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두 번째 맞는 주말에 무안의 도리포에서 해넘이와 해돋이를 보려고 계획했었다. 그런데 주간 일기예보를 보니 서해안의 남쪽지방은 흐리고 눈이 많이 내려 해넘이와 해돋이를 볼 수 없다.
날씨에 걸맞은 여행지를 찾다가 청주토요산악회가 태백산으로 산행가는 것을 알았다. 서해안에 눈이 내리는 날씨라면 북쪽의 높은 산에는 당연히 눈이 많이 내릴 것이라는 판단이 앞서기도 했다. 산행 신청을 하고 나니 몇 년 전에 봤던 태백산의 눈꽃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태백산은 경상북도 봉화군과 강원도 영월군ㆍ태백시의 경계에 위치해 한반도 이남에 있는 산들의 모태가 되는 뿌리산에 해당한다. 최고봉인 장군봉(1,567m), 개천절 하늘에 제를 올리는 천제단(1,561m), 소백산맥의 산줄기가 시작되는 부쇠봉(1,547m), 검은 바위들이 무더기를 이룬 문수봉(1,517m)이 산줄기를 따라 높이 솟아 있다.
겉보기에는 웅장하고 거대하게 보이지만 누구나 산행을 할 수 있을 만큼 산세가 비교적 완만한 산이 태백산이다. 새해에 천제단에서 맞이하는 일출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봄에는 철쭉ㆍ겨울에는 눈꽃과 설경을 감상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경치가 아름다운 태백산의 천제단ㆍ문수봉ㆍ주목군락,ㆍ일출, 낙동강의 발원지인 함백산 황지(黃池), 한강의 발원지인 대덕산 검룡소(儉龍沼), 황지에서 용출된 물이 잠시 머무르는 구문소, 해발 920m의 높이에 위치한 용연동굴이 태백 8승이다. 태백석탄박물관, 태백산석장승(강원민속자료 제4호), 국내에서 가장 높은 역사 추전역(해발 855m), 가장 높은 포장도로 만항재(1,340m) 등 주변에 명소들이 많아 보고 느끼는 여행을 하기에 좋다. 해마다 1월 말경이면 태백산도립공원 일원에서 태백산눈꽃축제도 열린다.
휴일이면 늘 여행을 떠난다. 대부분 외부 요인에 구속이나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여행이다. 하지만 오늘같이 모든 것을 맡기고 그냥 따라만 다니는 여행도 가끔 필요하다.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하는 산행이라 먹을 것 챙기는데도 신경을 썼다. 7시 출발시간에 맞추느라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시간도 잘 지켜 정시에 제2의 출발지인 청주체육관으로 향한다.
7시 30분, 일행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목적지를 행해 출발하는데 차창 밖으로 눈발이 보인다. 태백산에 눈꽃이 피어있을 생각을 하니 저절로 신이 나는데 아내는 눈길을 걸으며 고생할 것을 걱정한다. 똑같은 상황에서 이렇게 생각이 다를 수 있기에 인생살이가 재미있다.
증평, 주덕, 이류, 충주첨단지방산업단지, 중원고구려비를 지나 중앙탑가든휴게소에서 아침식사 겸 커피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청주삼백리 송태호 대표와 중원고구려비, 장미산성, 목계나루를 돌아보는 답사에 대한 얘기도 나눴다. 아내에게 걸려온 전화는 청주의 눈 소식을 전해준다.
차가 출발하고 산행에 처음 참석한 신규 회원과 기존 회원들이 인사를 나눴다. 청주가 연고지인 사람들이 주를 이루다보니 초등학교 친구와 술자리를 같이하는 후배도 만났다. 실명보다 특색 있는 닉네임으로 자기소개를 하니 기억하기도 쉬웠다. 그러고 보니 인터넷 때문에 닉네임 하나쯤은 가지고 사는 세상이다.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차가 좌우로 움직여 눈을 뜨니 31번 지방 도로 중 가장 험하다는 수라리재를 넘고 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이 삼척의 궁촌으로 유배를 가며 이 고개에서 수라를 들어 수라리재로 불린다는 유래가 전해져온다. 청주에도 눈이 내렸다는데 태백에서 가까운 이곳의 고갯길에 눈이 보이지 않는다.
