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 아웃, 알코올 중독!

캐롤라인 냅의 <드링킹>

등록 2009.02.17 20:44수정 2009.02.17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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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링킹 ⓒ 도서출판 나무처럼

고도 적응형 알코올 중독 때문에 20년 넘게 술과 함께 살아온 전문직 여성이 있다. 그는 평소 글을 쓰지만, 10대 초반에 알코올 중독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술을 배우기 시작하여, 20년 넘게 술과 애인이 되어 지낸다.

그에게 술은 내가 원하는 나 자신이 되게 해주고, 진실에 이르게 하고, 소심함과 두려움에서도 벗어나게 하고, 마음에 응어리져 있던 분노를 터뜨리게도 해주고, 까닭 모를 허전함과 쓸쓸함에서 충만함과 완벽한 상호소통의 세계로 순식간에 다리를 놓아준다.


“나는 마셨다”로 첫 문장을 시작하면서 저자 자신의 알코올 중독을 다룬 <드링킹>(도서출판 나무처럼)은 십대 초반에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36살이던 1995년 스스로 재활센터에 입원하기 전까지 줄기차게 술을 마시는 즐거움과 고통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지난 1월 초순에 출간된 <드링킹> 저자 캐롤라인은 자신의 알코올 중독의 기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침 햇살 속에 눈을 뜬다. 머리가 너무나 무겁다. 너무 무거워 움직이는 것조차 고통스럽다. 안구 뒤쪽과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불끈거린다. 격심한 고통, 끈질긴 통증, 두개골 속 뇌액이 찐득찐득해진 듯 머릿속도 아프다. 구토감이 인다. 빈속을 채워야 할지. 무언가 먹으면 상태가 더 나빠질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몸속의 모든 세포가 제멋대로 풀려 흔들리는 것 같다. 마치 배선 공사가 잘못된 자동차 같다.”

“아침에 일어나니 옆자리에 남자가 누워 있다. 아는 사람일 수도 있고,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한순간 당혹스런 혼란이 몰려온다.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얼른 주위를 돌아본다. 옷은 입고 있나. 벗고 있나. 피임의 흔적이 있나. 콘돔 혹은 질 좌약 포장지 같은 것. 그리고는 눈을 감는다. 남자가 움직이면 자는 척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정신을 그러모아 지난밤을 돌이켜본다.” 

어쩌면 그에게 술 마시기는 매혹적인 러브스토리이고 또한 전쟁 같은 사랑의 기억이다.


“강하고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은 알코올이 자기 인생에 미치는 수많은 무형의 영향을 외면한 채 술을 부어넣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강하고 똑똑하고 유능하기 때문이다.”

술은 그에게 첫눈에 반한 사랑이었다. 차가운 술병에 구슬처럼 송송 매달린 물방울들. 챙그랑 챙그랑 술잔들이 부딪히고 대화가 흘렀다. 그런 뒤 그것은 집착이 되었다.

그는 애인의 집 냉장고 뒤에 술병을 감추었다. 저녁 식사 자리를 빠져나가 화장실로 갔고, 일터를 빠져나가 술집으로 갔다. 그런 뒤 수많은 러브스토리가 그러하듯이, 이 사랑도 무너졌다. <드링킹>은 캐롤라인이 20년 동안 알코올과 나눈 참담한 사랑이야기다.

이 책은 자기 연민이 배제된, 극도로 투명하면서도 정교하게 쓰인 아름다운 고백이다. 매일 같이 술과 전쟁을 벌인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나는 사랑에 빠졌지만, 그 사랑이 내가 아끼던 모든 것을 망쳐버렸기 때문에 결국 헤어졌다. 그것은 스무 해 동안 얽혀 있던 나와 알코올의 격정적이고 난마 같은 관계를 끊는 긴 발걸음의 출발이었다”라며 술을 마치 자신의 옛 애인처럼 비유하고 있다.

