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싸구려 물건'이 아닌 '마음밥'이지만

[헌책방 나들이 187] 서울 용산 〈뿌리서점〉

등록 2009.02.19 11:26수정 2009.02.1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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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 광장 오른편 안쪽 골목, 여성단체협의회 건물 지하에 자리한 <뿌리서점>으로 내려가는 길. ⓒ 최종규

용산역 광장 오른편 안쪽 골목, 여성단체협의회 건물 지하에 자리한 <뿌리서점>으로 내려가는 길. ⓒ 최종규

 

 (1) 헌책방은 어떤 곳인가

 

 한겨울에 헌책방 〈뿌리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는 일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골마루가 안쪽으로 깊기 때문에, 손이 시려워 주머니에 꾹 찔러 넣고 눈으로 책이름을 훑다가 확 뜨이는 책이 있을 때 비로소 손을 꺼내어 끄집어냅니다. 책을 둘러보다가 난로가로 찾아가 손을 녹이기도 하고, 〈뿌리서점〉 아저씨가 타 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녹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추운 날에 책방 나들이는 수월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더러 들기도 하지만, 춥거나 말거나 책이 보고플 때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길을 나섭니다. 더운 날에도 마찬가지인데, 꽤 덥든 퍽 춥든, 헌책방 〈뿌리서점〉 골마루에는 책 하나 쥐어들며 눈을 반짝이는 분들이 골마루마다 한두 분이나 서너 분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른 책손은 주머니에 손을 쿡 찔러넣은 채 책을 살피다가 눈에 뜨이는 책이 있으면 끄집어내어 펼칩니다. 그러나 저는 한손에 사진기를 들고 있는 데다가 틈틈이 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에 손이 얼어붙습니다. 사진을 안 찍고 책시렁을 살펴볼 때에는 두 손을 모두어 잡습니다.

 

 ‘어, 춥다’ 하고 느끼면서 골마루를 슬슬 거닙니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데라면 이러한 추위를 느낄 일이 없을 터이나, 그런 따뜻한 책방보다, 이렇게 썰렁한 책방으로 발길이 더 가게 됩니다. 작은 데를 더 사랑하기 때문일까 생각해 보지만, 아닙니다. 헌책방이라서 더 사랑하게 되나 생각해 보지만, 이 또한 아닙니다. 똑같이 책이 있는 곳일 뿐이고, 헌책방에는 세월을 견디어 낸 책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까닭으로만 썰렁한 책방 나들이를 더 즐기게 되지는 않습니다. 돈을 앞세운 개발바람에 밀려나는 곳이라거나, 낮은자리에서 우리 이웃과 허물없이 어우러질 수 있는 곳이라서, 더욱 이곳 나들이를 하지도 않습니다. 한 해 두 해, 어느덧 스무 해 가까이 헌책방을 찾아다니고, 〈뿌리서점〉만 하여도 열일곱 해째 드나들며 만 권이 넘는 책을 사서 읽은 곳이 되었는데, 한 해가 저물녘이면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뿌리서점〉 집안에 일이 생기면 거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꼭 한식구라는 느낌입니다.

 

 덜덜 떨면서 《한완상-증인 없는 사회》(민음사,1976)라는 책을 집어듭니다. 요즈음, 이분 책을 찾아 읽는 사람이 있을까 고개를 갸웃갸웃해 보면서 펼칩니다. 어쩌면, 나 같은 손길이 나도 모르게 다른 자리에 있을 수 있을 테지 싶으나, 글쎄, 참말 이러한 책을 케케묵은 이야기라고만 여기지 않으면서, 이 책에 깃든 알맹이를 받아먹고 새로워지는 손길이 얼마나 될까 싶은 궁금함이 가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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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낡은 책 하나. ⓒ 최종규

