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람-첫회] 북한 이론물리학자 리석주의 눈물

[김갑수 한국전쟁 역사팩션] '별은 어디에'

등록 2009.01.30 14:38수정 2009.01.30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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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잡하고 불결한 생활은, / 별의 정기가 흘러야 할 몸을 / 무디고 거칠게 만들지만, / 절도 있고 순결한 생활 / 저급한 본능의 억제 / 고상한 이타적 사유는, / 가장 순도 높고 고귀한 / 별의 정기를 몸으로 빨아들인다.


- 애니 베전트, <죽음 이후에 오는 삶>

"인류의 조상들은 지구를 탄생시킨 모체로서 태양을 극진히 섬겼습니다. 그런데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태양은 우리의 조상별이 아닙니다. 태양은 우리에게 지구라는 이름의 집을 지어 준 목수에 불과합니다.

수십억 년 전 우주 어딘가에서 수명을 다하고 사라진 초신성(超新星)이 있었습니다. 이 초신성의 잔해는 지구뿐 아니라 인근 성운에 골고루 뿌려졌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초신성에서 뿌려진 잔해로부터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별의 후손입니다."

2006년 12월, 나는 발트 해 연안의 스웨덴에 가 있었다. 나는 스톡홀름의 시립 콘서트홀에서 열린 세계 이론물리학자대회에서 회심의 논문을 발표했다. 내가 발표를 끝내자 미치오 카쿠와 스티븐 와인버그가 단상으로 올라와 나를 힘차게 포옹했다.

단상 앞에 선 미치오 카쿠는 경건한 동작으로 마이크를 두어 번 두드렸다. 일본계 미국인인 그는 '초공간이론'으로 세계 물리학계에서 현저히 돌출해 있는 석학이었다.

"나와 여러분은 알 것입니다. 과학사상 이렇게 아름다운 이론이 틀려 본 적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우아하고 혁신적인 우주 이야기를 들려주신 리석주 박사의 어머니가 몇 시간 전 영면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단아한 과학자에게 질문 드릴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미치오 카쿠는 먼저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스티븐 와인버그는 나의 손을 부여잡고  머리를 수그렸다. 단상과 단하에서 수백 명의 과학자들이 일제히 묵상에 들어갔다.

나를 따라 단상에서 내려온 스티븐 와인버그가 다시 한 번 내 손을 잡았다.


"경박한 말씀 같지만 닥터 리의 국적이 노스 코리아만 아니라면 저보다 먼저 노벨상을 수상하셨을 겁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역시 노벨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이 있었다. 그는 양자역학의 '해결사'였다. 아울러 그는 자신이 천재인 줄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파인만은 머리를 비스듬히 젖히고 볼에 손가락을 찌른 채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천재로서는 나름대로 애도한다는 표시가 그런 것 같았다.

20세로 돌아간 듯한 어머니의 죽음

회의장을 나온 나는 주최 측에서 제공한 리무진을 사양했다. 나는 코트 깃을 올린 채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북구의 도시를 조용히 걷기로 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무작정 걷다가 지하철을 타면 공항으로 직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코트 깃을 파고드는 칼바람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코에서는 이내 콧물이 흘러내렸다. 차가운 칼바람은 고운 숫돌처럼 결빙된 멜라렌 호수에서 불어오는 서풍이었다. 아내가 접어준 손수건이 주머니에 있었지만 손바닥으로 콧물을 문질러 훔쳤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걸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정정함 외에는 어떤 모습도 보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먼 데 가 있는 사이에 난데없이 돌아가신 것이었다. 평양에 갑자기 찾아든 혹한이 노인의 정기를 빼앗아 버린 것일까?

멀리 네온 불빛이 수채화 물감처럼 번지고 있었다. 나는 또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이번에는 눈물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눈앞에서 자동차 불빛들이 물살 치듯이 오르내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선 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윽고 나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후 마지막 지하철 정거장의 입구가 나타났다. 나는 불현듯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구의 별들은 내 어깨 위에 일제히 빛을 내리고 있는 듯했다. 별들은 마치 석류 속처럼 투명한 빛 무더기들로 우주를 온통 장식하고 있었다.

