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9.02.24 15:44수정 2009.02.24 15:44
우리나라 근대 3대 천재라 하면 육당 최남선, 위당 정인보, 무애 양주동을 일컫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재능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재능을 가진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다. 만일 정약용이 삼국지 시대의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제갈량을 능가하거나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전략가가 되었을 것이다.
시, 서, 화는 물론이요 천문, 지리, 어학, 경제학, 의학, 철학, 과학을 두루 섭렵한 정약용 선생을 과연 누가 따라갈 수 있을까? 어마어마한 저서와 그 저서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깊은 철학을 누가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거중기라는 희대의 발명품을 만들어 수원 화성의 공사기간을 단축시킨 그 뛰어난 과학적 재능을 누가 능가할 수 있으리오. 실로 정약용 선생은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천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재주가 많으면 하늘이 시기한다고 했던가? 다산 선생은 그 탁월한 재능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일생의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선생은 유배지에서 마냥 허송세월을 한 것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학문에 연마했으며 집필에 몰두했다. 목민관의 올바른 자세를 적시한 목민심서, 일종의 경제서인 경세유포, 그리고 흠흠신서 등 약 천 권의 저서들이 거의 유배지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하니 선생의 학문적 열망 앞에 그저 머리가 조아려 진다.
전라남도 강진군, 그 애달픈 남도 땅에서 '다산초당'을 만나던 날. 하늘에선 가녀린 눈발이 날리고 있었고, 다산 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처연한 나신으로 객들을 맞이하는 '뿌리'들이 있었다. 시인 정호승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고 했다지. 수 백 년 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서로를 옭아매는 신비의 길. 이 길을 따라 힘겹게 올라가니 저 멀리 숲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기와지붕이 있었다. 초가지붕 대신 기와지붕을 보니 약간의 실망감이 뭉실 피어올랐다. 그러나 어찌하랴. 수 백 년의 세월은 다산의 체취가 남아 있는 초가집을 삭풍에 실려 보냈으니 아쉬워도 객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초당의 마당에 들어서니 먼저 다산초당이란 현판을 건 서암이 보인다. 원래는 제자들의 거처로 쓰였다는 이곳. 그 서암의 마당 앞에 넉넉한 돌 하나가 다산의 향을 풍기고 있으니 이른바 다산초당의 제3경이라는 '다조'이다. 다산이 오기 전부터 차 달이는 부뚜막으로 쓰던 곳이란다. 다산은 이곳에 솔불을 피워 약천의 물을 데워서 차를 마셨다고 했다. 백련사의 초의 선사와 진한 우정을 나눈 것도 바로 이 다조였겠지. 가만, 약천이라 그럼 이 근처에 샘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다조를 뒤로 한 채 오른 쪽으로 돌아가니 과연 작은 샘이 하나 있었다. 마당 한 구석에 초라하게 놓여 져 있는 작은 샘. 다산이 촉촉이 젖어 있는 곳을 파보니 돌 틈 사이에서 물이 솟아 나와서 그대로 샘이 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가물어도 결코 마르지 않는다는 약천. 다산은 이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했다고 한다. 이곳이 바로 다산초당의 제2경이란다.
약천을 일별하고 다시 다조로 돌아와서 동암으로 향하니 중간에 작은 연못이 하나 눈에 뜨인다. 앙증맞도록 귀여운 연못. 어설프게 쌓인 석축 안에 담긴 맑은 물은 포근히 나려오는 눈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미동 하나 없는 한 무리의 잉어들. 그 잉어를 위에서 조용히 내려다보는 돌탑 하나. 이름 하여 석가산이라고 했던가. 다산은 바닷가에서 돌을 주워 연못 가운데에 조그마한 봉을 쌓았고, 이 봉을 연지석가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석가산을 제4경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제 1경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서암과 동암을 둘러보고 난 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에서 '丁石'이라 새겨진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저것이 제 1경이 아닐까. 다시 발길을 돌려 계단으로 올라갔다. 참으로 소박하면서도 단정하게 박혀 있는 '丁石'이란 글자 하나. 다산이 자신의 성을 따서 투박하게 새겼다는 그 글자에는 단아한 기품이 서려 있었다. 이곳이 다산 초당의 제1경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산이 직접 새겼다는 이 바위에는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가진 다산의 모습이 오롯이 스며 있었다.
잠시, 정석에 기대어 눈을 감아 보았다. 그리고 떠올려 보았다. 그 옛날, 다산이 이곳 초당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전수하던 장면이 흐리마리하게 피어오른다. 또한, 초의 선사가 구름처럼 마당으로 내려와 다산과 더불어 향긋한 차를 마시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 시대의 천재이자 고결한 인품과 철학을 가진 대 스승, 다산 정약용. 그의 품격과 체취가 물씬 녹아있는 다산 초당을 뒤로 하며 객은 다시 뿌리의 길로 내려갔다. 다산 초당에 흐르던 고즈넉한 향훈을 결코 잊지 못하면서.
2009.02.24 15:44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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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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