겉그림. 낡은 책 하나. ⓒ 최종규

.. 남의 얘기할 것 아니라 내 얘기를 해 보자. 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은 TV에 완전히 압도당해 있다. 어린이 프로에 빠져버려 아빠가 돌아왔어도 인사 한 마디 없다. 하루 종일 못 보던 꼬마들이기에 나는 퍽 보고 싶었는데, 도대체 나의 귀가에 꼬마들은 관심이 없다. 할 수 없어서 나는 상관에게 관등성명을 대듯 스스로 알린다. 마지못해 꼬마들은 힐끗 한 번 쳐다보고 ‘아빠 왔어요’ 하고 다시 TV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재미있게 프로를 관람하는데 왜 귀찮게 구느냐는 식이다. 참 멋적고 섭섭한 순간이다 ..  (221쪽)

 

 세월이 흐르며 잊혀지는 책이 있는 헌책방이 아니라, 세월이 흐를수록 빛이 나는 책이 모이는 헌책방입니다. 추억에 잠기는 헌책방이 아니라, 추억을 새로 만드는 헌책방입니다. 값싼 책을 사는 헌책방이 아니라, 주머니 가난한 사람한테에도 마음밥을 널리 베푸는 헌책방입니다.

 

 세월과 함께 살아가는 책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며, 세월에 묻히는 책도 고즈넉히 잠들어 있으나, 이러한 책을 넘어서 세월을 앞서가는 책과 세월을 넉넉히 품에 안으면서 빙그레 웃는 책이 있는 헌책방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느 헌책방을 나들이해 보아도, 헌책방 아저씨와 아주머니 얼굴이 참 맑습니다. 책먼지와 책때로 손과 얼굴과 몸은 까무잡잡함이 가시지 않으나, 화장품이든 로션이든 하나도 바르지 않은 맨얼굴 맨손 맨몸이지만, 누구보다 맑고 빛이 난다고 느낍니다. 책도 책이지만, 이 고운 책을 다루는 고운 사람들을 몸소 만날 수 있고, 몸소 만나면서 배우니, 자꾸자꾸 헌책방으로 발걸음이 옮겨지는가 싶습니다. 집어든 책을 살며시 얼굴에 대어 봅니다.

 

.. 이렇게 음식물의 획일화는 시간과 노력을 아끼는 이점이 있는 대신 사람마다의 개성적인 입맛을 무시한다는 약점이 되고 있다. 특히 다양성과 개성미를 존중하는 미국에 있어서 ‘먹는 일’과 ‘맛보는 일’에서는 민주주의적 다양성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으니 재미있는 일이다 … 인간의 기본욕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먹는 일이라면 ‘어떻게’ 각자 입에 맞게 먹느냐 하는 것이 결코 시시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교묘한 대중조종을 통한 입맛의 전체주의화는 오히려 비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산업화니 근대화니 하는 깃발 아래서는 모든 것들이―건물이니 행동양식ㆍ사고방식까지 획일화되고 규격화됨으로써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경원해야 할 대중사회나 전체주의사회로 말려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  (225∼226쪽)

 

 

 (2) 사진잡지, 사진책, 공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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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밝히는 등불 같은 책을 품에 안는 기쁨이란... ⓒ 최종규

마음을 밝히는 등불 같은 책을 품에 안는 기쁨이란... ⓒ 최종규

 책을 펼쳐 읽다가 덮으며 헌책방을 빙 둘러봅니다. 다시 책을 펼쳐 읽다가는 둘레 다른 책손은 어떤 책에 눈을 박거나 마음을 쏟는지 슬그머니 건너다봅니다. 헌책방 아저씨가 샛장수한테서 새 헌책을 사들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기도 하고, 난로가에서 언손을 녹이기도 하며, 셈대에 놓인 건빵 몇 점 집어먹기도 합니다. 헌책방 아저씨가 책손마다 차 한 잔을 돌리다가 남게 된 차를 덤으로 더 마시면서 ‘〈뿌리서점〉 아저씨는 내가 커피를 안 마시는 줄 뻔히 아실 테지만, 벌써 열일곱 해째 그대로 커피를 주시네’ 하고 속생각을 하며 받아 마십니다. 그러고 보니, 〈뿌리서점〉을 찾는 다른 단골이 언젠가, 당신도 커피를 안 마시고 안 좋아하지만, 이곳에 오면 아저씨가 타 주는 커피를 안 마실 수 없다고, 보약이라고 생각하며 마신다고 했습니다. 그래, 나도 이 커피는 커피가 아니라, 헌책방 아저씨가 우리한테 베푸는 선물, 좋은 보약으로 여기자.

