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를 돌아보니 내가 구름 위에 있네!

'화산이 만들어 낸 구름 위 호수', 인도네시아 롬복 린자니 산

등록 2009.01.21 18:02수정 2009.01.2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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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어둠이 가시기도 전에 며칠 전 예약해놓은 트레킹 센터에서 보낸 승합차에 몸을 실었다. 어두운 도로를 달리다 보니 날은 점점 더 밝아지고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6시밖에 안된 시간이지만 도로에는 아침을 알리는 울음소리를 내며 닭들이 왔다 갔다 하고, 소를 몰고 가는 가족들, 큰 덤프 트럭에 몸을 싣고 일터로 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아침 잠이 많을 것 같은 동네 아이들은 벌써 모여 도로 옆 공터에서 서로 부대끼며 자기들만의 놀이에 열중해 있다.
 
예전 우리 아버지 어머니 세대에는 저렇게 아침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싶다가도 생경한 광경에 모든 관심이 창밖으로 집중된다. 그 도로 그리고 그들 모두 신선한 공기 같았다. 보기에는 남루해 보이지만 소와 함께 걸어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새벽공기에 섞인 아이들의 장난기 넘치는 웃음소리는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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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자니 산행이 시작하는 세나루 마을 ⓒ 김동희

린자니 산행이 시작하는 세나루 마을 ⓒ 김동희

 

그렇게 롬복의 해가 바다 저편에서 떠올랐다.

 

4년 전 롬복에 처음 왔을 때, 린자니 산의 사진을 접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두번째로 높고 발리 그리고 롬복 사람들이 신성시 여기는 이 산의 사진을 보는 순간, 산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다음에 올 기회가 있으면 한번 올라가 보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 기회가 왔지만 사실 솔직히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반이었다. 회사에서 가벼운 등산이라며 갈 때 나는 항상 꼴찌를 면하지 못했다.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오르고 내리는 산을 다녀오면 나는 혼자 히말라야라도 다녀온 것처럼 꼼짝 못하고 발 한걸음 떼기가 힘들어 절절 매며 보냈다. 이런 내가 3700m가 넘는 린자니 산을 올라가려고 마음먹은 것은 힘든 결정이었다.

 

여행을 가기 전 준비운동으로 몇 번 동네 산을 왔다 갔다 했지만 섣불리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린자니 2박 3일 코스를 결정하지는 못했다. 2박 3일 코스에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죽음의 정상이라는 린자니 정상까지 가는 일정이 포함이 되어있는데,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잠시 들었지만 바로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그래 나에게 알맞은 1박 2일 코스. 천천히 올라가서 린자니의 칼데라 호수만 보고 다시 천천히 내려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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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자니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 키큰 나무들로 가득하다. ⓒ 김동희

린자니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 키큰 나무들로 가득하다. ⓒ 김동희

가이드와 포터는 우리가 산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짐들을 매고 앞서서 가기 시작했다. 가이드 아지에게 나의 상태를 설명하고 최대한 천천히 가자고 이야기 했다. 사진도 찍으며 천천히 즐기며 걸어가고 싶었다. 난 휴가를 온 것이니 힘든 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저 산을 느끼고 싶었다. 천천히 한발 한발 올라가다 보면 아름다운 칼데라 호수를 만나리라.

 

생각보다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빨리 가려고 하지 않고 천천히 속도를 유지하면서 올라갔다. 올라가는 산길이 흙과 나무 뿌리로 다져져 있어 돌이 가득한 산보다 훨씬 편했다. 금세 첫 번째 쉼터인 POS1에 도착했지만 아직까지는 쉼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다음 쉼터로 향했다. 산은 점점 가팔라지지만, 열대우림이 하늘 끝까지 뒤덮인 광경을 보면서 숨을 깊게 들이쉰다. 금세 땀이 나기 시작하다가도 잠시 쉬면 서늘한 기운에 잠바를 찾아서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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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쉼터-POS1 ⓒ 김동희

첫번째 쉼터-POS1 ⓒ 김동희

 

우리 포터는 벌써 내 눈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바구니 두 개를 이어놓은 나무를 어깨에 매고, 슬리퍼를 끌고 올라가는 그는 생활로 다져진 단단함이 몸을 감싸고 있다. 가이드는 내 키의 반만한 배낭을 매고도 나의 뒤를 지켜주고 있다. 산을 잘 못 타는 사람 뒤에서 자신의 속도를 포기하고 보조를 맞춰주는 게 얼마나 힘들지 알지만, 그는 항상 내 뒤에서 천천히 나에게 힘들 보태주고 있다.

 

"조금만 더 가면 점심 먹을 POS2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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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들은 나무 막대에 이은 바구니에 냄비,부식재료부터 침낭까지 들고 다닌다. ⓒ 김동희

포터들은 나무 막대에 이은 바구니에 냄비,부식재료부터 침낭까지 들고 다닌다. ⓒ 김동희

먼저 도착한 포터는 바구니에서 여러 가지 집기를 꺼내서 밥할 준비를 하고 있고, 나무를 주어 모아 불을 지핀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그래서 유명한 산인데 밥을 지을 수 있는 간이 공간이 있어서 그곳에서 씻기도 하고 밥도 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곳은 그냥 아무 곳이나 불을 지피면 끝이다. 이러다 불이라도 한번 나면 큰일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기 저기서 불을 지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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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모아 불을 지피고 점심준비를 하는 가이드 ⓒ 김동희

나무를 모아 불을 지피고 점심준비를 하는 가이드 ⓒ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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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와 포터가 음식을 준비하는 사이 지친 등산객들은 쉬느라 정신없다. ⓒ 김동희

가이드와 포터가 음식을 준비하는 사이 지친 등산객들은 쉬느라 정신없다. ⓒ 김동희

바지런하게 음식준비를 하는 포터와 가이드와 달리 벌써 힘에 지친 등산객들은 정자에 누워서 다리 풀기에 정신이 없다. 속속 도착하는 다른 등산객들에게 인사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름도 국적도 모른다. 하지만 같은 곳을 향해 간다는 사실이 서로를 친근하게 만들어준다. 각자 왔지만 산을 오르면서 그런 의미는 사라진다. 어느새 또 만나고, 어느새 또 헤어진다.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어디쯤에 있을지 서로 걱정해준다. 그렇게 하나가 된다.

