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달리, 어느 농가 돌담 아래 핀 들국화
조명자
설날을 이틀 앞둔 갤러리 풍경은 고즈넉했다. 관람객으론 모자와 배낭으로 중무장한 차림이 아마도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제주 올레 순례꾼 아닌가 싶은 젊은이 둘과 우리 네 식구가 전부였다.
57년 부여에서 태어나 손재주 여문 자신의 적성이 인문계보다는 공고에 맞을 것 같아 진학한 공고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사람. 월남 파병에서 돌아온 형님이 갖고 온 카메라에 빠져 대학은 사진학부를 가고 싶었으나 전공 교수들을 보고 대학진학을 포기했다는 당돌한 청년.
아마도 김영갑은 여드름 송송 날 때부터 평범함을 거부한 되바라진 아이였던 것 같다. 그런 오기와 직심이 있었기에 모범답안을 무시하고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고집스럽게 천착해 빼어난 작품성을 독자적으로 이뤄낼 수 있었을 것이고 남들 다 하는 안락한 결혼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20여년 긴긴 세월을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가며 제주의 오름과 들판을 누빌 수 있었을 것이다.
‘소탐대실’에 집착하다 번번이 좋은 꼴 못 본 나다. 이번에도 역시나, 3000원 곱하기 4. 만 이천 원이 못내 아까워 “뭔 관람료가 이리도 비싸냐?”고 구시렁거리며 들어섰는데 웬걸. 감동에 못 이겨 김영갑의 일생이 진솔하게 그려진 수필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책값 만 삼천 원을 더 그으면서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 책에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사진에 붙잡아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구름, 비, 안개이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근육이 소실되는 루게릭이란 불치병을 앓으면서 김영갑은 한탄했다.
“나는 먹을 복이 없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이제는 먹을 수가 없다. 섬에서 사는 동안 끼니 문제는 나를 내내 괴롭혔다. 건강할 땐 없어서 못 먹었고 지금은 있어도 먹지 못 한다….”2005년, 그가 그토록 사랑한 제주 땅 그것도 한라산의 옛 이름을 딴 두모악 갤러리 뒷마당 감나무 밑에 한줌 재로 돌아갔다는 김영갑의 영혼. 그 영혼에 평화와 안식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