유명 저널리스트였던 캐롤라인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듯 보이지만 심각한 내적 결핍과 자신감 상실로 서서히 알코올에 중독된다. 그는 겉으로는 자기 일을 완벽히 수행하지만 고도 적응형 중독자로 술 없이는 하루도 자신을 지탱할 수 없다.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였던 아버지에게 알코올중독이라는 불행한 유산을 물려받은 그는 단순히 알코올의 위험성을 알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아울러 열정에 대한 이야기고, 감각적 쾌락과 깊은 흡인력, 욕망과 두려움, 타오르는 갈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온몸과 마음을 마비시키는 결핍에 관한 그의 은밀한 고백은 충격적이고 눈부시게 아름답다.

“나는 기뻐서 마시고, 불안해서 마시고, 또 우울해서 마셨다”라고 술 마시는 즐거움과 고통을 놀랍도록 솔직하게 고백한 그에게 술은 뒤틀린 현실을 잊어버리게 했고 자신감도 주었지만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이었다.

“술이 한 일이라곤 파편화된 느낌을 가속시키고, 통제력을 상실시킨 것뿐이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작가는 “내가 술을 좀 많이 마시긴 해. 하지만 상황이 이런데 어쩌겠어? 나는 좀 마셔도 돼”라며 위험한 변명을 한다.

또 그가 이룬 사회적 성공은 중독을 합리화하는 함정으로도 작용한다. 엘리트 여성인 작가는 자신이 어떻게 알코올로 인해 파멸했고 어떻게 중독을 극복했는지를 지나칠 만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미국 동부의 명문 브라운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재원인 그는 전문직 여성으로 남부러울 게 없어 보였지만 뒤틀린 가정환경에서 오는 내적 결핍으로 심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1996년 발간된 <드링킹>은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한 여자의 알코올 중독 이력에 놀랍고도 폭발적인 사생활 고백, 정교하고 매혹적인 문장, 뛰어난 심리분석으로 숱한 화제를 뿌리며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심각한 알코올 중독인 그는 저널리스트답게 문학을 통해 구원을 얻었으며, 책 속에는 그의 인생 여정에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강렬하게 그려져 있다.

그는 이 책을 수많은 음주 애호가들에게 바치고 있다. 우리들의 무례하고 거친 음주 문화는 어른 아이 없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할 것이며 심지어 그 기억조차 마실 것인가.

아마 이 땅에 많은 사람들도 술 때문에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며, 환호하고 절망할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얼마나 얄궂은 것인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작가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려한 문장을 자랑하고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를 다룬 이 책은 소설을 읽는 듯 한 재미를 주며 심리학적으로 인문학적으로도 빠지지 않는 깊이와 가치가 있다. 아울러 미국과 달리 술에 대해 지극히 관대한 한국 사회에도 음주문화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우는 작품이다.

<드링킹> 저자인 캐롤라인 냅(Caroline Knapp)은 1959년 저명한 정신분석학자인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쌍둥이로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1981년 브라운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이후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보스턴 피닉스'의 주간 칼럼니스트로 일했으며 '마드무아젤', '어트니 리더' 등에 기고했다. 여성지에 글을 쓰던 시절 여성으로서 쉽게 말하기 어려운 자신의 은밀하고 내밀한 사생활을 강렬한 묘사와 매혹적인 문체로 고백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은 책으로 ,<드링킹>, <남자보다 개가 더 좋아>, <세상은 왜 날씬한 여자를 좋아하는가>, <앨리스 K. 의 인생 가이드>등이 있다. 유복하지만 비틀린 집안에서 자란 캐롤라인은 애정결핍에서 오는 심리적 보상을 강력한 중독으로 대체한 불행한 삶을 살았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독자의 정신을 사로잡고 감동시킨 논픽션 시리즈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3년 6월 폐암으로 별세했다.

<드링킹>을 번역한 고정아 선생은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현재는 어린이 도서 집필 및 번역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똑똑한 아이가 되는 일곱 가지 사고력>, <나폴레옹>, <슈바이처>, 옮긴 책으로는 <엄마가 알을 낳았대>, <토끼 아저씨와 멋진 생일 선물>, <변신>, <모그하고 버니하고> 등이 있다.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 혼술에서 중독까지, 결핍과 갈망을 품은 술의 맨얼굴

캐럴라인 냅 지음, 고정아 옮김,
나무처럼(알펍), 2017


#술 #알코올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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