11시경 유일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같이 온 산악회원들을 찾기 어려울 만큼 사람들이 많다. 매표소 주변은 표를 구입하려는 사람과 산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사람이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룬다는 인산인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현장이다.
천금같은 20여 분을 그냥 서서 보낸 후 산행을 시작했다. 모처럼만에 산행을 따라나선 아내가 초입부터 힘들어 한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오르다보니 천제단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아내와는 점심을 먹기로 약속된 주목군락지에서 만나기로 하고 계단 길을 걸어 100여m 아래에 있는 유일사로 갔다.
유일사는 요사에 비해 규모가 작은 사찰이다. 볼거리도 무량수전, 삼성각, 벽돌로 만든 탑이 전부다. 태백산의 등산객 수에 비하면 찾는 사람도 적다. 하지만 무량수전과 뒤편의 산에 있는 기암괴석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놓았다.
부지런히 아내의 뒤를 쫓았지만 등산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 때문에 발걸음이 더디다. 사람들의 행렬에 떠밀려서 올라가는 산행이라 겨울 산의 정취를 느끼지 못하는 게 아쉽다. 유일사의 계단을 오를 때부터 다리에 통증이 있어 무리를 하지 않으려고 그냥 천천히 걸었다.
정상으로 가다보면 고사목들을 많아 만난다. 특히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산다’는 주목군락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더 한다. 태백산을 대표하는 주목은 눈이 내린 겨울에 자태가 더 아름답기에 눈을 뿌리지 않는 날씨를 원망한다. 우리나라의 주목 서식지 중 가장 큰 군락지가 이곳이지만 등산객이 많다보니 고목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기도 어렵다.
눈밭 위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었다. 도시락을 열어놓자 밥이 금방 얼어붙을 만큼 추운 날씨였지만 산행을 하며 먹는 음식은 모두 꿀맛이다. 안동소주를 몇 잔 거듭 마셨더니 열이 나 몸이 후끈거린다. 그래서 추운 겨울철 산행에는 독주가 최고다.
해발 1,567미터로 태백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장군봉에 올랐다. 봉우리 꼭대기에 자연석 규암으로 쌓은 사각형의 제단이 있다. 언제 쌓았는지 모르지만 하늘장군에게 제사지내는 장군단이 있어 장군봉으로 부르는 곳이다. 남쪽으로 300여m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는 천제단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보인다. 6m 낮은 천제단이 더 높아 보이는 착시현상도 경험한다.
태백은 ‘크게 밝다’는 뜻으로 ‘한밝뫼’, ‘한배달’로도 불렸다. 태백산은 신라 때 오악(五岳) 중 북악으로 왕이 친히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높이 3m, 너비 8m, 둘레 27m의 천제단(중요민속자료 제228호)을 머리에 이고 있어 민족의 영산으로 여겼다. 산꼭대기에 있는 천제단은 수령과 백성은 물론 우국지사들이 천제를 올리던 장소였다. 지금도 개천절에 천제를 지내고, 강원도민체육대회의 성화를 채화한다.
원통형의 천제단에는 작은 비석에 ‘한배검’이 붉은 글씨로 써있다. 태백산의 장엄함, 위대성, 역사성을 표현하기 위해 태백산(太白山) 글씨를 태(太)는 북위서체, 백(白)은 행서체, 산(山)은 고문자체로 썼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태백산 표석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남기려고 줄선 사람들이 진풍경을 만든다.
산등성이에서도 눈꽃을 볼 수 없는 날씨라 소백산맥 산줄기의 시작점이자 중국의 태산과 높이가 같은 부쇠봉, 산봉우리의 자갈로 된 돌무더기가 눈이 쌓여 있는 것 같아 태백산이라 이름 짓게 했다는 문수봉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망경사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천제단에서 가까운 곳에 단종비각이 있다. 망경사 가는 길에 있는 단종비각은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에서 죽임을 당하고 변변한 묘 하나 없이 구천을 떠돌던 단종의 혼이 백마를 타고 이곳에 와서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비각 안에 모신 단종비를 어렵게 사진에 담았다.
망경사 입구의 용정은 추위로 꽁꽁 얼어붙었다. 용정(龍井)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1470m)에 위치하고, 동해에서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 샘물로서 천제의 제사용 물로 쓰인다. 망경사 주변은 등산객들이 늦은 점심을 먹느라 붐빈다.