 

점심을 먹은 후에 가는 길은 더 힘들다. 새벽같이 일어난 피로감이 밥을 먹고 나서 밀려오기 시작하고, 한낮의 더위가 엄습해 온다. 가야 할 길은 아직 한참 남았다. 길은 어느 순간 다른 세상으로 바뀌었다. 햇빛을 가려주던 높디 높은 나무들은 사라지고 풀들만 무성한 길이 시작되었다. 건조한 탓에 푸석푸석한 땅은 먼지를 일으키고 발걸음을 무겁게 만든다. 먼지가 가득 뭍은 에델바이스는 어린 시절 불렀던 노래 때문에 생긴 이미지를 한 순간에 사라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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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키큰 나무들은 사라지고 풀만 무성한 산등성이로 들어선다. ⓒ 김동희

어느 순간 키큰 나무들은 사라지고 풀만 무성한 산등성이로 들어선다. ⓒ 김동희

 

햇빛이 버겁게 느껴질 때쯤 갑자기 구름이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갑자기 서늘한 공기가 온 몸을 감싼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내가 구름 위에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들이 보인다. 입에서 힘겨움의 한숨이 경이로움의 탄성으로 바뀐다. 어느새 내가 이렇게 올라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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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구름 위에 서있는 나를 본다. ⓒ 김동희

어느 순간 구름 위에 서있는 나를 본다. ⓒ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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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위를 걷고 있는 여행자. ⓒ 김동희

구름위를 걷고 있는 여행자. ⓒ 김동희

하늘과 맞닿은 쉼터에 텐트를 치기로 하고 해지는 것을 보기 위해 칼데라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가지고 온 옷들을 껴입고 마지막 힘을 다해 올라갔다. 해는 빠르게 구름 저편으로 넘어가면서 언제 봐도 아름다운 붉은 빛을 남기고 지고 있다.

 

저 멀리 발리의 아궁산도 보이고, 구름은 강처럼 내 발 밑에서 흘러간다. 모두들 소리 없이 하루의 끝을 알리는 장엄한 자연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어느새 깜깜해진 산에 남은 것은 깜깜한 어둠과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들, 들개의 짖는 소리, 바시락 거리는 텐트 속 소리뿐이다. 그리고 하나 더. 저 멀리 불이 났다. 나무가 타는 냄새가 내가 있는 곳까지 나기 시작해서 가이드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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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발리 아궁산을 바라보며 맞이하는 산 위의 일몰. ⓒ 김동희

저 멀리 발리 아궁산을 바라보며 맞이하는 산 위의 일몰. ⓒ 김동희

 

"건조한 여름에 자주 있는 일이야. 어제 내 친구는 텐트 근처까지 불이 번져 새벽에 텐트 걷어서 칼데라 호수로 내려갔다고 하더라고."

 

동네 산에 불이라도 나면 TV에 나오고, 소방 헬기가 뜨고, 불을 끄기 위해 사활을 다해 애쓰는 사람들을 보다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곳에 오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불이 난 곳에서 내 텐트까지 얼마나 거리가 되는지 체크해 보고 자다가 도망갈 일이 없길 바라면서 그냥 텐트 속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아침 일찍 다시 칼데라 호수(세가라 아낙 Segara Anak lake)를 보기 위해 산을 올랐다. 화산이 만든 호수 안에 재폭발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화산 봉우리가 앙증맞게 자리하고 있다.조그마한 이 봉우리는 바루(Baru)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조그맣고 시꺼먼 봉우리를 품고 있어 이 구름 위 호수가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이른 아침 태양은 저 멀리 보이는 린자니 산 정상을 넘지 못해 호수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놓았다. 태양이 산을 넘어 떠올라 호수를 비추면 그제서야 호수는 아름다운 물빛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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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자니 칼데라 호수와 정상 ⓒ 김동희

린자니 칼데라 호수와 정상 ⓒ 김동희

 

어제 함께 올라왔던 등산객들은 호수로 내려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우리가 안 보여 계속 찾았다고 한다.

 

"너 따라 나도 오늘 그냥 내려가고 싶어."

 

그들은 나를 따라 하산 하고 싶어하고 나는 그들을 따라 더 가보고 싶어한다. 몸은 천근만근인데 마음은 그들을 따라 호수로 내려가고 싶다. 사람의 마음은 참 재미있다. 어제부터 몇 번 마주친 것뿐인데 서로 무사하길 빌며 손을 흔들어준다. 그들이 내려갈 호수를 보고, 그렇게 힘들다던 린자니 산의 정상을 바라본다. 나는 여기서 내려가지만 내 마음은 그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2008년 8월 이틀간 다녀왔습니다.

2009.01.21 18:02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2008년 8월 이틀간 다녀왔습니다.
#롬복 #린자니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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