 

 보약 한 모금 들이키면서 사진잡지 《アサヒカメラ》(朝日新聞社) 936호(2004.11.)를 집어듭니다. 돈이 없는 사진쟁이로서는 헌책방에 철지나 들어오는 일본 사진잡지를 아주 고맙게 절하면서 챙겨 읽습니다. 어떤 이들은 일본에서 다달이 받아본다고 하며, 받아보던 일본 사진잡지가 잔뜩 쌓이면 그냥 버린다고도 하던데, 저는 이런 철지난 일본 사진잡지를 헌책방을 돌며 애써 하나둘 그러모읍니다. 부피가 늘어 자리를 많이 차지하게 되어도, ‘한국 사진잡지’는 아직 ‘차곡차곡 모을 만한 값’이 느껴지지 않으나, 일본 사진잡지는 웬만하면 호수를 다 챙겨서 모을 값이 느껴집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들 매무새가 훌륭하다고, 일본에서 한국땅까지 그 멀리로도 느껴지거든요. 일본말을 할 줄 몰라도 한 장 두 장 차근차근 넘기면서 읽게 되고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과 매무새였을까를 곱씹게 됩니다. 허투루 하지 않는 사진을 느끼고, 돈만 바라보지 않는 사진을 느낍니다. 무엇보다도, 사진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낍니다. 사진 없이 못 사는 삶이 아니라, 사진이 있기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느낍니다.

 

 《공병우 사진집 (2) 제주도》(1980)를 봅니다. 집에 두 권이나 갖고 있으나 또 집어듭니다. 자연, 사냥, 물질하는 아줌마 아가씨 할머니, 땔감 이고 가는 사람들, …… 대단한 사진작품이 아니지만, 타자기를 만들고 한글운동을 할 뿐 아니라 안과의사였던 공병우 님.

 

 공병우 님 둘레에 ‘사진을 더 사랑하고 깊이 껴안은’ 분이 있었다면, 아마 공병우 님은 사진밭에서도 대단히 굵직한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잠깐 스치는 취미쯤이 아니라, 사진밭에서도 ‘사진을 하려면 이만큼은 해야지’ 하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한껏 북돋우게 되지 않았으랴 생각하곤 합니다. 똑같이 제주섬 물질 아지매를 사진으로 담아도, 공병우 님 사진에 담기는 모습과 자취는 다른 ‘전문 사진작가’들이 섣불리 따라올 수 없는 애틋함이 서려 있습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이들이 물질 아지매를 사진으로 찍는다고 나섰고 작품도 곧잘 나오곤 하지만, 아직까지 공병우 님 사진만큼 웃음이 묻어나고 눈물이 돋아나는 사진으로는 빚어내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그러하니, 얇디얇은 작은 사진책으로 나온, 이분 공병우 님 책을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손을 뻗고야 맙니다. 가지고 있어도 다시 사서 가지고 있으며, 둘레에 사진 좋아하는 후배가 있으면 슬그머니 선물로 건네어 주게 됩니다.

