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범한 '남대' 휴학생
'여자'만큼만 누리고 싶어요

<여성학> 읽은 여대생이 쓴 '남대생의 일기'

등록 2009.02.24 14:58수정 2009.02.24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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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ww.sxc.hu

나는 남중·남고를 다녔던, 평범한 '남대' 3학년 휴학생이다. 내가 다니는 남대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종합 남자대학이다. 여대라는 말은 없는데 남대가 있는 이유는 '대학'이란 것이 여자들만을 위한 교육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남대가 처음 설립되었을 때, 여자들뿐 아니라 같은 남자들 또한 교육받는 남자들에 대한 반감, 더 나아가 적개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것은 여자들만의 특권에 대한 도전이자 기존 세계에 대한 도발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모교에서 배출한 많은 선배들이 금남의 영역을 뚫었다. 여자들의 세계에 최초로 진출한 그들 중에는 최초의 남의사도 있었고 최초의 남교수도 있었으며 최초의 남성 법조인·남성 과학자·남성 축구심판·남성 소방관·남성 CEO·남성 총리도 있었다.

나는 영국 왕 엘리자베스 2세나 미국 대통령의 부군인 '퍼스트 젠틀맨' 클린턴 등도 찾는 우리 학교에 나름 애교심을 갖고 있다. 나 또한 남성의 영역을 확대할 수 있는 남성 리더가 되고 싶다. 하지만 그 모든 상징성 때문일까?

사람들에게 우리 남대는 '사치스럽고 오만하며 개념 없는 안티페미놈들의 학교'라는 억울한 이미지로 유명하다. 모 영화에서 남주인공이 '나 남대 나온 남자야'라고 경찰들에게 패악을 부릴 때, 당신은 웃었고 우리는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때 나는 신입생이었는데 누가 학교 어디 다니느냐고 물어보는 게 싫었다. 학교를 부끄러워하게 만들다니. 남대의 기를 죽여 놓겠다는 심보였을까? 남대 선배들이 사회에서 얼마나 나쁜 짓을 했다고 남대 나온 것이 온 국민에게 웃음거리가 돼야 하나. 대체 왜 내 학교가, 아니 남대가, 아니 내가, 당신들의 '공공의 적'이 되어야 하는가?


그랬더니 어떤 사람들은 말했다. 너희 남대 애들이 하도 '드세니까' 그렇지, '나대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럼 그 드세고 나대는 것은 누구를 위에 설정해 두고 하는 말일까? 남자들은 항상 동의하고 순종하고 침묵을 지켜야 하는 수동적인 타자여야 한다는 말인가?

가장 좋은 '스펙'은 염색체?

어쨌든 현실은 아무것도 아닌 남대생이란 것이다. 이제 복학하면 졸업이 코앞이란 생각에, 소심한 나는 앞날이 걱정되어 불면증을 앓고 있다. 어제는 대기업 자동차 회사 신입사원 연수를 다녀온 친한 형을 만났다. 우리는 홍대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다 큰 남자애가 밤에 돌아다닌다고 아버지가 타박하셨다.

요즘 남대생들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급증했다. 아버지는 내가 옷을 너무 조금 입고 다니는 게 아니냐고 걱정하셨다. 하지만 남자가 옷을 야하게 입고 다닌다고 성범죄가 생기는 것인가? 나를 치장하고 다니는 것은 자기만족 아닌가! 그러나 어제 읽은 <남성학> 책에서 읽은 글귀가 생각났다.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았던 남성들에게 힘을 가진 여성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그들의 지위와 권위에 편승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남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은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 남성들의 치장은 여성들에게 선택받기 위한 일종의 생존 본능이다. 여성들이 근육과 덩치 등을 자랑하는 한편, 남성들은 더 날씬하게, 더 가냘프게,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한 품에 쏙 안기는 외모를 지향하게 된다. 여성들은 점점 더 커지고 남성들은 점점 더 작은 공간과 부피를 차지하려 한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이 심리는 가중된다."

그래, 어쩌면 나도 모르게 나는 여성들의 세계에 길들여지고 있었나 봐. 하지만 이유가 뭐가 되었든 간에 우리 남대생들 사이에서는 외모도 '경쟁력'이라며 '스펙'의 하나로 취급되고 있다.

여러 가지 팁을 얻을 요량으로 만난 것이었는데 형은 씁쓸한 이야기를 했다.

"내가 그동안 왜 그렇게 취직이 안 되었는지 이유를 좀 알 것 같더라. 이번 우리 신입 동기들이 총 20명이었는데, 그중에 남자는 나까지 딱 2명밖에 없었어."

"역시 자동차회사라서 여자를 더 선호하는 걸까요?"

형은 자못 비장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꼭 그런 것도 아닌 것같아. 남자들이 주 고객층인 화장품 회사도 여자신입사원을 선호하고 남자가 주 소비자인 드라마도 남자PD들은 드라마PD로 뽑지도 않는대. 가장 좋은 스펙은 XX염색체인 거야. 솔직히 내가 사장이라 해도 결혼하고 애 낳고 나면 육아에 전념해야 하는 남자 대신 여자들을 뽑은 게 더 수지타산에 맞을 것 같아. 젠장."