밤하늘 한가운데에서 별 하나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거기에서 불현듯 어머니의 얼굴이 나타났다. 어머니의 얼굴은 우주의 한가운데를 유리창 닦듯이 지우면서 차츰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나는 그네를 향해 슬프고도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냈다.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달걀 모양의 기창에 얼굴을 디밀었다. 기창 유리에도 어머니의 얼굴이 있었다. 나는 힘을 넣어 눈을 깜빡거려 보았다. 현실감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나는 기창 밖의 활주로를 내려다 보았다. 불빛에 반사되는 활주로 바닥이 비행기 그림자와 함께 마치 큰 새의 날개처럼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활주로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땅이 아니라 내가 탄 비행기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해 보아도 한사코 현실감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활주로는 방앗간의 피댓줄처럼 부리나케 달아나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기창에서 눈을 거두고 팔짱을 껴 올렸다. 얼마 후 기체가 공중으로 떴다는 것을 아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는 80을 넘긴 나이답지 않게 언제나 음악을 듣거나 붓을 잡고 계셨다. 인민문화성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한 그네는 혼자 살기를 원했고, 당신 말대로 그렇게 20년을 고즈넉이 그리고 오롯하게 지내왔다.

최근 나는 어머니 집에 들를 때마다 그네의 눈빛이 조금씩 형형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 하면 그런 눈빛은 노인이 내기에는 좀처럼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머니 집을 나오며 아내에게 확인해 보았다.

"어머니 눈빛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어?"
"문득 당신 청년 시절 눈빛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했어요."

"외로우신 것은 아니겠지?"
"외롭다기보다는 뭐랄까… 그리움을 담고 있는 눈이었어요."

"그리움이라고? 그렇다면 아버지를?"
"아닌지도 모르지요. 어머니 주변에 남자가 많았다면서요?"

"이 사람, 말을 우습게 하네. 그렇게 말하면 어머니가 카르멘 같은 여자였다는 뜻이야."
"아무튼 그것은 그리움의 눈빛이었어요. 50 넘으면 그 방면의 나이는 오히려 깎인다는 말이 있잖아요?"

"깎인다고? 그렇다면 어머니는 지금 80이시니 50에서 30이 깎여 스무 살이라는 말인가?"

내 유머 같지 않은 유머에 아내는 웃음을 머금으며 장난기처럼 단정하듯이 말했다.

"네, 어머니는 지금 스무 살이에요."
"당신 오늘따라 아는 게 많군."

어머니, 별의 소식을 아들에게 묻다

닷새 전 출국 인사차 들렀을 때에도 어머니는 붓을 쥔 채 삼각대(이젤)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화폭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제는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아."

어머니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지난번 아내가 했던 말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얼굴을 그리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네가 말한 별을 찾았다는 소식은 왔니?"

어머니는 뜻밖에도 내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미국 하버드 - 스미소니언 천체물리연구소에서 인터넷으로 실시간 전송하고 있는 허블망원경의 관측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차였다. 이번 디스커버리 우주선에 실려 올라간 허블망원경은 오리온 좌의 별들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아직요. 초점을 맞추는 데 시간이 지체되었다고 하더군요."

얼마 전 나는 미국 텍사스대학의 스티븐 와인버그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는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는 데 4개월을 예상했는데, 그것이 한 달 이상이나 더 늦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 별이 관찰되면 너의 연구가 증명되는 거니?"
"별뿐만 아니라 블랙홀이 촬영되어야 해요."

"그 모든 것을 감추어 버린다는 검은 구멍?"
"네."

"그것이 보일 리가 있는 거니?"
"거기서 다시 별들이 탄생한답니다."

역사팩션 <전쟁과 사람> 연재를 시작하며
이 소설은 한국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를 다룬 <제국과 인간>에 시대적으로 이어지는 후속편 성격을 띱니다.

아울러 이 소설은 필자가 우리의 근·현대사 100년을 '식민지'와 '분단'과 '통일'로 구분하여 예술적으로 표현해보고자 하는 작업의 중간 단계임을 밝힙니다.

이 소설은 매주 2~3회씩 약 60회 정도로 연재되어 6월 25일경 끝맺을 예정입니다.
#인민문화성 #리석주 #미치오카쿠 #스티븐와인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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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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