 

 《America 24/7》(DK,2004)이라는 사진책을 봅니다. 영국 ‘돌링 킨더스리’에서 엮은 책입니다. 이곳은 어린이책을 사진으로 솜씨있게 엮어내는 곳으로 이름이 높은데, 저는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사진 다루는 매무새를 배우고자 곧잘 들여다보곤 합니다. 《America 24/7》라는 사진책은 ‘스물네 시간 이레’로,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삶’을 하루 스물네 시간이 어떠하고, 이러한 스물네 시간을 한 주라는 흐름으로 보여줍니다. 책을 죽 넘기는데, 이 가운데에는 오클라호마 시티에 사는 ‘한국 교포’ 모습이 있습니다. 아시아 사람들이 모여 벌이는 잔치에서 꼭둑각시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한복을 차려입은 모습이 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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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아저씨가 손수 짠 책꽂이에 손수 매만진 책들이 차곡차곡 꽂혀 있습니다. ⓒ 최종규

헌책방 아저씨가 손수 짠 책꽂이에 손수 매만진 책들이 차곡차곡 꽂혀 있습니다. ⓒ 최종규

 

 (3) 넘나드는 책읽기

 

 《최신해-국보 찾아 10만 리(한국국보총람)》(정음문화사,1985)라는 책을 봅니다. 최신해 님 수필은 퍽 여러 권 나왔으나 아직까지 한 권도 사지는 않고 헌책방에서 구경만 하고 제자리에 꽂아 놓곤 했습니다. 《국보 찾아 10만 리》는 여태껏 펴낸 수필책하고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 차근차근 읽어 나갑니다.

 

.. 국보 1호는 우리 나라의 심벌이어야 할 텐데, 남대문보다는 한글(훈민정음)을 제1호로 삼아야 좋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을 가진 분들이 많아졌다. 남대문은 보기에 웅장한 목조 건물의 대표적인 문화재임이 확실하나 지금은 이 주변에 고층빌딩 숲이 둘러쌌으니, 보기에 웅장하다는 느낌은 해가 갈수록 줄어든다. 그보다는 한국인이 창조한 정신적인 유산인 한글을 국보 제1호로 꼽아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젊은 층의 주장에 대해서 재검토를 해야 할 게 아니겠는가. 생각해 볼 문제다 ..  (12쪽/국보1호)

 

 최신해 님이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감 하나를 붙잡아 수필을 썼다면 여러모로 스스로 한결 발돋움하면서 재미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이런저런 수필로 글을 써 왔기에, 나중에 비로소 《국보 찾아 10만 리》 같은 책 하나 여밀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이 책을 낸 1985년까지 우리 나라 국보를 몸소 하나하나 찾아가 보면서 엮어낸 만큼 뜻도 빛도 값도 이야기도 새삼스럽습니다.

 

 그나저나, 최신해 님 앞이나 뒤에 우리네 국보를 꼼꼼하게 모두 돌아본 사람이 얼마쯤 있을까 궁금합니다. 틀림없이 있을 텐데, 그리 많지는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나라 문화부 장관이라든지 문화와 얽힌 일을 한다는 분들은 ‘국보가 훌륭하느냐 안 훌륭하느냐, 국보로 뽑을 만하느냐 아니냐’를 넘어서 차근차근 둘러보고 생각하고 보살피려는 마음결을 얼마나 갖추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외국 같으면, 특히 일본 같으면 이런 우수한 예술품은 조각그림이나 또는 복잡한 각면 하나하나를 사진으로 뜨고 크기를 실측하여 두툼한 책으로 만들어졌을 텐데, 우리의 실정은 어떤지 궁금하고 한심하다. 만약에 천변지이로 이 탑이 붕괴되면 그 전대로 보수 건립을 해야 할 텐데, 어떻게 되어 있는지 걱정이 된다 ..  (14쪽/국보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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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나들기를 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바다가 헌책방입니다. ⓒ 최종규

넘나들기를 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바다가 헌책방입니다. ⓒ 최종규

 

 나라안에서 내로라하는 지식인이면 누구나 ‘일본이라면 다를 텐데’ 하는 이야기를 꺼내곤 합니다. 저는 내로라하는 사람이 아니요 지식인도 아니지만,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책을 배우고 익히는 동안, ‘일본이 우리한테 후레자식 같은 짓을 했다고 하여도, 자기들한테 없는 역사와 문화를 빚어내려고 흘린 땀방울은 대단하다’고 느끼는 한편, 오늘날 한국은 일본한테 엎드려 절을 해야 하는 ‘역사 후진국과 문화 후진국’이라고 느낍니다.