결혼은 남자·여자 둘이 같이 하는 것이고 애도 둘이 같이 낳는 것인데, 왜 여자는 애 낳고 계속 일하고 남자에게만 집안일과 육아를 강요하는 것인가. 물론 요즘에는 출산 휴가니 뭐니 많이 나아진다 하지만 애 낳고도 계속 회사 나오는 남자를 보는 여자 동료의 시선은 '부성애도 없는 놈'. 처가댁에서도 여자는 사회생활 해야 되니 남자에게 희생하라 종용하고. 그래, 그놈의 '내조'가 문제다. 왜 여자들에게 '외조'를 기대하면 안 되느냔 말이다!

괜스레 서글픈 마음에 칵테일 집에서 대폿집으로 자리를 옮겨 형과 쇠주 몇 병을 비워냈다. 주변 사람들은 남자 둘이 진탕 술을 퍼마시는 걸 은근히 곁눈질로 훑어보고 별일인 듯 수군대고 있었다. 형이 담배를 꺼내물자 회식 온 듯한 옆 테이블에서 나이 지긋한 아줌마가 여봐란 듯이 말했다.

"요즘 젊은 사내새끼들은 본데없이 자라서 저렇게 담배를 잘도 꼬나문단 말이지."

부하 직원쯤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부장님, 요즘 그런 소리 하시면 성차별로 신고당해요!"하면서 짐짓 앙칼지게 대들자 아줌마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어이, 미스터 김. 그런 말 말고 한 잔 따라봐. 그래 김군은 남자가 담배피는 거 찬성이야?"

"흡연도 개인의 기호니까, 남자라고 해서 피우지 말아야 한다, 뭐 그런 건 아니죠. 다만, 나중에 임신할 때 태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니까, 2세를 위해서 남자 흡연은 좀 위험하다, 뭐 그런 거지요."

옆에서 보고 있던 다른 아줌마가 건배를 제의하며 말했다.

"부장님 이거 보셨죠? 요즘 남성들 이렇게 당찹니다! 허허, 미스터 김 남자가 좀 사근사근한 맛이 있어야지. 그러면 매력 없어 장가 못 가! 자자, 건배하자구 건배!"

똑같은 인간으로 대우받고 더불어 살 수 있었으면

남학교에 다녀서 내가 실감을 못했던 것일까. 언젠가부터 세상은 남자들에게 기대하는 정형의 틀을 만들어 놓았다. 남자들은 공공장소에선 담배를 피우면 안 되고, 여자들에게 또박또박 말대답할 수 없으며, 사근사근하지 않으면 매력이 없어 장가도 못 간다는 것이다. 형과 나는 술맛이 다 떨어졌다.

형과 헤어져 집에 가는 길. 이렇게 술을 마신 날이면 괜스레 짝사랑하는 그 애가 생각이 난다. 어렵게 전화번호를 알아냈는데 그렇다고 내가 뭘 어쩌겠나. 용기를 내서 고백하고 싶은데 말이 쉽지, 여자들은 남자가 먼저 고백하면 재미가 없어서 싫어한다나? 형들은 소개팅이나 미팅을 주선해 주면서 '내숭'과 '늑대짓'을 하라고 조언해준다.

좋아도 싫은 척 본심을 숨기고 남자는 여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주면 되는 거란다. 여자들도 피곤하겠지만 남자들도 피곤하다. 내숭이 없으면 '남자가 밝힌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웃기는 소리다. 남자는 밝히면 안 되고 여자는 밝히는 것이 당연한가?

그러고 보니, 주변 누나들 중에는 대학 들어오기 전에 이미 처녀 딱지를 뗐다고 자랑하는데, 내 주변 남성 친구들은 보수적이라서 그런가, 결혼할 사람이 아니면 순결을 지키겠다 하여 모두 성경험이 없는데….

어쩌면 친구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할지도 모르지, '쉬운 남자'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대체 그 누나들은 다 어디에서 경험을 댓번씩 하는 것인가? 군대 갔다 오면 다 한 번씩 해본다던데, 아아, 그러면서 그들은 결혼할 때면 총각을 찾으니, 여기서 또 우리 사회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아이러니한 것은 결혼 적령기가 이제 서른쯤으로 높아졌는데, 그때까지 총각으로 남아 있는 남성이 더 이상한 것 아닌가? 모르겠다.

나는 남자들이 여자들을 휘어잡는 세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남자들이 여자들만큼 세상을 누리고 살았으면 좋겠다. 더불어 여자들이 자기보다 '비주류'로 상정해 놓은, 남자를 비롯한 소수자들도 그들과 똑같은 인간으로 대우받고 더불어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대체 남성이니 여성이니는 누가 정해 놓은 것인가? 애초부터 그런 것이 있었는지, 아니면 여성들이 자신들이 보다 강해지는데 필요한 경쟁력 있는 덕목들을 자기들의 전유물인 양 강조하고 남성성이란 여성성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규제시켜놓은 것은 아닐까? 우리는 똑같은 사람이 아니던가!

왜 내가 당당하고 씩씩하고 명랑 발랄한 것이, (때로는 칠칠치 못한 것이) 남자답지 못하다고 핀잔받는 것인가? 당신과 내가 정말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한번 물어보고 싶다. 이 모든 것이 정말 당연한지.

덧붙이는 글 | 연유진 기자는 이화여자대학교 3학년 학생입니다.


덧붙이는 글 연유진 기자는 이화여자대학교 3학년 학생입니다.
#여성학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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