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고사 파문이 일파만파로 불거지고 있다.
이런 정책을 내어놓은 입안자들은 이러한 문제들이 있을 것이라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까? 못했다면 무능한 것이고, 예측을 했음에도 강행했다면 직무유기다. 학생들을 시험성적으로 줄 세우는 것도 모자라 이젠 학교까지 시험성적으로 줄 세우고, 성적 좋은 학생들만을 위한 교육으로 타락한 것도 모자라 성적 좋은 학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일제고사 시험성적 조작문제가 여기저기서 불거지고 있고, 그 문제들을 어떻게 수습할 것이며 그런 문제를 없애려면 어떤 방법을 세워야 할지 방안도 없는 현실임에도 3월 10일, 일제고사를 기어이 치러 좋은 학교를 선별해 적극 지원하겠다고 한다. 도대체 문제가 생겼으면 그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할 터인데 막무가내 밀어붙이기 식으로 밀고 나가니 답답한 노릇이다. 사교육비를 줄여주겠다더니만 사교육비로 폭탄세례를 받게 하는 정책들을 내어놓으니 학부모들도 죽을 맛이다.
좋은 학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겠다?
그들의 개념에서 '좋은 학교'란 성적이 높은 학교다. 이런 무개념이 어디에 있는가? 시험성적이 아니라 각 개인의 창의력과 가능성이 대학합격의 기준이 되게 하겠다고 공언하는 정부가, 학교는 시험성적으로 좋은 학교와 나쁜 학교를 나누겠다는 시도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일제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학교는 그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겠다고 하니 분명 좋은 학교와 나쁜 학교는 성적순으로 분류되는 것이리라.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말들을 쏟아내면서도 전혀 문제점을 의식하지 못하는 현 정부의 교육정책과 입안자들의 논리에 학부모인 나는 절망한다.
'시험을 잘 보는 학생 혹은 성적이 좋은 학생 = 좋은 학생'이라는 등식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며 도식적인 발상이다. 물론 그렇다고 성적이 좋은 학생이 나쁜 학생이라는 말은 아니다. '기초미달 학생 = 나쁜 학생'이라는 도식이 성립할 수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처럼 시험성적만으로 이거다, 저거다 평가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일제고사를 통해서 좋은 학교와 나쁜 학교를 선별하겠다 하고, 게다가 성적이 나쁜 학교는 책임을 추궁하겠다고 하니 이번과 같은 문제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더 정교하게 이런 비리들이 일어날 것이 뻔하다.
학생들에게 뛰어놀 수 있는 자유를 허하라!
시험에 주눅들지 않을 학생, 학부모가 어디에 있을까?
요즘 학생들의 동선은 학교와 학원 외에는 없다. 방학에도 학원에 치여 마음껏 뛰어놀 수가 없는 현실이다. 학교 숙제와 학원 숙제에 치여 학교공부와 관련이 없는 독서는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학교공부를 따라가기가 어려워 어려서부터 아예 실패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다. 시험성적으로 아이들을 나누고 그것도 모자라 성적이 낮으면 실패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교육풍토에서 어떤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학생과 학부모 모두 죽이는 길로 올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쟁에서 경제적으로 풍족한 이들은 열외다. 교육기회의 평등을 이야기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죽어라 맨발로 자갈길을 뛰어가야 하고, 어떤 아이들은 최고급 자가용을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것과 다름이 아닌 현실을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다. 성적으로 아이들의 미래를 확연하게 구분하는 교육, 이런 교육에 어찌 미래가 있다고 하겠는가?
아이들은 놀면서 배운다.
아이들이 지닌 잠재력, 창의력을 믿지 못하는 무지한 어른들이 아이들의 잠재력과 창의력을 좀 먹어들어가는 것이다. 일제고사는 이런 무지한 어른들의 행동을 부추기고 합리화하는 아주 원시적인 교육방식의 다른 이름이다.
학교는 죽었다
교육학자 이반 일리치가 쓴 <학교는 죽었다>라는 책에는 대략적으로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만약에 상어가 물고기 학교를 만든다면 상어는 물고기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칠 것이다.
상어의 입속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물고기 생의 궁극적 목표는 상어의 입속에 들어가는 것이며, 상어의 입속에 들어가기 합당한 물고기가 되려고 스스로 건강하고 훌륭한 물고기가 되어야 한다고. 그리하여 상어의 입속으로 당당히 들어가는 물고기를 다룬 뮤지컬이 나올 것이고 상어를 칭송하는 노래를 만들어 부를 것이다.
어떤가?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학생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이며, 일류대학에 들어가기 합당한 학생이 되려면 시험성적을 잘 받는 기계가 되어야 한다고. 그리하여 일류대학에 당당하게 입학하면 그는 장밋빛 인생을 살 것이라고 우리는 부추기는 것이 아닌가?
대학입시가 끝나면 언론에서도 앞다퉈 일류대학을 어느 학교가 많이 보냈는지를 집중보도하고, 그 학교는 일류 학교가 된다. 일류 대학 합격생을 내지 못한 학교는 졸지에 나쁜 학교가 된다. 좋은 학교, 나쁜 학교의 가름이 이러면 되겠는가? 그런데 우리 현실은 이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학교는 죽었다는 증거다.
'국·영·수' 위주의 교육은 사라져야 한다
이번 일제고사 파동에서의 몇 가지 실례 중에서는 운동선수들을 시험에서 제외한 것이 도마에 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사를 보면 '운동선수도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회자한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잘'이라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기초학력 미달수준이 아닌 정도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어느 정도인지 그 '잘'이라는 표현에는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현재의 교육체제는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을 전공으로 삼고, 평생 자신의 일로 삼고자 해도 국·영·수를 잘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시스템이다. 국·영·수를 못하면 성적이 나쁠 것이고, 성적이 나쁘면 대학에 입학할 수가 없다(아주 특별한 경우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처럼 학력과 간판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실패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체제에서는 자신의 장기나 창의성을 살리기보다는 끊임없이 국·영·수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물론 전혀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기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능력, 셈을 할 수 있는 능력, 외국인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 등을 가지는 것은 자기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데 참으로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국·영·수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실제생활 혹은 자신의 전공과 동떨어진 것이 많다는 것이다. 왜 모든 학생이 그 어려운 미적분까지 배워야 하는가?(어떤 학생에게는 쉽고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만.)
3월 10일, 일제고사 학부모들이 반대해야 한다
산적한 교육문제들을 뒤로하고 원시적인 방식으로 학생과 학교를 평가하는 일제고사는 현시점에서 학부모들이 결단을 해야 한다고 본다. 이번 일제고사도 강행이 된다면 반대하는 교사들은 징계를 당하고, 시험을 본들 성적부풀리기에 자의반타의반으로 동조하고, 더 나아가서는 성적을 조작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 시험을 거부하면 결석처리를 할 것이며,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고 암암리에 협박을 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학부모가 결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었다면 이렇게 불거질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의 교육정책은 아이들과 학부모 모두 죽이는 교육정책이다.
한번 상상해 보라. 공교육이 정상화되어 사교육비 없이도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우리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삶의 질이 얼마나 높아질지를. 나는 꿈꾼다. 우리 아이들이 시험성적에 주눅이 들지 않고, 국·영·수에 치이지 않고 자신의 끼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학교를. 그러려면 '우리 아이만'이라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 학생 시절,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 때에도 우리가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던 이런 식의 교육이 계속될 것이라 상상이나 했는가? 오히려 더 심화한 현실에서 우리의 아이들은 얼마나 힘들 것인가? 아이들이 힘든 만큼 우리는 또 얼마나 힘든가?
2009.02.25 20:48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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