정인데 20분 간격으로 다닌다는 버스는 30분이 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눈을 치우는 아저씨한테 물었더니 기다리라는 대답이다. 그보다 정직한 대답이 없을 것이다. 머쓱한 표정의 나에 비해 아내는 오히려 느긋했다. 다방, 이발관, 매운탕집, 약국, 수퍼마켓, 포장마차…, 그런 생존의 현장이 새삼스러운 양 둘러보면서 일부러 시계를 감추었지만 눈내리는 거리에 바람은 차갑기만 했다.
30분 넘게 기다린 후에야 내장사행 버스가 나타났다. 정류장 부근에는 대구에서 왔다는 부부와 우리 부부뿐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은 금세 장사진을 이루었다. 어딘가 숨어서 버스를 기다렸다는 말이었다. 눈 오는 날, 미끄러운 산길을 가야 할 버스이기 때문에 버스 요금이 비싸지 않을까 했는데 1인당 1100원이란다. 눈 속에서 기다린 보답을 해준 것만 같아 그것도 고마웠다.
사실 승용차로 이동했을 경우와 열차와 버스로 이동했을 경우의 비용을 따지는 일은 적절하지 못할 것이다. 두 사람만의 여행시 현재의 기름 값 수준과 고속국도 통행료 등을 계산한다면 비용은 승용차의 비용과 열차여행의 비용이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기다리는 시간을 비용으로 환산한다면 열차여행이 오히려 비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눈 오는 날의 여행은 그런 이해타산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다. 눈길에서 조바심을 하지 않아도 되고, 마음에 드는 주변의 경치를 뚫어지게 보면서 얻을 수 있는 감동과 비교한다면 승용차를 버린 기다림과 느림의 여행은 효율성만 가지고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제든지 키만 꽂으면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동차에 길들여진, 기다림의 여유를 잃은 내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장사 주차장에서 내장사에 이르는 길은 화엄 세상으로 가는 길이었다. 눈 터널을 만든 눈이 쌓인 겨울 나목들, 종아리까지 잠기는 눈, 그 길 위에서 호젓한 풍경이 되어버린 사람들…, 어쭙잖은 설명이 오히려 백지에 낙서를 하는 꼴이 되고 말리라.
이백의 독작(獨酌)이라는 시 끝에 “단득취중취(但得醉中趣) 물위성자전(勿爲醒者傳)”이라는 구절이 있다. “술을 마시면 다만 혼자 즐거움을 얻으면 그뿐, 술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그 경지를 전하려 하지 말라”는 뜻이다. 애써 내 심정을 필설로 표현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 감흥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지나가버릴 풍경, 눈감으면 사라져버릴 풍경의 일부를 가슴에 담는 것도 부족해 그림 혹은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인지 모른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나의 희망은 한갓 부질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아내의 뒷모습을 몇 장 찍으니 밧데리를 교환하라는 자막과 함께 화면이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쇠덩이가 되어버린 카메라는 인간의 콧김만으로 살릴 수 없었다. 인간의 실수가 그런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되듯이 우리도 예측할 수 없는 날 맥없이 사라지리라. 그런 날을 대비하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한 깨달음이었다.
종일 끝없이 이어지는 눈, 눈에 가린 산, 그 산 자락에 눈을 뒤집어 쓴 마을…. 부르면 손을 잡아줄 사람이 튀어나올 것 같은 눈 덮인 산과 마을을 기억으로 붙잡고 돌아오는 것으로 아내와 나만의 짧은 축제는 끝나고 말았다.
눈 오는 날, 조금은 멀게 느껴지는 그곳으로 다시 떠나고 싶다. 하룻밤쯤 눈 내리는 산사에서 머물 수 있다면 더 큰 복이리라.
눈 덮인 산의 풍경이 아련하다.
덧붙이는 글 | 보이는 천지가 눈 또 눈. 머리 속도 하얘지는 것 같다.
이 글은 한겨레 내 블로그에도 옮긴다.
2009.01.13 11:29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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