 

 제가 국민학생 때 학교 교사들은 때때로 우리한테 ‘옛날은 우리가 일본보다 앞섰다지만, 이제 우리는 일본보다 삼십 년이 뒤처졌다’는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은 모방의 천재이다. 모방으로 현재와 같은 나라를 이루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런 말을 수없이 듣고 자라던 어린 나날, 제 깜냥껏 헤아리기로, 우리 스스로 높아지거나 나아지자면 ‘일본사람처럼 흉내내기를 잘해야겠구나’ 하고 어설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루이틀 한 해 두 해 이 책 저 책 읽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가운데, 일본이 오늘날같이 된 데에는 ‘흉내내기’가 아닌 ‘빚어내기’를 했기 때문임을 시나브로 깨달았습니다. 일본사람 모두 그러하지는 않습니다만, 일본 사회와 문화 밑바탕에는 ‘내가 아무리 미워하고 싫어하고 못마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보다 어느 작은 구석 하나에서도 훌륭한 대목이 있으면 그이 앞에서 고개 숙여 배운다’라고 하는 마음자리가 있다고 느꼈어요. 이와 달리 우리 나라에서는, 우리도 모두 그러하지는 않습니다만, ‘내가 아무리 좋아하고 사랑하고 반가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보다 어느 작은 구석 하나에서도 모자란 대목이 있으면 그이 앞에서 콧대를 높이고 만다’는 마음자리가 있구나 싶어요. 진보를 외치는 분들한테는 짜증스럽거나 싫을 수 있지만, 이명박 대통령한테서도 배울 대목이 있으면 배우고, 전여옥 의원한테서도 배울 구석이 있으면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내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스스로 이명박 대통령이나 전여옥 의원 같은 이들이 못마땅하더라도, 이러한 분들이 우리가 하려는 일과 이루려는 뜻을 받아들이고 새길 수 있을 만큼 더 애쓰고 더 힘쓰고 더 땀흘리고 더 고개숙이면서 나눌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어깨동무하는 일입니다.

 

 흔히 이오덕 님 같은 분은 ‘가르친다(훈계)’고들 이야기하지만, 이오덕 님이나 송건호 님, 문익환 님 같은 분들은 한결같이 ‘가르치려’ 한 적이 없습니다. 어깨동무를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르신은 당신이 미처 몰랐던 대목이 있으면 나이 예순이고 일흔이고 된 때에도 고개숙여 배울 줄 알았습니다. 당신이 조금 더 잘하거나 꿰뚫은 이야기는 스스럼없이 베풀 줄 알았어요. 이분들이 베푸는 이야기는 ‘내 지식을 나 혼자 잘난 척 갖고 있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베푸는 일, 어깨동무인데, 이런 베풂을 ‘가르침(훈계)’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셈이었지요. 우리들 어설프고 어리숙한 사람들 생각은.

 

.. 나는 서울의 서대문 밖에서 자라났는데, 내가 다닌 학교(지금의 금화국민학교)에서는 가을철 소풍을 꼭 북한산 승가사로 정해 놓고 가곤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혼자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처음으로 이 비석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고 누가 왜 이런 데다가 비석을 세웠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 바로 어제 같다 ..  (15쪽/국보3호)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일본은 ‘흉내내는 나라’가 아니었다고.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아니라고. ‘배우는 나라’가 일본이라고, 우리 한국은 ‘안 배우는 나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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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 하나에도 온 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 최종규

작은 책 하나에도 온 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 최종규

 

 (4) 만나는 책읽기

 

 《션 제임스 모리씨/최종열 옮김-자연에 대한 경외》(당그래,2004)라는 책을 봅니다. 책이름에 적힌 ‘자연’이라는 낱말에 눈길이 박힙니다. 무슨 책일까 궁금하여 펼칩니다. 캐나다 젊은이 한 사람이 한국에서 세 해 동안 두루 돌아다니고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책이라고 합니다. 이런 책이 다 나왔구나 생각하면서, 왜 나는 이런 책을 여태까지 몰랐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하기는, 아무리 이 책 저 책 샅샅이 훑으면서 빠짐없이 헤아리고자 한다 한들, 모든 책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세상 모든 좋은 사람을 빠짐없이 만날 수 없듯, 세상 모든 좋은 책을 빠짐없이 읽을 수 없습니다.

