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지난 31일 연쇄살인 용의자 강씨의 얼굴을 공개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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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신상을 공개하자는 주장의 근거, 즉 헌법상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해 살펴보자.
알 권리와 프라이버시권이 충돌하는 경우 헌법재판소는 피해자가 공적 인물인지 사인인지, 그 표현이 공적인 사안인지 순수한 사적인 영역인지에 따라 판단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를 공인이론이라고 하는데,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이 주체가 된 사건의 보도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피의자의 경우처럼 당해 행위에 의하여, 즉 본인이 범죄를 저지른 것만으로 공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후자, 공적인 사안이라고 판단하여 알 권리를 인정한다고 한다면 피의자의 초상권 등이 알 권리의 대상이 되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알 권리의 기본적 성격은 인격형성과 자기실현을 도모하는 개인적 권리인 동시에 정치적 의사형성과정에서 자기통치를 실현하는 공공적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알 권리의 내용과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이번 사건과 같은 유형의 범죄를 접하면서 국민이 알아야 하는 알 권리의 대상은 범죄의 양태와 그 경위 등이지, 피의자의 얼굴이 아니다.
또한 당해 범죄자의 재범방지라는 목적은 중대범죄로 인하여 받게 되는 형벌의 정도에 비추어 실효성이 없으며 동종유사 강력범죄에 대한 방지라는 명분 역시 과연 신상공개로 그 일반 예방적 효과를 도모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구체적 범죄사실이나 범행동기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범인의 결혼 경력이 가십거리처럼 선정적으로 보도되고 있는 행태는 차치하고라도, 범죄사실과 연관 없는 16살, 14살, 8살 된 그의 자식들과 관련하여 확대 재생산되는 기사더미 속에 암매장되어 가고 있는 그 어린 소년들의 인권은 무엇으로 보장되고 보호 받아야 옳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무기징역 이상의 형이 확실시되는 상태에서 범인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에 과연 어떤 실익이 있을지 의문이며 오히려 그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줄 뿐이다.
'살인미소'와 '연쇄살인' 이어붙인 언론 고맙지 않다최근 몇몇 언론들이 앞 다투어 경기서남부 연쇄살인 사건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면서 피의자의 외모적 특징과 범행을 대비시키는 웃지 못할 선정적 보도행태를 보이는 것도 참으로 개탄스럽다. 국민의 알 권리를 이토록 친절히 실현해 주시는 언론에 대해 마냥 고맙게만 여기지 않는 이들도 있다.
가족들이 한데 모이는 저녁시간, 범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와 전율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 솜털을 곤두세우는 잔인한 범죄수법에 치를 떨며 "차라리 '모를' 권리 제정을 위해 가두로 나서고 싶다"는 어느 지인의 우스갯소리가 왠지 무겁게 들린다. 친일파 명단과 비리정치인의 재산내역 공개에는 한없이 인색한 언론이 '쳐죽일' 파렴치범의 얼굴 공개에는 왜 그리 적극적인지 모르겠다는 농도 왠지 씁쓸하다.
악행을 저지른 자를 '광화문 네거리에 매달고 돌팔매질을 하는 일'은 백성들의 몫으로 남겨 두자.
언론의 역할은 여론을 '선도'하는 데 있지, 여론을 '선동'하는 데 있지 않다. 언론이 여론을 그리 몰아감으로써, 무죄추정의 원칙은 범인의 살인미소에 묻히고, 경찰관 직무규칙의 초상권 보호 의무는 악마의 영혼 밑에서 숨죽인다.
범인의 얼굴이 공개되면 범죄 예방 효과가 클 것이란 논리를 억지로라도 믿고 싶다. 아니,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범인의 얼굴을 공개한 그 어떤 나라에서도 범죄율이 낮아졌다는 통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언론은 피의자의 얼굴이나 이름과 같은 신원공개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피의자의 인신구속으로 수사와 재판절차가 진행되고 그 후 재판절차 내에서 무죄로 밝혀진 경우 당사자는 형사피해보상청구권의 일환으로 국가를 상대로 금전적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인신구속으로 인한 피해도 사후 금전배상으로 온전히 회복되기 힘든 것이기에 우리는 수사와 재판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한도 내에서 엄격한 요건 하에 법원의 판단을 받아 신중하게 집행한다.
이에 비하여 오늘날과 같이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이 발달된 시대에 피의자의 얼굴 등 기본적 신상이 공개되는 것은 매우 치명적이며 사후 무죄임이 밝혀지더라도 쉽사리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된다. 또한 그 피해는 피의자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피의자의 가족이나 주변인들에게까지 미친다는 점에서 더더욱 심각하다 할 것이다.
모든 국민이 범죄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다녀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