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이하나’

등록 2009.01.13 15:38수정 2009.01.13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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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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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진 하늘, 구부러진 벽시계, 둥둥 하늘을 떠다니는 사람들, 횡단하는 시간 그리고 서로의 경계를 지우며 조금씩 몸을 섞어나가는 공간. 영화 <비포선셋>에서 제시(에단 호크)의 발길을 돌려세웠던 셀린느(줄리 델피)의 노래, '왈츠 포 어 나이트'(Waltz for a night)를 부르는 여인 한 명이 나무에 기대어 앉아있다.

 

기타를 튕기며 읊조리듯 나긋나긋 부르는 노래는 초대장이다. 꿈의 대화, 인과관계나 견고한 플롯 따위는 무의미한 몽상가들의 수줍은 피난처. 그 이상한 나라에는 '이하나'가 산다.

 

이하나의 얼굴은 먹구름 사이에서 수줍게 빛나는 햇살 같다. 다분히 낭만적인 오프닝으로 시작하는 <이하나의 페퍼민트>는 이름만큼이나 상큼하고 따뜻하다. 자정이 넘은 시각,  이혼을 앞둔 부부의 지루한 싸움과 신구 선생의 "4주 후에 뵙겠"다는 말을 간신히 견디고 나면, 야밤의 낭만과 감성이 되살아난다.

 

입을 틀어막은 꿈이 지친 몸을 다시 깨우며 가까스로 일어난다. 어기적거리며 거실을 배회하다 리모컨으로 볼륨을 살짝 높이면 키 큰 소녀 하나가 마이크를 든 채로 반쯤은 긴장한, 반쯤은 들뜬 표정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인사를 건넨다. 드라마와 연예프로그램에서는 흩어져있던 그녀의 매력이 그곳에서는 온전하게 형체를 갖춘 채로 드러난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지만, 배우 이하나에게 음악 프로그램을 맡긴 것은 기이하면서도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 음악인을 향한 그녀의 무한애정과 관심은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음악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우리는 이하나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양한 음악인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소중한 시간을 얻게 된다. 출연자들의 마음까지도 무장해제 시키는 그녀의 매력 덕에 시청자들은 여타 방송에서는 볼 수 없던 음악인의 색다른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동경과 사랑의 눈빛으로 한 곡만 더 불러달라는 이 풋풋한 진행자의 부탁을 거절할 무정한 음악인이 얼마나 될까.

 

이하나의 목소리는 낮게 파르르 떨리는 선율처럼 스며들어 브라운관 너머 사람들의 내면에 파고든다. 그녀가 그동안 연예 프로그램이나 드라마에서 곧잘 보여준 기타실력과 노래솜씨는 그 목소리에 큰 힘을 실어준다. 아직 완전한 연기자로 불리기에는 부족한 그녀는 마치 홍대 근처에서 활동하는 인디 음악인처럼 보이는 면도 있다.

 

한희정, 타루, 요조와 함께 그녀의 이름을 올려놓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소속사 또한 그 장점들을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신인급인 이하나가 드라마 <연애시대>와 <메리대구공방전> 그리고 <태양의 여자>를 거치며 순식간에 스타로 급부상한 것은 그 때문이다.

 

단순히 드라마에서 보여준 매력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로 사람들은 오히려 그녀의 이미지에 먼저 흡수되었다. 케이블 패션 관련 방송에서 워스트 패션 단골에, 어딘지 2% 부족한 연기력을 보완해주는 것 또한 바로 그 특유의 낯선 매력이다.

 

귀를 기울이면, 속삭이듯 수줍은 선율

 

물론 그것이 연기자로서의 그녀를 채워주는 요인이 될 수는 없다. 그건 그녀의 과제이기도 하다. 작년 방영된 <태양의 여자>에서 윤사월이란 역할로 그녀가 보여준 연기는 분명 설익음 그 자체였다.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발전하는 모습은 있다 하더라도, 같이 출연한 베테랑 연기자 김지수나 신인급 연기자 정겨운에 비하면 분명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어느 코미디언의 유행어처럼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방송가에서는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연기를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자신만의 것을 가지지 못하면 대중들에게 인정받기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이하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그녀를 향한 질타는 매질이라기보다는 따뜻한 사랑과 관심에 가깝다. 아직은 연기의 폭도 넓지 못하고, 깊이도 떨어지지만 사람들은 아직 그녀에게 여분의 시간을 준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녀가 능숙하게 연기하는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이 쉽진 않지만.

 

이하나는 현재 '풋내기'와 '예술가' 이미지, 그 사이에 걸쳐있다. 낯설면서도 색다른 순수함으로 남성 뿐 아니라 비슷한 나이의 여성들까지도 사로잡았다. 그녀가 걸쳐있는 곳은 미지의 영역이고,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팬들은 일종의 모험가다.

 

작열하는 태양에 지친 모험가가 그 낯섦에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현실과 꿈의 경계선, 그쯤에 머물러 선 그 이미지에 시간이 더 지나 이하나라는 배우의 발걸음이 어느 쪽에 더 치우쳐 있을지 예측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불쑥불쑥 어디선가 다시금 튀어오를 것 같은 그녀의 매력은 분명 꿈틀거리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지금 현재, 이 순간에 첫사랑의 수줍은 미소를 닮은 배우 이하나를 지켜보고 있다. 눈감고 귀를 기울이면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꾸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천둥번개가 그치고 무지개가 피어오른 이상한 나라에는 이하나가 산다. 비바람 때문에 온몸이 질펀하게 젖은, 그래서 더 지친 몽상가들이 이따금씩 자정이 되면 텔레비전 주변으로 모여든다. 꿈이 부팅되면 이 기이한 꺽다리 소녀는 그렇게 다시 파르르 떨리는 낮은 선율로 수줍은 감성을 읊조리기 시작한다.

2009.01.13 15:38ⓒ 2009 OhmyNews
#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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