태백산 정상에서 당골까지의 절반 가량 되는 지점에 있는 낮은 산등성이가 반재다. 반재와 가까운 곳에 그냥 지나치기 쉬운 돌무더기가 있다. 그 돌무더기가 옛날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의 유골를 찾아 화장을 하고 그 자리에 만든 무덤으로 호식총이라고 한다. 호식총에서 당골방향으로 내려가면 계곡을 만난다. 추운 겨울이라 계곡이 꽁꽁 얼어붙었지만 얼음장 밑으로 맑은 물이 흐른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얼음판 위에 지게가 받쳐있고, 옆에 플라스틱 물통이 놓여있다.
요즘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라 유심히 관찰을 했다. 중년의 남자분이 작은 손도끼로 계곡의 얼음을 열심히 내리찍는다. 동그랗게 구멍이 뚫리고 맑은 물이 드러나자 물통에 물을 담는다.
태백산 계곡은 산삼 물이 흐른다고 할 만큼 오염원을 찾아볼 수 없는 청정지역이다. 산중턱에서 떠가는 물의 사용처를 생각해봤다. 그러고 보니 반재의 등산객들 쉼터에서 어묵을 파는 상인이 있다.
아내와 두런두런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며 당골 광장으로 향하다가 우스운 광경을 봤다. 덩치가 큰 사람이 배낭에 양은냄비와 비닐봉지를 매단 채 술에 얼큰히 취한 듯 이리 왔다 저리 갔다 갈지(之자)자로 걷는데 일행도 없다. 비닐봉지 속에 라면이 여러 개 들어있는 것으로 봐 배낭에 매달린 양은냄비의 용도는 조리용이 분명하다. 등산객들이 붐비고 취사를 할 수 없는 산에서 늦은 시간까지 헤매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
태백산에 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당골에 있는 석탄박물관, 단군성전, 태백산석장승을 보고 간다. 석탄박물관은 시간이 없어 다음으로 미루고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단군성전과 태백산신의 수호신상으로 추정하는 태백산석장승을 자세히 둘러봤다. 1월 30일부터 2월 8일까지 ‘雪왕雪래! 눈을 따라, 추억을 담아’를 주제로 열리는 제16회 태백산눈축제도 주로 이곳 당골 광장이 무대가 된다.
당골은 겨울산행을 마치고 내려온 등산객들로 붐빈다. 마침 각설이 한 명이 상가 앞에서 공연을 벌이고 있다. 무척 추운 날씨이건만 구경꾼들의 흥을 돋우느라 짧은 치마를 입었다. 그래서일까? 앞에 나가 열심히 몸을 흔드는 아주머니들이 많다.
여행은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점잖아 보이는 아주머니 한분은 장갑 낀 손이지만 아예 각설이의 다리를 손으로 만져보며 촉감까지 확인한다. 이렇게 누구나 자유인으로 만드는 게 여행이다.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을 찾아가니 토요산악회에서도 순두부, 떡국, 맥주, 소주를 준비해 놓고 기다린다. 더울 때는 더운 것으로, 추울 때는 추운 것으로 다스리는 게 이열치열이다. 순두부를 안주로 찬 맥주를 마시자 오히려 추위가 달아난다.
4시 50분경 당골 주차장을 출발해 청주로 향했다. 겨울의 산촌은 해가 금방 넘어가 이른 시간부터 암흑세상을 만들었다. 산에서 얼었던 몸을 차안의 따듯한 공기가 녹여주니 금방 잠이 몰려온다. 맛있게 잠을 자다가 산악회 부회장의 이불 걷으라는 소리에 눈을 뜨니 동강휴게소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차에 올라 태백산에서 보낸 하루를 되돌아본다. 자연은 몸이 고생하면 감동이 크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바람을 스스로 만들어낸다고 할 만큼 바람이 세차기로 유명한 태백산에서 겨울바람을 몸으로 맞으며 세상의 이치를 깨우쳤다. 새해 벽두에 산의 기(氣)를 받으며 호연지기도 키웠으니 청주토요산악회의 태백산 산행에 참석하자고 아내를 꼬드긴 것은 참 잘한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교닷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9.01.16 08:59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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