 

..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잘 사는 편이다. 그들이 익숙해져 있는 삶의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영토가 필요하다. 당신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보라. 그것들은 어쩌면 솜이나 다른 섬유들로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한 섬유들은 재배되는 것이며, 당신의 옷을 만들기에 충분한 섬유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다. 당신이 먹고 있는 음식 또한 재배되는 것이며 그러한 재배를 위해 많은 토지가 필요하다. 당신이 샤워하는데 사용하는 물은 그 물을 당신의 욕실까지 끌어오는 수도관을 매설하기 위해 많은 땅을 필요로 한다. 매일 당신은 쓰레기통에 물건을 버린다. 당신이 소비하는 모든 것은 결국 쓰레기더미로 가 버린다. 그 쓰레기더미는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넓은 부지를 필요로 한다. 당신이 이와 같은 모든 땅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당신의 일상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 당신은 이러한 모든 땅을 보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 … 당신은 당신과 관련된 환경을 초월하여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당신이 바나나와 같이 수입된 과일이나 수입된 옷을 살 때면 당신은 엄청난 양의 땅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  (49∼50쪽)

 

 션 제임스 모리씨 님은 지금 어디에서 살며 무슨 일을 할는지 궁금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 찾아보기를 해 보지만, 이분 삶자락은 도무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이 책이 처음 나올 때부터 여태까지 어느 한 사람도 이 책을 눈여겨보지 않았거나, 소개된 적도 없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외로운 책이었겠다고, 쓸쓸한 책이었겠다고, 눈물 한 방울 똑 흘리며 따순 손길을 기다리던 책이었겠다고 생각합니다.

 

 《익냐스 렙/제석봉 가려옮김-현대인의 정신 위생》(성바오로출판사,1970)이라는 작은 책을 봅니다. ‘정신 위생’이라는 낱말에 피식 웃음이 나다가, 그래 맞는 말이지, 아무렴, 오늘날 사람들은 ‘마음이 깨끗해야’ 하는데,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오늘날 사람한테는 이런 말을 붙여야 할 테지 싶어, 웃음을 거두고 책장을 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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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책 하나. ⓒ 최종규

겉그림. 책 하나. ⓒ 최종규

.. 어린이의 신경증을 부모가 먼저 신경증에 걸려 있을 경우에 제일 고치기 힘든 것이다. 어린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부모부터 검진하고 치료한 뒤, 손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  (23쪽)

 

 청소년범죄가 있다면 어른범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범죄를 뿌리뽑지 않고서야 청소년범죄를 뿌리뽑을 수 없습니다. 입시지옥이 있다면 회사지옥이 있고 인생지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교육 문제를 풀려면 먼저 어른들 사회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정치고 경제고 문화고 엉망진창이면서 아이들 교육 실타래를 풀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 청소년들이 관심을 두는 문제에 있어서는 언제나 ‘인간 대 인간’으로 진지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바를 권위와 경험을 내세워 누르려고 해서도 안 된다. 청소년은 권위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다만 자기들이 확신받는 것이지, 말을 듣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이 나이에는 공격성이 좀 지나치게 많다 해도, 없는 것보다는 덜 심각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격성이 많아도,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성장해 나감에 따라 모난 곳이 다듬어져 부드럽게 되는 걸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공격성이 없으면, 결코 자아로 되돌아올 수가 없고, 자만자족할 수 없으며, 생활의 난관을 극복하고 밀고 나갈 수가 없지 않을까 염려된다 ..  (85∼86쪽)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책을 죽 읽는데, 곳곳에 밑줄이 그어지고, 밑줄을 그은 다음 생각에 깊이 잠기게 됩니다. 책을 펴낸 곳이 성바오로출판사인데, 천주교회에 다니는 분들 가운데 얼마쯤 이와 같은 책을 읽어 보았을까 궁금하고, 개신교회에 다니는 분들이나 절집에 다니는 분들은 이러한 책을 어느 만큼 알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스스로 울타리를 세우지 않으면서 ‘넘나드는 책읽기’를 하는 마음자리가 있는지, 스스로 담을 쌓지 않으면서 ‘만나는 책읽기’를 하는 마음밭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5) 책이란 무엇인가

