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 익숙한 슌페이가 듣지 못한 낯선 소리

[서평] 음성보다 마음이 먼저 가야 하는 사랑 이야기 <사랑을 말해줘>

등록 2009.02.16 09:16수정 2009.02.16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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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해줘> 겉그림.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은행나무, 2009. ⓒ 은행나무

▲ <사랑을 말해줘> 겉그림.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은행나무, 2009. ⓒ 은행나무

온갖 사람이 다 떠드는데 아무 소리가 없다면 거긴 도대체 어떤 곳일까. 갖가지 소리가 뒤섞이는데 전혀 소음이 없다면 그곳은 진정 어떤 곳이란 말인가. 그런 곳이라면 말이 없어도 이미 말이 오갈 수 있고 작은 몸짓이 없어도 얇은 숨을 타고 흐르는 온기에 서로 따뜻해질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슌페이는 다큐멘터리 제작가로서 소리가 있는 곳이라면 온갖 소리, 사람, 사건을 찾아다닌다. 반면 교코는 소리가 없고 말이 없어도 따뜻하고 색감 있는 마음을 주고받는 삶에 익숙하다. 물론 소리 없는 삶은 때론 작은 일에도 상상 이상으로 커지는 두려움을 몰고 오기도 한다. 슌페이와 교코의 만남은 단순히 일에 빠진 한 남자와 자기 세계에 빠진 한 여자의 만남 그 이상이다.

 

소리 없는 세상에 되레 낯설어하는 다큐멘터리 제작가 슌페이는 전혀 반대인 교코를 만나면서 일에 빠진 자신에게서 놓여나 차츰차츰 사람을, 아니 마음을 살피게 된다. 조용히, 가능한 한 소리 없이, 보이지 않는 숨을 타고 흐르는 마음으로.

 

우리는 지금, 온갖 소리에 파묻힌 삶이 소리라곤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쉼을 얻고 삶도 얻고 사랑도 음미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이다. 지금 우리 귀에 끝없이 들리는, 그래서 이제는 그 소리가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 많은 기계음들에 둘러싸인 채.

 

소리를 죽여야 소리를 찾고, 온갖 영상을 지워야 보이는 그런 사랑 이야기

 

인간 심연의 악의가 어떤 것인지를 파헤친 <악인>을 자기 작품 중 최고 작품으로 여긴다는 요시다 슈이치(吉田修一)가 넘치는 사랑 이야기에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조용히 우리 앞에 내놓은 소설. 그것은 바로 슌페이와 교코의 사랑 이야기 <사랑을 말해줘>(은행나무 펴냄, 2009)이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없는데도, 신기하게 옆자리 여고생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조용하면 조용할수록 주위는 시끄럽게 느껴지는 게 당연할 텐데, 교코와 함께 있을수록 주위의 소리는 사라져갔다.”(이 책, 16)

 

“바로 뒤에서는 사내들이 고함을 지르며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마른 남자의 코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교코가 멀리 있는 아이에게 노란 공을 흔들어 보였다. 교코의 등 뒤에는 피를 흘리는 사내들과 바람에 꽃잎을 흩날리는 만개한 벚나무가 있었다. 두 배경을 등지고 미소 짓는 교코가 내게는 너무나 고요해 보였다. 너무나 무서운 고요함이었다.”(이 책, 73)

 

슌페이와 교코가 만난 곳은 문 닫을 시간을 앞둔 공원 안에서였다. 슌페이는 잡다한 세상 소리와 혼란한 자기 소리에 빠져 둘러싸여 있었더라도 “슬슬~ 문 닫습니다아~.”하는 공원 수위 아저씨 목소리는 잘 알아들었을 게다. 하지만, 교코는 자신에게 공원 문 닫을 시간을 알려주고자 넌지시 그녀 코앞까지 다다른 슌페이의 등장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고요하다. 고요함을 잘 모르던 슌페이는 소리보다는 미세하게 변하는 입술 움직임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교코의 낯선 행동에 그만 놀라고 만다.

 

다소 어색하면서도 슌페이에겐 그보다 더한 신기함으로 다가온 교코, 아니 교코의 고요함은 낯설면서도 반가운 선물이었다. 슌페이는 세상 소리에만 도가 튼 자신을 나무라는 여자친구에게서 슬슬 벗어나 이전에는 익숙치 않았던 고요함에 자신도 모르게 흘러들어간다. 그런 고요함에서 둥둥둥둥 거세지는 사랑의 숨소리를 듣게 될 줄은 차마 생각지 못한 채.

 

영상 없는 편지, 소리 없는 문자, 말 없는 눈짓과 몸짓만으로 무언가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전하는 일은 슌페이에겐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교코를 만나기 전에는 말이다. 그는 영상이면 영상, 소리면 소리, 사람이면 사람 모두 관찰하고 끌어들이고 다듬으며 사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낯설 수밖에 없는, 소리 없는 소리가 다가온 것.

 

그는 중요한 소리들을 발견하는 대로 재빨리 가져오고 편집까지 거쳐 다시 이곳에 전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름대로 멋진 실력을 갖추었다. 그에 반해, 그가 사랑의 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은 오로지 교쿄의 삶을 따라 최대한 천천히 하나하나 배우면서부터였다. 그것은 어떤 정해진 규칙대로라기보다는 상대방을 들으려하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낯설지만 그래서 이상하게도 더더욱 새로움을 더하는 교쿄의 침묵과 낯선 사랑을 주변에 두고서 슌페이는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대불 폭파 사건에 얽힌 특종을 잡기 위해 다시 동분서주한다. 이것은 마치 슌페이와 교코의 낯설고도 새로운 고요한 사랑 이야기에 시끄러운 배경처럼 펼쳐지고 접히기를 반복한다.

 

교코를 생각할 때마다 슌페이는 어디에 있든 고요함을 떠올려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특종에 매여 온갖 영상과 소리에 빠져든다. 그렇게 슌페이는 소리 있음과 소리 없음이라는 서로 다른 두 세계 사이의 극명한 공간을 오고간다.

 

소리에 익숙한 당신, 바로 옆에서 들리는 침묵은 잘 알아듣고 있나요

 

바쁘게 지나가는 영상에 빠진 우리는 지금 내가 아끼는 그 사람의 입술이 보여주는 미세한 변화를 읽어내는 섬세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있는 게 말인 것처럼 보여도 때론 말을 죽여야 비로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삶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내 소리를 죽일 때, 힘이 잔뜩 들어가 다른 그 어떤 소리도 안아들일 줄 모르는 내 목소리를 죽일 때 비로소, 내가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고마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가만, 점점 특종이 대박 가능성을 키워갈 때 어느덧 자신 곁을 떠나 어딘가에 숨어버린 교코를 슌페이는 다시 만났을지. 그리고 그런 불안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수많은 슌페이와 교코의 어제, 오늘, 내일이 아닐지. 막히지 않았지만 막힌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이 바로 우리 삶은 아닌가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닌지. <사랑을 말해줘>를 덮으면서 두 번 세 번 아니 계속 되묻고 답하고 되묻고 답해본다. 이전에는 가볍게 지나쳤던 말들을 교코를 만나서부터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반복해서 중얼대던 슌페이처럼.

덧붙이는 글 | <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은행나무, 2009.

* 이 서평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 다음 블로그 및 블로거뉴스에도 게재(또는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작성한 글에 한하여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2009.02.16 09:16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은행나무, 2009.

* 이 서평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 다음 블로그 및 블로거뉴스에도 게재(또는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작성한 글에 한하여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은행나무, 2009


#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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