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속의 히스 레저, 고마워요! 축하해요"

[해외리포트] 호주 산불의 절망감 극복하게 한 아카데미 수상 소식

등록 2009.02.23 20:32수정 2009.02.23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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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출신 배우 히스 레저의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 소식을 보도한 <시드니모닝헤럴드>. ⓒ 시드니모닝헤럴드


호주 출신 영화배우 히스 레저가 미국 LA 할리우드 코닥극장에서 열린 8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는 영화 '배트맨' 시리즈의 최신작 <다크 나이트>에서 정신분열적인 악역을 맡아 최상의 연기를 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영화인으로서 일생일대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는 시상식 무대에 그는 없었다. 2008년 1월 22일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기 때문.

이로써 히스 레저는 사상 두 번째로 사망 후에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배우가 됐다. 1976년 영화 <네트워크>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피터 핀치가 지금까지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55년에 요절한 배우 제임스 딘이 사망 후에 <에덴의 동쪽>과 <자이언트>로 두 번이나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의 영광을 얻지는 못했다. 아카데미상이 노벨상과 마찬가지로 생존배우에게만 시상하는 원칙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주 산불의 절망감 극복하게 만든 히스 레저의 수상

히스 레저의 연기는 30여 년 만에 또다시 그 원칙을 깰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영화 팬들은 물론, 영화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다크 나이트>는 히스 레저의 신들린 듯한 연기로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타이타닉>에 이어 사상 두 번째로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또 그의 사망 1주기 때는 전 세계적으로 영화가 재상영되어 박스오피스 상위에 다시 랭크되기도 했다.


히스 레저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외에도 골든 글로브상, 영국 아카데미상, 영화배우조합상, 뉴욕·LA·시카고·플로리다·샌프란시스코·토론토·워싱턴 주 비평가협회상을 휩쓸었다. 모두 남우조연상이다.

히스 레저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 하루 전인 2월 22일은 산불로 사망한 209명(22일 현재)을 애도하는 호주 '국가 애도의 날(National day of mourning)'이었다. 산불 재난이 일어난 빅토리아 주뿐만 아니라 호주 전역에서 조기를 걸고 애도의 행사를 열었다.

애도의 날 행사에서 케빈 러드 총리는 "호주는 아직도 상중(喪中)"이라고 말할 정도로 국민적 슬픔이 가시지 않은 상태다. 이런 가운데 히스 레저의 수상소식은 호주 국민들에게 큰 위로가 되고 있다.

신들린 연기를 선보인 <다크 나이트> ⓒ 다크나이트


사랑할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호주인

러셀 크로우, 제프리 러시, 멜 깁슨, 니콜 키드먼, 케이트 블란쳇, 쥬디 데이비스 등 그간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호주 출신 배우들이 여럿 있음에도 이번 히스 레저의 수상소식에 호주인들이 이토록 환호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최근 호주 동남부와 동북부에서 동시에 발생한 산불재난과 대홍수로 국가 분위기가 바닥으로 처져 있는 상황에서 들려온 낭보이고, 히스 레저가 '호주인의 비극적 정서를 가장 잘 담아낸 배우'로 평가 받으면서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1979년 서부 호주에서 출생한 히스 레저는 광활한 목장이 펼쳐진 자연환경에서 성장하면서 호주인의 전형적인 성격을 형성했다. 조금은 외로운 듯 보이면서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호주 특유의 '오지(奧地, outback)의 정신력'을 이어받은 것.

활동무대가 주로 할리우드였던 히스 레저가 틈만 나면 호주로 달려와서 호주의 역사적 배경이 깔린 영화에 출연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16살의 히스 레저. ⓒ 호주채널9 화면캡처

17살에 시드니로 진출하여 본격적인 배우수업을 받은 히스 레저는 호주 출신의 대스타들인 멜 깁슨, 러셀 크로우 등의 권유를 받아 19살에 할리우드로 옮겨갔다. 그가 비교적 빠르게 할리우드에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연기력도 있었지만 호주 영화인들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7년 영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로 데뷔한 히스 레저는 호주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멜 깁슨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페트리어트>(Patriot 2000)에서 그의 아들 역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 오랫동안 큰 힘이 됐다"고 밝혔다.

또한 "호주 영화에서 확실한 족적을 남기라"는 러셀 크로우의 조언을 받고 출연한 <네드 켈리>(Ned Kelly, 2004)에서 호주의 전설적 인물을 연기하는 영광을 얻었다. 호주에서 두 번 만들어진 <네드 켈리>의 첫 번째 영화(1967)의 주인공은 '롤링 스톤즈'의 리드싱어 믹 재거였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호주 목동들한테 영향 받아

히스 레저의 출세작이 된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2006)에 대해 호주 영화계에서는 "그가 소년시절까지 서부 호주에서 살면서 직접 겪은 체험들이 자연스런 연기로 녹아들었다"고 평했다.

<시드니 모닝헤럴드>의 문화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마르는 "아직 나이가 어린 히스 레저가 호주인의 비극적 정서가 제대로 담긴 표정으로 연기하는 게 놀랍다"면서 "그게 타고난 재능이기도 하겠지만, 서부 호주의 광활한 목장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강인한 정신력에 익숙한 탓"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히스 레저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브로크백마운틴> ⓒ 브로크백마운틴

그러나 우울증에 가까운 히스 레저의 풍부한 감성은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처럼 거의 광기에 가까운 연기로 발산되기도 했지만, 결국 그 비극적 정서를 견디지 못하고 28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그 당시 이혼하고 스웨덴으로 떠난 아내와 그 사이에서 낳은 딸 마틸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상태였다.

히스 레저가 죽기 직전까지 촬영 중이던 영화, 테리 길리움 감독의 <파나수스 박사의 상상공간>(The Imaginarium of Doctor Parnassus)은 오는 6월에 개봉될 예정이다.

천재적 배우로 각광받던 히스 레저의 요절을 두고 호주 국민들은 아직도 안타까워하고 있다. 비록 사망한 다음이지만, 그가 이번에 아카데미상을 받은 것이 호주인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듯하다.
#히스 레저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다크나이트 #브로크백마운틴 #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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