 

 책값을 셈하는 자리에서 〈뿌리서점〉 아주머니는, “어디 목 좋은 가게 나오는 데 없어요? 이사를 가기는 해야겠는데, 걱정이에요. 예전 같으면 이이(뿌리서점 아저씨)보고 ‘가게(지점)’ 하라고 오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제는 없어요. …… 우리는 집도 없지 가게도 없지(모두 삯 내어 살고 있음), (건물임자가) 옮기라면 옮겨야지. 월세가 제일 무서워요. …… 아저씨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눈도 안 좋아서 큰일이에요. 책이 안 보인다고 하거든. 지금 한쪽 눈으로만 보고 있는데 걱정이지. …… 나이 예순 넘은 사람들이 앞으로 무얼 할 수 있겠어. …… 저이도 (아이들한테는 헌책방 일을) 안 시킨다고 하지, 애들도 안 한다고 하지. …… 우리야 앞으로 하는 데까지 하는 거지요.” 하는 이야기를 길게 풀어놓습니다. “새책방에서도 1/3로 (책값을) 빼돌려서 후려치니까 새책 안 팔린다고 하잖아요. 동대문에서 그러니 출판사도 힘들지. 누가 정가대로 책을 사서 읽는다고 하겠어요? 새책을 덤핑으로 뒤로 빼내는데.” 같은 말씀을 듣다가, 이런 이야기를 헌책방집 아주머니도 알고 있음에도 왜 우리네 책마을은 예부터 뿌리깊이 박혀 있는 잘잘못을 못 고치고 마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 슬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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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책 사이를 누비면서, 우리 마음그릇 채우거나 적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최종규

책과 책 사이를 누비면서, 우리 마음그릇 채우거나 적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최종규

 

 인터넷책방에 들어가 보면, 어느 새책도 얼마얼마 깎아 주고 무슨무슨 쿠폰 붙이고 장난들이 아닙니다. 책을 책값 그대로 사고팔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책을 책값 그대로 사려고 하는 마음을 못 품습니다.

 

 책 한 권이 만 원이라면, 책을 쓴 사람과 만든 사람과 파는 사람 모두 이만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적어도 이만한 대가를 받아야 ‘그 다음 좋은 책’ 하나를 새로 만들 힘을 얻는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책을 이렇게 싸구려 짐짝 대접을 하고야 맙니다.

 

 책은 책일 뿐인데. 책은 물건도 아니요 짐짝도 아니요 싸구려도 아닌데. 마음을 살찌우는 책이요, 생각을 북돋우는 책이요, 삶을 일구는 책인데.

 

 아무래도 오늘날 세상은 사람이 사람이 아니다 보니 책이 책이 아닐밖에 없을까요. 오늘날 세상은 돈이 돈다운 값어치로 흐르지 못하니 책이 책다운 값어치로 손에 쥐어지기 어려울까요. 오늘날 세상은 물질문명에 풍덩 빠져들어 허우적거리도록 짜여져 있기에 책을 책답게 붙잡으려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말까요. 책 든 손도 바보가 되고, 책 안 든 손도 바보가 되도록 하는 엉터리 세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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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9 11:26 ⓒ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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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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